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
하드엘은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탁탁 쳤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는 벌떡 일어서더니 불안한 듯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집무실 창가 근처를 오갔다.
급격히 새하얗게 질려가던 플로리아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디가 아픈가?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인상을 구기며 자신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줄곧 창 너머에 고정되어 있었다. 에스트라의 화원 뒤쪽으로 황후궁이 작게 보였다.
죽어간다면 어찌할 거냐니…….
되뇌기조차 싫은 말이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한 걸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플로리아, 애초에 내가 당신을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
설령 그녀의 말대로 이 마음을 계속 외면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던지 살려 냈을 것이다, 분명.
에스타란토가 당신이라는 것을 부황에게 들었을 때부터 어쩌면 나는 예감하고 있던 일인지도 모른다.
내가 그대를, 내 위에 설 에스타란토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은, 그래. 부정해도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인지도.
그저 당신이니까.
에스트라의 화원에서 마주친 것이, 연분홍 입술로 날 꽤 괜찮은 사람이라 말해준 것이 바로 플로리아 당신이니까.
그리고 그런 당신이 에스타란토이니까.
그것이 당신을 놓지 못한 이유였다. 끈질긴 마음을 버리지 못한 이유였고.
“폐하.”
“들어와라.”
하드엘은 넬슨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들였다.
“황후는? 황후는 어떻다더냐?”
“그게…….”
넬슨은 흘끗 하드엘의 상태를 확인했다.
잠을 못 잔 것은 당연하거니와 지금 황제의 눈빛은 시퍼렇게 날이 선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갑자기 찾아와 황후궁에 의원을 보내라 명한 새벽부터 내내 저 상태였다.
‘여기서 어떻게 또 의원을 돌려보냈단 말을 전하란 말인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머뭇거리는 넬슨의 태도에 하드엘이 먼저 그가 내놓을 답을 눈치챘다.
“이번에도 돌려보낸 것이냐?”
“예.”
“다시 의원을 보내라.”
“다시요?”
넬슨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백작은 이쯤 되면 폐하께서도 참 끈질기다는,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할 말을 애써 삼켰다.
“아니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
“네? 직접 가 보신다니요?”
그는 대답 없이 검은색 조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걸치는 동시에 빠르게 걸었다.
그의 걸음 폭이 오늘따라 유달리 넓었다. 당황한 넬슨 백작은 무작정 뛰어가 하드엘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폐하, 잠시만요!”
“뭐지?”
“곧 있으면 중요한 회의가……!”
이번 회의는 서랠 왕국과의 무역 건에 관해 서랠 왕국을 잘 아는 귀족들을 따로 불러 모아 의견을 듣기 위한 자리였다. 미룰 수가 없었…….
“미뤄라.”
하드엘은 인상을 구기며 넬슨을 바라보았다. 고작 그런 걸로 길을 막고 선 것이냐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섬뜩한 회색 눈을 마주한 백작은 곧바로 생각을 바꾸었다.
‘미루어도 크게 상관없지 않을까.’
처음부터 자신이 내놓을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예, 폐하. 명을 따르겠습니다.”
* * *
“황후 폐하.”
루안은 멍한 상태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나를 불렀다. 아무 답이 없자 그녀는 내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왔다.
“폐하께서 또 의원을 보내셨습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잠도 못 주무시고…….”
나는 새벽 내내 그랬듯 똑같은 답을 뱉었다.
“아니에요. 의원은 돌려보내 줘요.”
도대체 몇 번을 거절해야 하드엘이 의원을 보내는 걸 그만둘까.
“황후 폐하, 낯빛이 안 좋으십니다. 폐하께서 보내신 의원을 만나보심이 어떠신지요.”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이런 내가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고마웠지만 의원을 만나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숨겨져 있는 이야기……. 이 세계에 내가 모르는 사실이 존재한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도 전부 내 것이 아니었다. 난 하드엘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으니까.
‘도대체 왜 하필 내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걸까.’
어긋난 운명이라 했었지.
난 아벨리움에서 눈을 뜨기 직전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남자의 것도 여자의 것도 아닌 그 오묘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되뇌어졌다.
[플로리아 리엘 브넬페, 당신은 위대한 에스타란토의 힘을 물려받은 고귀한 자. 이 세계는 어긋난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타인의 육체를 빌려 잠시 머무른 곳일 뿐입니다. 이제 원래의 세계로 돌아 가셔야 합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누군가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고 그럴 기력도 없었다.
‘어긋난 운명을 되돌릴 거면 플로리아를 살려야지 왜 엉뚱한 나를!’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다.
처음부터 내가 이 거지 같은 세계에 들어오지만 않았어도 하드엘을 마음에 품게 될 일도, 그 때문에 매일을 고민으로 지새우는 날들도 없었을 텐데.
하드엘이 플로리아의 죽음을 방치한 데 무언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죄책감을 덜고 싶어졌다. 내가 그를 용서하고 싶어졌다.
정말로 이기적인 건 하드엘이 아니라 나였다.
“정말 괜찮으신 거죠?”
“미안해요. 내가 매번 걱정만 끼쳐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괜히 시녀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직접 황후의 상태를 확인해야겠다.”
“?”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하드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보다 잠긴 듯한 그의 목소리가 낮게 번졌다.
“폐하께서 오셨나요?”
“네, 그런 듯싶습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황제의 방문에 놀라고 있었다. 이제 막 아침이 밝은 상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문을 여세요.”
나는 머뭇거리는 시녀들을 대신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나갔다.
“황후.”
“무슨 일이십니까?”
밤새 한숨도 못 잔 것은 나만이 아닌지 눈앞의 하드엘은 나보다도 창백했다.
붉던 그의 입술이 파삭하게 말라 있었다.
“괜찮은 것이오?”
차라리 오지 말지.
“네. 그러니 의원은 보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제 일 때문이라면 이렇게 직접 오실 필요도 없으셨는데.”
흔치 않은 광경에 시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이런 나와 하드엘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그녀들이 원하는 그런 말랑하고 달콤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제는 왜 갑자기…….”
“그저 피곤이 몰려와 그랬습니다.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걱정했소. 많이.”
하드엘이 한 발짝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가 다가온 만큼, 딱 그 한 발짝만큼 뒤로 물러났다.
이를 본 하드엘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내게서 거리를 유지한 채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눈물 한 방울 맺히지 않은 눈이 어쩐지 슬퍼 보였다. 이것 역시 플로리아를 향한 것이겠지.
“황후 폐하.”
대뜸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들의 목소리도 하드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저 목소리… 설마.
“아델 경?”
나보다도 먼저 하드엘의 고개가 돌아 갔다.
내 시선에선 하드엘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아델의 표정을 보니 알겠다. 대충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또한 아무에게나 웃어 주지 않는다는 아델의 말이 진짜라는 것을 난 이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아델 경,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오늘은 황후궁 근무가 아니었다. 아델이 황후궁을 찾을 이유가 없어 의아해 물으니 나를 보고 아델은 화사하게 웃기만 했다.
하드엘을 마주했을 때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사람이 저렇게 확 바뀔 수도 있구나.
“황후 폐하, 신전 기사단이 모두 임명되었습니다.”
드디어 입을 연 아델이 내게 다가오려 할 때였다.
그는 자신을 막아서는 황제에 의해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서야 했다.
“오십 걸음 떨어져 호위하라. 그 명을 잊은 것이냐?”
“폐하, 제가 허락했습니다.”
하드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허락했다고?”
“네. 오십 걸음 떨어져서 호위하라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왜 아델 경에게 그런 명을 내리셨습니까?”
하드엘은 일부로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은 나의 붉은 머리카락에 머물러 있었다.
“싫으니까. 저자가 당신 곁에 붙어 있는 게.”
표정은 차갑기만 한데 귓가는 엷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마 그 누구도 이런 하드엘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문득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진짜 플로리아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든 더 행복한 일이었겠지. 내겐 쓸모없는 상념이 뒤따랐다.
“단순히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호위를 하는 겁니다.”
하드엘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사실 할 말이 없을 만도 했다.
오십 걸음 떨어져 호위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테니.
“그 정도면 가깝지 않은가?”
그가 뒤늦게 중얼거렸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보건대 진심인 것 같았다.
웃음이 나올 뻔하였다. 물론 어이가 없어서 나올 뻔한 웃음이었지만.
“아델 경, 아까 뭐라 했죠?”
나는 하드엘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아델을 향해 물었다.
누가 들어도 터무니없는 말이니 대꾸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었다.
“…….”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아델은 입을 열지 않았다.
분명 나를 응시하고 있기는 한데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싶었다.
“아델 경?”
내가 재차 부르자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까 뭐라고 했죠?”
“신전 기사단이 모두…….”
“신전 기사단이 모두 임명되었다고 하던데? 그런데 어쩌지. 그 소식이라면 내가 이미 황후에게 전했는데.”
어느새 옆에 선 하드엘이 아델 몫의 답을 가로챘다.
그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까딱이며 특유의 거만한 눈빛으로 아델을 보고 있었다.
“그럼 공식화는 언제…….”
“서랠 왕국의 사절이 떠나는 즉시.”
아델을 향한 질문이었지만 역시나 돌아온 건 하드엘의 답이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제게 물으신 것입니다.”
아델은 미소를 띠었다.
평상시의 여유로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굉장히 불친절한 미소였다.
“그게 중요한가?”
아까도 피곤했지만 이젠 더 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왜 자꾸 둘이 만나면 분위기가 날카로워지는지. 하드엘은 그렇다 쳐도 아델까지 저렇게 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잠깐. 사절이라니?’
사절이 온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없는데?
“폐하,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하드엘은 아델과 등을 지고 섰다.
아델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며 아델을 향한 내 시선을 차단시키는 이 구도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였다.
“서랠 왕국의 사절이 다녀간 후에 신전 기사단을 공식화하겠다 하였소.”
그는 내 질문이 반가운 모양이었지만 난 그의 답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사절이라니요? 저는 처음 듣습니다.”
하드엘이 뭔가 착각을 한 것이어야 했다. 사절이라면 손님맞이가 필요할 테고, 그 준비의 절반은 내 일일 게 분명했다.
재판 일을 끝내고 이제야 겨우 숨을 돌리던 참이었다. 가뜩이나 생각할 일도 차고 넘친다.
심지어 서재 책상 위에는 읽어야 할 마법서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의 착각으로 나온 말이 아니라면 내가 잘못 들은 것이어야만 했다.
“황후에겐 따로 공식 문서를 보낼 예정이었소. 왜 그러시오? 표정이 좋지 않은데. 당장 다시 의원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