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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51)화 (5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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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

말간 햇빛이 부서져 내리는 봄날의 아침이었다. 난 평소처럼 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차를 들었다.

하지만 여유로움도 잠시, 시녀들과 짧은 담소를 나눈 후에는 의자에 앉아 줄곧 쌓인 서류들을 살펴야 했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내게 중요한 소식을 알린 건 세 번째로 집어 든 문서의 페이지를 이제 막 넘기려 했을 때였다.

“그러니까, 얼마 후에 회의가 열린다고요?”

“네. 일정대로라면 어제 열렸어야 했는데 미뤄졌다 합니다.”

“미뤄졌다고요? 왜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드엘은 회의를 미뤄 두고 어제 나를 찾아왔던 건가. 설마.

난 머릿속에 잠깐 스친 생각을 빠르게 부정했다.

아무리 달라졌다 한들 하드엘이 그럴 리가. 나 하나 걱정이 되어 중요한 회의까지 미룬다는 건 아무래도 그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들고 있던 펜을 굴리며 계속해 질문했다.

“서랠 왕국의 무역 사절 건에 관해 의논하는 자리라고 했죠?”

“예, 맞습니다.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 아무래도 서랠 왕국이 처음 무역을 제안한 것이니만큼 위험부담이 있으니 귀족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실 생각이신 것 같아요.”

“부인, 그러면 내가 그 회의에 참석해도 되는지 알아봐 줄래요? 서랠 왕국의 실정을 잘 아는 귀족들을 부른다 하였으니 그 나라의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손에 들린 문서에서 시선을 돌려 책상에 쌓인 마법서를 한 번 쳐다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간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벨리타가 누구와 얽혀 있는지, 플로리아가 죽어 가는 동안 하드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죄다 질문만 있고 답이 없다.

“황후 폐하! 서랠 왕국을 다룬 책을 모조리 가져왔어요!”

내 명을 받고 나갔던 루안이 끙끙거리며 돌아왔다. 그녀는 쾅 소리가 나게 책을 내려놨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서랠 왕국의 식문화를 다룬 책이고요. 나머지는 서랠 왕국의 역사와…….”

책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루안이 쉴 새 없이 설명했다. 난 그 어마어마한 책의 양을 가늠하며 애써 웃음 지었다.

자료가 이렇게나 방대할 줄이야.

그나저나 서랠 왕국이라. 하드엘의 입을 통해 처음 들었을 때부터 묘하게 익숙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나라 중에 서랠 왕국이라면…….

‘역시 그곳뿐인데.’

“루안, 왜 갑자기 서랠 왕국이 우리 제국에 무역 사절을 보낸다는 건지 알고 있나요?”

“글쎄요? 저는 들은 게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부인께서도 모르시나요?”

“네, 저도 따로 들은 게 없습니다.”

서랠 왕국. 워낙에 짧게 지나가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분명 책에서 본 그곳이 맞았다.

우리에게 무역을 트자고 제안했다니. 원래 그곳은 아벨리움이 아닌 다른 왕국과 먼저 무역을 튼 걸로 알고 있는데.

서랠 왕국은 다른 외교 활동은 비교적 활발하나 무역에 관해서 만큼은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런 서랠 왕국이 갑자기 교류를 결심한 건 플로리아에 관한 허무맹랑한 소문이 극에 달했을 즈음이었다.

아벨리움과 트리움 왕국을 첫 교류의 대상 후보로 두었다는 소식에 제국은 떠들썩해졌다.

하지만 그 들뜬 분위기는 얼마 안 가 침울하게 뒤바뀌었다.

트리움 왕국의 왕비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서 서랠 왕국에게 교류의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하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아벨리움이 국익을 따지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플로리아가 황후로서 무언가를 해 보기도 전에 이미 서랠은 첫 무역지로 트리움을 택했다.

서랠 왕국과의 무역은 결론적으로 트리움 왕국의 경제에 상당한 부흥을 가져다주었다.

이 소식을 모두 들은 제국민들은 트리움 왕국의 왕비처럼 적극적이지 못했던 플로리아를 비난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었던 서랠이 우리 제국을 첫 무역지로 택했다니, 이야기의 전개가 바뀌기라도 한 건가?

“그런데 폐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것이 있는데…….”

나는 고개를 들어 루안을 보았다.

“뭔데요? 말해 봐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더니 몸을 배배 꼬며 질문했다.

“최근에 폐하와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나는 즉각 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도 루안이 기대하는 그런 일은 없었던 게 확실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어제 폐하께서 막, 막!”

루안이 격양된 말투에 현란한 손짓까지 더해 가며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루안.”

예를 갖추지 못한 루안의 적절치 못한 언사에 백작 부인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그에 루안은 풀이 죽은 얼굴을 하더니 입을 벙긋거리며 소리 내지 않고 내게 말을 건넸다.

“나중에 꼭 알려 주셔야 해요.”

* * *

“하, 미치겠다.”

아델은 읽고 있던 고서로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하지만 황제를 바라보던 어제 황후의 얼굴은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가 그 남자의 표정을, 몸짓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고 있었다.

아델의 시선은 항상 플로리아를 향해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황제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어떠한지를. 어쩌면 플로리아 본인보다도 더 잘 알지 몰랐다.

그녀는 대체로 모두에게 친절했다. 하지만 황제의 앞에서만큼은 아니었다. 항상 날이 섰고 예민했다. 얼마 전까진 이것이 황제를 향한 미움이라 착각했다.

그리고 참으로 비열하게 자신은 그런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감히 그녀를 욕심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옆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 줄 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황제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이제 누가 보아도 티가 났다. 그렇게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데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황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

하지만 그 마음이 변덕이 아니라 진심이라 해도 황제의 잘못은 사라지지 않는다.

황후를 외롭게 둔 것은 사실이니까.

누군가가 황후를 함부로 깎아내리고 비난했을 때 방관한 것도 사실이니까.

황후 폐하께서 이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 하여도 나는…….

아델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쉽사리 마음이 정리 되지가 않았다. 오히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여러 감정들이 엉키고 또 엉켰다.

자신을 향해 웃던 그녀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해질 무렵 그는 씁쓸하게 입가에 웃음을 띠며 눈을 떴다.

그리고 얼굴 위에 올려 두었던 고서를 제 손으로 치웠다.

황후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

평생토록 황후의 곁에 머무르는 것.

그렇게 마음을 들키지 않고 오래도록 지켜 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었고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다.

아델은 싱그러운 연녹색 나무들이 가득한 창가 너머를 내다보며 누구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분을 위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 * *

귀족들의 마차가 수차례 황궁의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모두 오늘 열릴 회의에 참석하는 이들이었다.

서랠 왕국에서 올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큰 틀의 준비는 나도 이미 마친 상태였다.

아마 오늘 회의에 참석하면 세부적인 계획을 짜는 데 도움이 되겠지. 책에는 나오지 않는 실상 같은 것들도 있으니까.

“황후 폐하, 어떠세요?”

한 시녀가 다가와 내게 오늘 입을 의상을 보여 주었다.

드레스부터 장신구까지 한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회의 장소에는 맞지 않는 차림이었다.

“팔찌는 빼주세요. 의상은 편안하되 단정한 것으로 다시 준비해 주시고요.”

“예, 황후 폐하.”

성대한 무도회도 아니고 회의에 참석하는데 이런 치렁치렁한 장신구들은 걸리적거릴 뿐이다.

시녀는 원래 골라 왔던 드레스를 대신하여 다른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방을 나섰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내게 다가온 건 그때였다.

“폐하, 이제 곧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인은 언제나처럼 정중히 말을 건넸다. 나는 시녀가 나간 문을 흘긋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그래요? 알았어요. 조금 서둘러야겠네요.”

그러고 보니 오늘 회의에는 칸제로스 공작도 참석한다 했던가? 레이샤는 몇 번 봤지만 공작을 보는 건 처음이다.

“기대되네.”

내가 공작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사이 단장은 마무리가 되었다. 다행히 제시간에 맞추어 끝이 난 상태였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황후궁을 나섰다. 회의가 열릴 장소는 황후궁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별궁이었다.

회의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날 뒤따르던 시녀들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귀족들이 반가움에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 모양인지 문 바깥으로 약간의 소음이 새어 나왔다.

-덜커덕

기사들에 의해 묵직한 문이 열렸다. 신기하게도 방금까지 들려오던 모든 소음은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남은 건 정막뿐이었다.

넓은 직사각형 테이블에 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던 귀족들은 다급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황제 폐하를 뵈옵…….”

그리고 하드엘이 아닌 나를 발견하자 반쯤 고개를 숙이다 말았다.

“황후 폐하?”

그들은 놀란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내겐 인사를 할 생각조차 없는 듯했다.

“왜 그래요? 못 볼 거라도 본 사람들처럼?”

“못 볼 거라니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이곳은 서랠 왕국의 무역 사절 건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회의장인지라…….”

한 귀족의 말 안에는 은근한 무시가 담겨 있었다. 네가 올 곳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지 입가엔 조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그래서?”

“네?”

“나도 안다고요. 설마 내가 길을 잘못 찾기라도 했을까?”

나는 그들의 따끔거리는 눈총을 받으며 회의장의 문과 가장 먼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하드엘의 자리와 내 자리가 나란히 마련되어 있었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자리에 앉자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귀족 한 명이 일어나 유일하게 내게 허리를 숙였다.

굉장히 잘생긴 중년의 미남자였다.

“화,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가 먼저 허리를 숙이자 다른 귀족들이 어정쩡하게 그를 따라 내게 인사를 건넸다.

받는 나도 떨떠름한 인사였다.

곁에 있던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몸을 낮춰 내게 귓속말을 하였다.

“저분이 칸제로스 공작님이십니다.”

어쩐지. 외모 하며 풍겨오는 분위기 하며 레이샤와 굉장히 비슷하단 생각을 했는데.

공작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 나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다들 앉으세요.”

“그런데 정말 송구하지만 황후 폐하께선 이곳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갈색 머리칼을 지닌 귀족 하나가 미간을 좁히며 내게 물었다.

궁금해서 묻는 것은 아닐 테지. 좋은 의도의 질문이 아닐 게 뻔했다.

“내가 직접 황제 폐하께 부탁드렸습니다. 그대들에게 도움 좀 받으려고요. 서랠 왕국에 대해 잘 안다면서요?”

“아… 네.”

“하긴 이해에 어려움이 많으실 테니.”

곳곳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공작을 제외하고는 다들 작게 소리까지 내어 가며 웃고 있었다.

플로리아보다 나이도 한참 많아 보이는데 이렇게 어린 황후에게 모욕을 주는 게 그리도 즐거울까.

그들의 같잖은 꼴이 오히려 우스웠다.

나는 팔걸이에 한쪽 팔을 얹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린 채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내가 한참이나 그러고 가만히 있자 이내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몇몇 귀족들은 당황한 얼굴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완전한 적막이 찾아왔을 때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뗐다.

“웃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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