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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52)화 (52/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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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

“네?”

“웃기냐고요.”

“…….”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 그들 중 누구 하나 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두 세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고작 이런 이들에게 휘둘릴 리가.

“왜 아무도 답이 없어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나도 알려 달라 하려 했는데.”

“황후 폐하께 무례하게 이 뭐 하는 짓들인가!”

칸제로스 공작이 불현듯 표정을 굳히고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누구 하나 반박하는 이 없이 조용해졌을 때 회의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귀족들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공작 또한 표정을 풀고 방금 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하게 허리를 숙였다.

하드엘은 그들의 인사를 받지 않고 무심히 지나쳤다. 회의장에 들어오고서 그의 시선은 줄곧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그런 하드엘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드엘이 자신의 자리, 그러니까 내 옆자리에 다가왔을 때 나 또한 그를 향해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다.

“폐하, 오셨습니까.”

나는 그가 말없이 자리에 앉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예상, 아니 당연한 추측은 정확히 빗나갔다.

“몸은? 이제 괜찮은 것이오?”

하드엘의 회색빛 눈동자는 걱정스러운 빛을 가득 띠고 있었다.

이곳은 회의장이었다.

공적인 자리였고 하드엘은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사사로운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사람이었다.

주변 귀족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이 광경을 지켜봤다. 나 또한 귀족들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주춤거리다 답을 하자 다행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주변 시선을 개의치 않고 하드엘은 평소처럼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귀족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끔뻑거렸다. 경악과 놀라움, 그들에게서 그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보였다.

하기야 놀랄 만도 했다. 황후를 싫어하는 황제, 이게 그들이 아는 하드엘일 테니까.

이런 귀족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칸제로스 공작만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공작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듯 공작을 제외하고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자 하드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자주 짓는 표정이었다.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단조로워 더욱 냉랭하게 느껴졌다.

“뭐 하는가? 다들 앉지 않고?”

회의는 꽤 길어졌다.

무역에 대한 서랠 왕국의 첫 문호 개방.

귀족들은 머리를 맞대어 그것이 아벨리움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지 가늠하고 그들과의 무역에서 또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를 예측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서랠 왕국의 실생활이나 음식, 예절과 문화의 차이 등 손님맞이 준비에 필요한 몇몇 정보를 적어 나갔다.

“칸제로스 공작, 그대의 의견은 어떠한가?”

“저는 이번 무역이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위험하다?”

“예, 폐하. 서랠 왕국의 첫 문호 개방이면 장점도 많겠지만 그만큼의 단점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서랠 왕국과 아벨리움은 거리가 먼 만큼 문화적인 차이도 크니까요. 굳이 아벨리움이 선발대로 나서 모든 위험부담을 안을 필요는 없다 생각되옵니다.”

방금 전까지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던 이들이 공작의 한 마디에 자신들의 기존 견해를 수정했다.

“황후 폐하의 의견은 어떠하십니까?”

대부분이 공작의 말에 수긍하며 동의를 표하고 있던 그때, 갑작스럽게 공작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에 모든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이지 의견을 내기 위해 참석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을 못 할 건 없었다.

서랠 왕국에 대한 지식은 이미 책으로 습득했고, 난 이미 그 무역이 성공적으로 성사될 것을 알고 있었다.

“난 서랠 왕국의 첫 무역 문호 개방국이 우리 아벨리움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유 또한 함께 말씀해 주시지요.”

공작은 미소 지으며 내게 공손히 부탁했다. 분명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말투 또한 점잖기만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난 그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손님맞이를 위해 도움을 받기 위해 왔다고 아까 분명히 말해 뒀는데 굳이 무역에 대한 의견과 자세한 이유를 묻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귀족들이 똑같이 물었다면 또 골탕을 먹이려 하는구나 생각했겠지만 공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 더욱 의아하게 느껴졌다.

나는 공작을 찬찬히 살피다 다시금 입을 뗐다.

“이번 무역은 재화의 효용과 경제의 가치를 증대시킬 겁니다.”

나는 공작의 염려를 일부 인정하며 문화적 차이가 가져올 이점을 설명했다.

식문화와 의복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서랠 왕국에 우리 아벨리움의 문화가 대거 유입되면 우리 제국이 취할 경제적 이득이 얼마나 많을지에 관해 말문을 열고나니 내 의견을 피력하는 일이 쉬워졌다.

모두 내가 기억하는 대로만 설명하면 되는 일이니.

“굉장히 확신하시나 봅니다?”

그런데 돌연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귀족이 빈정거리며 물었다. 정작 내게 질문을 던진 공작은 조용했다.

“후작, 확신을 하냐니? 그따위 질문을 왜 황후에게 하지?”

낮게 가라앉은 하드엘의 목소리가 들리자 회의장 안의 공기가 싸해졌다.

하드엘은 서늘한 눈으로 방금 내게 말을 건 귀족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그게… 그저 저는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과 긴장감이 회의장을 억누르고 있었다.

“후작, 아무래도 그대는 이제껏 자신이 내놓은 의견 모두를 확신하는 모양이야.”

가시가 박힌 그의 말에 나까지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폐하.”

내가 불러도 하드엘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분노하여 말했다.

“그대가 그리도 확신하는 의견이 단 하나라도 틀린다면 그대는 내게 무엇을 내놓겠는가?”

후작이 두려움에 찬 눈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황후의 앞에서 그리 말할 정도면 자신의 의견이 틀렸을 때 목숨을 내놓는 정도의 각오는 당연히 했겠지? 아, 목숨은 너무 심했나?”

그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비껴갔다.

“그 쓸모없는 혀를 걸도록 할까?”

“폐하!”

내가 하드엘을 부르자 후작은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으로 애처롭게 나를 바라봤다.

마치 내가 후작의 동아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게 비아냥거렸던 자를 돕는 것은 나도 싫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하드엘이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나는 더더욱 그를 말려야 했다.

후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드엘을 위해서.

나는 그의 오른팔 위에 손을 올렸다. 그제야 하드엘은 내 쪽을 바라봤다.

“진정하세요, 폐하.”

“하지만 황후……!”

“후작, 황후인 내게 경망한 언행을 잘도 일삼는군요? 두려운 게 없으신가 봅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더욱 큰 소리로 후작을 다그쳤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그가 기회다 싶었는지 의자에서 내려와 다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일어나세요.”

후작은 내 명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나 때문이 아니라 하드엘 때문이었다.

하는 행동이 참 가소롭기도 했다.

“일어나라는 말 안 들리나요?”

직접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서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후작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고개를 들어 뻔뻔히 나를 마주하는 후작을 향해 최대한 상냥히 미소 지었다.

“다음부터 그 입을 잘못 놀렸다간 폐하가 아니라 내가 그대의 혀를 뽑을 테니 조심하세요.”

* * *

귀족들은 혼이 나간 사람들처럼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황제와 황후가 차례로 회의장을 나가고 바닥에 엎드려 빌던 후작이 몸을 벌벌 떨며 황급히 회의장을 벗어나서야 그들의 정신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수차례 식겁한 탓에 모두가 진이 빠져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 귀족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대화의 물꼬가 터지기라도 한 건지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황후 폐하의 편을 드신 건가요?”

“편을 들다 뿐인가? 진정하라는 황후 폐하의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신 것을 보지 않았는가!”

왼쪽 끝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 하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그게 중한 것이 아닙니다.”

“?”

“저분이 정녕 제가 알던 황후 폐하가 맞습니까?”

그리도 아름다운 얼굴로 웃으며 후작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다시 생각하니 더욱 소름이 끼쳤다.

“재판 때부터 난 이상하다 여기긴 했네. 황후 폐하께서 변호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게다가 오늘 무역 건에 관해서도 꽤 타당한 의견을 내놓으셨죠.”

황후가 달라졌다.

또한 황제도 달라졌다.

자리에 앉은 귀족들 모두가 그 사실을 목격했고 인정했다.

이에 그들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눈알을 굴려 그동안 황후의 앞에서 보였던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 보기 바빴다.

황후를 무시하거나 얕본 일이라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녀는 자신을 지지해 주는 가문도 없을뿐더러 황제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허울뿐인 황후였다.

굳이 그런 몰락 귀족 출신의 황후 앞에서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고 그들은 생각했었다.

“큰일입니다.”

“그러게요. 정말 여러모로.”

-쾅!

누군가 탁자를 내려쳤다. 그 둔탁한 소리에 심각하게 오가던 대화가 중단되었다.

칸제로스 공작은 힘줄이 내돋칠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있었다.

“공작님.”

이를 발견한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공작을 불렀다.

그러자 그의 반듯한 이마가 구겨졌다. 정갈하게만 보이던 뚜렷한 눈매도 인상을 쓰니 달리 보였다.

한참을 정적 속에 머물러 있던 공작이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귀족들은 저들끼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화나신 것 같죠?”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화가 나셨겠지. 공작님께서는 황실에 대한 모욕을 참지 않는 분이 아니신가. 우리가 실수를 했어.”

“말을 가려서 해야 했는데. 혹시 공작님께서 많이 불쾌하셨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뭘 어쨌다고, 황실 모욕이 아니라 황후 폐하께서 저리 바뀐 게 이상하니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지 않습니까. 휴, 하여튼 사람이 너무 올곧기만 한 것도 문제야. 안 그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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