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아델은 신전 기사들의 인사를 받지 못했다.
대신 장로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젖히고선 눈을 감았다.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새어나왔다. 쇳내가 나는 그 숨결에는 깊은 안도감이 함께 서려 있었다.
마력을 다루는 훈련 중 신전 마법사 한 명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리고 황후 폐하와 관련된 일로 장로가 급히 자신을 부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황후 폐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걸까 달려오는 와중에도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에스타란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죽을 수도 있다는 그 말이 현실이 될까 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장담했던 아델이지만 사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플로리아의 말이 아주 가능성이 없진 않다는 것을.
요즘 밤낮없이 고서와 마법서에 얼굴을 파묻고 사는 이유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왜 그러느냐? 황후 폐하의 일이라면 뭐든 좋아할 줄 알았더니.”
아델은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바로 했다.
“신전 기사단에 관한 것이라고 진작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지. 매일같이 밤을 새우더니 어째 성격이 더 나빠졌어.”
장로는 혀를 끌끌 차더니 뒤를 돌아 새로 선발된 신전 기사들을 향해 너희는 절대 저렇게 되면 안 된다고 서너 번 당부했다.
“혹시나 나쁜 일이라도 생긴 걸까 얼마나 걱정하며 달려온 줄 아십니까?”
“무슨 소리냐?”
“황후 폐하와 관련된 일이라고만 말을 전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넌 왜 그것이 나쁜 일이라고만 생각한 것이냐? 요즘 마력을 다루는 방법이란 방법은 죄다 알려 달라 하질 않나. 혹시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야?”
장로의 낯빛이 바뀌었다. 그는 하얗게 센 눈썹을 찡그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게지?”
“그렇다니까요. 참 걱정도 많으셔.”
아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기에. 그리고 아무 일도 없어야 하기에.
아델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신전 기사단으로 선발된 마법사들은 뻘쭘하게 서서 그런 장로와 아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그중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 마법사 한 명이 간신히 입을 열었고 아델은 뒤늦게 그들을 쳐다봤다.
“아, 미안.”
그 짤막한 한마디를 끝으로 아델은 나란히 선 신전 기사들을 향해 늦어도 너무 늦은 인사를 건넸다.
“신전 기사들끼리는 서로 존대를…….”
“장로님, 그럼 신전 기사단이 바로 공식화되는 겁니까?”
서둘러 공식화된다면 맘 편히 황후 폐하를 호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신전 근무일 때에도 다른 마법사들이 황후 폐하를 보필할 수 있을 테니 더욱 안심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그것보다 서로 존대를…….”
“신전 기사단이 모두 모일 때 공식화할 거라 하지 않으셨나요? 얘기가 다르잖아요.”
장로는 허탈하게 웃었다. 일부로 듣고도 저러는 게 틀림없다.
하여튼 예의라곤 없는 놈. 그는 익숙한 듯 아델에게 충고하기를 관두고 원하는 답을 내어 주었다.
“서랠 왕국이 사절을 보낸다더구나.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 두 분 모두 그 일로 바빠지실 테니 신전 기사단이 공식화되는 건 그 이후가 될 거야. 이제 되었느냐?”
* * *
달빛이 흘러드는 늦은 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달이 창가 주변을 희부옇게 밝혔다.
백작 부인과 다른 시녀들 모두가 자리를 비우고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시녀는 루안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마저도 피곤에 지쳐 졸고 있었다.
나는 펼쳐 놓은 마법서에서 시선을 떼며 그녀를 보고 자그맣게 말했다.
“루안, 편히 자요.”
내 말과 동시에 의자 팔걸이에 걸쳐 있던 그녀의 오른쪽 팔이 툭하고 떨어졌다.
이미 잠든 모양이네.
나는 소리 죽여 웃으며 마법서로 시선을 돌렸다.
「제 2장. 흑마법의 대가」
방금 전까지도 흑마법의 주술을 주제로 한 내용을 읽었는데 책장을 넘기니 또 흑마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마법서는 유독 흑마법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적마법인 에스타란토를 알아 가는 데 있어서 흑마법도 중요할까?
“하암.”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다 보니 절로 하품이 나왔다.
책을 덮고 이만 잠을 청할까 하다가 나는 우연히 달빛이 비쳐드는 창가를 바라봤다.
“마력을 바람처럼…….”
다시 생각해 보니 이대로 잠들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아델이 알려 준 것만 복습하고 자자.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자 차고 맑은 밤공기가 가슴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난 아델의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기분이 상쾌해지기는 했지만 역시 그뿐이었다.
“다시 해봐야지.”
이번에는 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황후?”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바람은 부드러웠고 들려오는 목소리도 부드러…….
응? 목소리?
잘못 들은 건가?
“황후.”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눈을 뜨자 하드엘이 보였다.
그의 차림은 평소와는 달랐다. 정복을 대신해 입은 셔츠는 그 앞 단추가 세 개쯤 풀려 있었고 늘 말끔히 넘기던 백금발 머리칼도 눈썹을 덮고 있었다.
“폐하? 왜 여기 계세요?”
하지만 나는 그 어떠한 것보다도 하드엘이 여기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황제궁과 황후궁은 가깝다 해도 꽤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우연이라도 그가 여길 지나갈 이유가 없었다.
나와 마주한 그 또한 어울리지 않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달빛이 밝아 산책 중이었소.”
표정과 달리 말투에서는 그 당황스러움이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유독 이곳의 달빛이 밝은 탓에.”
하드엘의 말에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독 달빛이 밝은 곳이 따로 있나요? 전 잘 모르겠는데.”
“글쎄.”
싱거운 답에 시선을 내리자 조용히 미소 짓는 하드엘이 보였다. 그의 고요한 회색빛 눈에 내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 보며 난 깨달았다.
하드엘 당신의 웃는 모습이 어느새 내겐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을.
“황후.”
나를 부르는 저 다정한 목소리까지도.
“신전 기사들이 모두 임명되었소.”
“모두 임명되었다고요?”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나오자 오늘 낮 신전으로 급히 불려갔던 아델이 떠올랐다.
“장로는 그대에게 정식으로 신전 기사단을 인사시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지. 아직 알려 주지 않은 걸 보면 말이야.”
하드엘은 아무렇지 않게, 아니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내게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질적이었다.
플로리아는 항상 이 창가에 기대 하드엘 당신을 찾았는데.
습관처럼.
그것도 죽어 가는 내내.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나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이렇게나 쉽게 바뀔 사람인데. 아니, 처음부터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을 사람인 것 같은데. 왜 플로리아를 죽게 버려뒀을까.
‘플로리아를 향한 감정이 아무리 증오라 했어도.’
문득 저번의 그날이 떠올랐다.
하드엘이 나를 위해 제국의 가장 높은 자리를 포기하겠다 말했던 그날이.
“폐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하시오.”
조금씩 불어오던 바람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어두운 밤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세상에 하드엘과 나 둘뿐인 듯하였다.
“일전에 저를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에스타란토라는 걸 알고도 죽이지 못하겠다 하셨죠.”
“그랬지…….”
낮게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에는 죄책감이 묻어났다.
“근데 왜 갑자기 저를 마음에 품었다 말씀하셨습니까? 제가 폐하의 목숨을 구해드려서?”
저 말을 듣는 당시에는 가슴이 떨렸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졌었다.
플로리아가 그토록 원하던 고백을 내가 듣고 있어서, 그리고 그가 플로리아를 죽게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해 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방치할 정도의 증오가 한순간에 사랑으로 바뀔 수 있을까?
오늘 같은 우연이 아니라면, 또 오늘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면 더 이상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라 하였소?”
그가 내 말을 되짚었다.
“갑자기가 아니오.”
그리고 들려온 말은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갑자기가 아니라니? 그럴 리가 없다.
“황후이기 이전에 당신이 플로리아로 내 앞에 섰을 때, 그 봄날부터 난 당신을…….”
“잠시만요.”
플로리아가 황후이기 이전부터라면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부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하드엘이 플로리아를 오래전부터 좋아했다고? 아니야. 분명 소설 속에서는…….
하드엘은 플로리아의 신성을 증오했고, 또 그녀가 자신의 위에 설까 불안해했지만 정작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의 자리에 올라도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결말을 알고 보면 굉장히 어색한 전개였다. 심지어 그는 소설의 마지막에 다다라서도 플로리아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녀를 경계하기만 했다.
정말 하드엘이 플로리아를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거라면 에스타란토라는 정체를 알고서도 죽이지 않은 게 이해가 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플로리아의 죽음을 방치한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부 이상해.’
플로리아에 대한 하드엘의 감정은 분명 미움과 증오뿐이었는데.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건가? 그러면 플로리아는…….
나는 하드엘의 눈에 비친 플로리아의 모습을 응시했다.
처음부터 그는 내가 아닌 플로리아였던 것이다.
그의 눈에 담긴 사람도, 그가 마음에 품은 사람도 어찌되었든 단 한 사람, 플로리아 그녀였다.
플로리아가 그를 피해 다니지만 않았어도, 그저 단순한 계기만 있었어도 둘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도대체…….’
속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지금 내 감정을 나조차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들어야 할 답이 남아 있기에 난 간신히 입을 뗐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저에 대한 마음을 계속 외면하셨다면…….”
“?”
“그런 상황에서 제가 죽어간다면, 폐하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는 왜 이런 질문을 하냐고 묻지 않았다.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대신 잠시의 고민도 없이 나를 똑바로 마주하며 답했다.
“살릴 것이오. 어떻게 해서든.”
망치질을 하듯 머리가 울렸다. 귓가엔 웅웅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하께서는 무엇을 위해 이리 노력하십니까?’
‘좀 더 괜찮은 황제가 되기 위해서.’
‘음, 그러면 전하께서는 노력하지 않으셔도 되겠네요.’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왜지?’
‘태자 전하께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