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
그럼 수프는 그대가 직접 황실 주방에 부탁하는 걸로 하고, 다른 먹고 싶은 것은 없소?
허무할 정도로 단순한 말이 적혀 있었다. 읽을지 말지 그간 고민한 거에 비하면 너무나 별 거 아닌 문장이었다.
내용이 궁금한지 내 입이 열리길 기다리며 루안은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루안, 그대가 기대하는 글은 없어요.”
내 말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루안이 웅얼거렸다.
“그럼 역시 폐하와 제국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시기 위해…….”
“그런 내용도 아닌데요?”
“그럼…….”
“먹고 싶은 게 뭐냐고 폐하께서 물으시네요.”
“먹고 싶은 거요? 그 다음은요? 다음 문장도 있죠?”
“그게 전부예요.”
“정말요? 그게 전부라고요?”
푸흡.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내용을 되짚어 보며 쪽지를 다시 살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준 거야.’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렇게 서늘한 얼굴을 하고 이런 걸 적고 있을 걸 생각하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황후 폐하…….”
그때 어디선가 시들시들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들시들하다는 것만 빼면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폐하, 저어기 아델 경께서 오셨어요!”
아델이 왔다고?
루안의 말을 듣고 주변을 살피는데 아무도 없었다.
“어디요?”
“저어어기요.”
저어어기?
“폐하, 저 여기 있습니다.”
아델은 한참 떨어져서, 그러니까 거의 출입문에 붙어 있다시피 서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저렇게나 시무룩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아델 경, 거기서 뭐해요?”
“저도 정말 여기서 이러고 싶지 않은데.”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가까이로 와요. 왜 거기 서 있어요?”
“분명, 폐하께서 가까이 오라 명하신 겁니다!”
“?”
그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망설임 없이 가볍게 걸음을 뗐다. 그리고 단숨에 내 옆에 와 툴툴거렸다.
“장로님은 왜 그런 이상한 명을 받아들이셔서는!”
“이상한 명이요?”
“오십 걸음 떨어져서 황후 폐하를 보필하란 명을 내리셨거든요. 어떤 속 좁고, 잘 화내고, 틈만 나면 차갑게 노려보기 바쁜 높으신 분이 말이에요.”
“잠깐. 그 속 좁고, 잘 화내고, 틈만 나면 차갑게 노려보기 바쁜 높으신 분이 설마……?”
“맞습니다. 그분.”
그때 보았던 신전 기사는 그대로 두기로 하였소.
얼마 전 받은 쪽지에는 관대한 아량이라도 베푼 것처럼 글이 적혀 있었는데. 그대로 두기로 한 게 이런 식으로 두기로 한 거였어?
세상 너그러운 척하더니.
“신경 쓰지 마요. 내가 폐하께 잘 말씀드릴 테니.”
“만약 폐하께서 제게 뭐라고 하시면요?”
“뭐라고 하시면?”
나는 그의 질문에 답해줄 말을 골똘히 생각했다.
그런데 아델은 애초에 답을 듣는 게 목적이 아니었는지 웃음을 띤 채 이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웃어요?”
“제가 웃고 있었나요?”
“아주 대놓고 입에 미소를 띠고 있었죠. 내가 웃긴가?”
“웃긴 쪽보다는 아름다우신 쪽이죠.”
하긴. 그건 그래.
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열린 창틈 사이로 흘러드는 산뜻한 바람 속에 그의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스며있었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를 뵐 때마다 웃는 게 저의 습관인가 봅니다.”
“이상한 소리.”
난 가늘게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이상한 소리요?”
“아델 경, 그대는 원래가 잘 웃는 사람이잖아요.”
아델은 내 말을 의식했는지 갑자기 입가에 웃음기를 지웠다. 그리고 보란 듯이 얼굴을 내밀었다.
“사실 전 웃음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닙니다.”
“항상 웃고 있으면서 발뺌은. 그래요 믿어줄게요. 참 오늘은 황후궁 근무, 맞죠?”
나는 그의 억지스러운 행동을 보고 애써 웃음을 참으며 이만 일어나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번 아델에게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가 하드엘이 와서 말이 끊기는 바람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으니 오늘은 그와 남은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아델은 굳이 따라오란 말을 하지 않아도 서재로 향하는 나를 자연스레 쫓아왔다.
굉장히 차분히 종알거리며.
“황후 폐하, 저 정말 헤픈 사람 아닙니다.”
“헤프다고는 한 적이 없는데? 그리고 그대가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건 내가 아주 잘 알죠.”
“모르시는 것 같은데. 막 아무에게나 웃는 그런 사람인 줄 아시는 것 같은데…….”
“그럼 내게만 웃어 주는 이유라도 있나요?”
나는 몸을 돌려 그의 호박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물었다.
장난기를 가득 담은 어조로 던진 질문이었으나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매일 여유롭던 그가 흔치 않게 당황하고 있었다.
“농담 삼아 물은 말이니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나저나 아델 경, 지금 그 표정 꼭 어린아이 같네요.”
말을 함과 동시에 나는 서재 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직접 당겼다.
그리고 그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델은 그제야 나와 눈을 맞추더니 천연히 웃었다.
“제가 더 나이가 많은 건 알고 계시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웃음은 평소 같지가 않았다. 왠지 모를 공허함 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뭐지? 단순히 기분 탓인가?’
“믿기지 않지만 알고는 있었죠. 자, 이제 우리 그때 못다 한 이야기를 이어 해볼까요?”
하지만 순간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델은 곧장 원래의 능청스러움을 되찾았다.
“그때라면… 폐하께서 절 매정하게 쫓아 내셨던 그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매정까진 아니죠. 약속은 약속이니 무르는 건 안 됩니다.”
그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제가 이제 어찌하면 될까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기로 했으니 이제 어떻게 배우면 될까요?”
“사실 아직 폐하께서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워내신 건 아니시기에 마력이 있다는 가정 하에 훈련을 하는, 그 정도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겠네요.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훗날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워내다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해 죽는, 그런 경우를 위한 대비책은 없나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먼저 서재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던 그가 우뚝 멈춰 서며 돌아섰다. 마치 겁을 먹은 사람처럼 날 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혹시나 일어날 일을 대비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일전에 쓰러진 적도 있고.”
“앞으로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무서운 말씀은 하지 마세요.”
“사람 일이라는 건 장담할 수 없잖아요.”
“아니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 테니 장담할 수 있습니다.”
주변을 감싸는 공기가 무거워졌다.
이런 분위기를 원한 건 아니었기에 나는 괜히 과장스러운 행동을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뭐든 영영이라는 건 없잖아요. 만약이라는 것도 있고.”
“정말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 목숨을 나누어서라도 구해드릴 겁니다. 그게 신전기사로서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가 확고히 단언했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이라고는 하나 적어도 그의 마음은 진심인 것 같았다.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을 곁에 둘 수 있었을까. 원래의 플로리아에게는 없던 행운이었다.
“내가 참으로 충직한 기사를 두었네요. 하지만 목숨을 나누는 그런 무시무시한 일은 없어야겠죠.”
나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굳어 있는 아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래서 대비책이 없는 건가요?”
“있습니다.”
그가 운을 뗐다.
“당연히 알려 드릴 생각이었지요. 황후 폐하께서 그런 무서운 말씀만 안 하신다면 말이죠.”
‘앞으로 아델 경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겠어.’
도대체 몇 분 동안 그를 진정시켰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가 말하는 ‘무서운 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정확히 스물세 번 그의 앞에서 반복하고서야 무한한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우선 마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아델은 책상 위에 두툼한 마법서 한 권을 펼쳐놓고 의자에 나를 앉혔다.
내 주변을 맴돌던 아델은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책의 한곳을 직접 가리키기도 했다.
“흑마법과 백마법. 우선 그것이 대표적인 것이지요.”
“나도 이전에 마법서에서 그 정의를 본 적이 있어요. 흑마법은 이기적인 마력이 원천이라 하였고 백마법은 이타적인 마력이 그 원천이라 하였죠.”
“맞습니다. 하지만 마력은 마력을 행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그 목적이 달라지는 것이라, 사실 마력의 원천에서부터 선과 악을 따지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네. 다만 확실한 건 백마법은 이로운 목적으로 마력을 사용하는 자들의 마법을 일컫는 것이고 흑마법은 악의적인 목적으로 마력을 사용하는 자들의 마법을 일컫는 것이라는 겁니다. 에스타란토 신전의 마법사뿐만 아니라 세간에 드러난 마법사는 모두 백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이죠.”
“그러면 흑마법을 사용하는 자들은요? 숨어 있다는 건가요?”
그가 내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통은요. 흑마법은 죽음과 병,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까지 조종하는 악랄한 마법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모습을 숨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단, 원한다면 대가를 받고 마력을 사용해 주는 경우가 있으니 자신이 필요할 때는 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아델의 설명을 듣던 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마법이 사람의 마음까지 조종할 수 있는 줄은 몰랐네요.”
“백마법에서는 철저히 금지된 사항입니다. 그리고 뭐, 아무리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마법사는 드물 겁니다. 누군가의 어둠을 건드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어둠을 건드린다고?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데요?”
“그 어둠이 순식간에 자신을 삼키게 되죠. 자신의 마음을 잃어 버리는 겁니다. 사실 흑마법은 그 실체를 확인하기조차 힘듭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마음을 잃어 버린다니. 정말 무서운 마법이네요. 근데 아까 마법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했잖아요. 흑마법과 백마법. 남은 하나는 뭐죠?”
“적마법. 그것이 남은 하나입니다. 흑마법과 백마법을 뛰어넘는 에스타란토의 신성을 뜻하는 마력이죠.”
말만 들어도 거창했다. 나는 잠시 눈을 내려 앞에 펼쳐진 마법서를 대충 훑어 읽어 내렸다.
책에는 방금 아델이 설명해 준 마법의 종류가 좀 더 상세히 적혀 있었다.
‘결론은 에스타란토가 모든 마법사들의 기둥이라는 거네.’
내가 그런 힘은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부담감이 느껴졌다.
플로리아는 자신의 정체를 깨닫게 된 순간부터 평생을 이런 기분으로 살아왔을까?
“그럼 오늘 마력을 다스리는 기초 훈련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게 그대가 말한 대비책인가요?”
“네. 하지만 말 그대로 대비책입니다.”
“무슨 뜻이죠?”
“에스타란토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보통의 마법사들이 자신의 마력을 주체하지 못할 때 쓰는 방법이니까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정말 만에 하나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신 그런 날이 오면 제가 황후 폐하의 마력을 받아 내서라도 지켜드릴 테니.”
“그 마력을 받아 내면 그대는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요. 더 강해지려나?”
아델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더 물으려고 하자 그는 화제를 돌려버렸다.
의도적으로 말을 피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 앉은 상태로 내 눈앞에서 선 그를 빤히 올려다봤다.
“왜 그러세요?”
“방금 내게 거짓을 말했나요?”
“네?”
“말을 피하는 느낌이 들어서요.”
“아니요. 저는 거짓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아델은 보조개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환히 웃으며 말했다. 잠시 흔들린 호박색 눈동자가 이내 맑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