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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46)화 (4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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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나는 도박판의 상세 기록 문서를 펼쳐 남작의 앞에 내밀었다.

눈을 찌푸려가며 그것을 살핀 남작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이 문서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이곳에 남작이 도박장에서 어떤 일을 어떻게 벌였는지가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아, 아니 대법관님 이것은 증거로 채택되지……!”

“우우!”

재판정은 노골적으로 남작을 야유하는 사람들로 인해 시끄러워졌다.

남작의 변호인은 그를 변론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이미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한 것 같았다.

“이것 역시 이미 증거로 제출한 문서입니다.”

“분명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증거로 인정이 될 수가 없지요!”

“위법이라 해도 수사기관이 아닌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는 개인이 수집한 증거입니다. 대법관이 사안의 중함을 인지, 해당 문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남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이마에서 흐른 식은땀이, 파르르 떨리는 입가가 자세히 보일 때쯤 또각이는 날카로운 굽 소리가 잦아들었다.

난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고 귓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요? 도박장에서 이런 걸 만들어 놓을 거라고 예상치 못했나요?”

“가, 감히 날!”

“고마워요, 남작. 내가 당신 덕분에 제국민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게 됐어.”

남작은 분에 못 이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에 피식 웃어 보이고는 대법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여기 남작의 하인으로부터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자백을 하게 된 칼몬 엘 드리오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쓴 진술서도 있습니다. 이렇듯 이 사건의 증인과 증거가 명백한데도 남작은 반성을 하지 않고 모든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제국민들을 기만한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칼몬 엘 드리오에게 누명까지 씌운 남작의 죄질이 불량하니 엄벌의 필요성이 있다 생각됩니다.”

내 말이 끝나자 대법관이 남작과 그의 변호인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변론하세요.”

“…….”

“인정하는 겁니까?”

“아니야. 내가 아니라고!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지!”

남작의 변호인은 침묵했고 남작은 발악했다.

차라리 죄를 인정하는 것이 자신에게 득일 텐데.

하긴. 순순히 죄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겠지.

“아벨리움 형법 제2-83조, 형법 제1-56조, 형법 제3-47조에 의거하여 협박과 무고죄, 및 사기죄의 혐의로 남작에게 3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순간 재판정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변호를 하기 위해 단상에서 내려올 때처럼 모두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뒤통수라도 맞은 듯 저마다 놀란 표정 혹은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웃고 있는 이는 하드엘 뿐이었다.

가장 먼저 이런 고요를 깬 것은 대법관이었다.

“남작, 더 할 말 없습니까?”

“억울합니다!”

“끝인가요?”

“부디 저에 관한 재판을 다시 열어 주세요.”

“흠흠! 판결합니다. 남작은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무고한 이를 협박하여 누명을 씌웠고 수많은 증거와 증인의 증언에도 죄를 뉘우치지 않고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고 판단, 본 재판정은 사기죄 외의 무고죄와 협박죄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여 베르시트 남작에게 징역 35년을 선고합니다.”

“뭐, 뭐?”

“또한 부당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그의 재산은 제국에 귀속될 것입니다. 이외에 칼몬 엘 드리오에게는 죄가 없다고 판단, 무죄를 선고합니다. 증인을 비롯하여 이 사건에 관련된 이들에 관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재판을 다시 열어 판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이 거지 같은 판결 내가 인정 못 해!”

-둥. 둥. 둥.

또다시 웅장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재판이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오열하던 남작이 강제로 끌려 나가고, 묵직한 철문도 다시 열렸으나 자리를 벗어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지금 그들은 내 이야기를 주고받기 바빴으니까.

“한 가지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들을 수 있게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제국의 황후로서 이 사건에 심각한 문제성을 인지하는 바, 모든 도박장 문제와 관련해 법적 제재의 강화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폐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증거로 제출된 상세 기록 문서를 참고하여 제국에 귀속된 남작의 불법적인 재산을 사용해 피해자들에게 피해액의 일부라도 돌려주고자 합니다.”

하드엘이 일어서 동의의 뜻을 표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참관석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박수 소리는 순식간에 넓은 재판정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성공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온몸에는 전율이 흘렀다.

나를 향한 박수갈채가 터져 나오고 휘파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와중에 나는 겸손하게 돌아섰다.

이래야 효과가 배가 될 테니.

재판정 내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시녀들과 기사들이 이런 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 * *

외부의 빛이 완전히 차단된 지하 감옥.

벽에 달린 등불 하나가 작은 움직임에도 아스라이 흔들리며 희미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베르시트 남작은 겨우 그 등불하나에 의지하여 녹슨 창살 너머에 선 칸제로스 공작을 바라봤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사람 하나가 다가와 내게 이런 쪽지를 건네주더군. 남작, 이걸 보낸 의도가 뭐지?”

칸제로스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며 품 안에서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 그거요? 당연히 도와 달란 의미로 보낸 것이죠. 휴, 도박장 놈들이 그딴 문서를 남겨 놓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젠 누명이라고도 하지 않는군.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가 있어. 자네에게 크게 실망했네.”

“실망? 지금 실망이라 하셨습니까?”

베르시트 남작이 몸까지 젖혀가며 크게 자지러졌다.

“전 지금 공작님을 협박하는 겁니다. 가면은 이제 그만 벗으시지요.”

“가면? 난 도통 자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네.”

“착한 척은 그만하시란 말씀입니다. 칼몬에게 누명을 씌우라 한 것도 죽은 딸로 그를 협박하라 한 것도 전부 공작님 아니십니까? 사람들이 공작님의 실체를 알게 되면 뭐라 생각할지 벌써부터 궁금하네요.”

“자네 무례함이 도를 넘었어. 내게도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겐가? 정말 몹쓸 사람이군.”

공작은 남작을 엄하게 꾸짖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마치 이 사태를 관망하는 사람처럼 여유로웠다.

“벌써 잊으신 겝니까? 이건 다 공작님께서…….”

남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살 사이로 손 하나가 쑥 들어왔다.

칸제로스 공작은 그의 얼굴을 거칠게 잡아 창살 가까이로 끌고 왔다.

“남작, 미쳤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누명을 씌운 것도, 협박을 한 것도 다 그대가 그대의 하인을 시켜 꾸민 일이 아닌가?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아니면 그동안의 다른 죄까지 밝혀져 참수형을 당하고 싶은 건가?”

“…….”

“뭐? 내 실체를 밝혀? 누가 네 말을 믿어줄까? 멍청한 놈.”

그랬다. 공작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을 시켜 모든 일을 꾸미게 했으니.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남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칸제로스 공작은 일이 잘못되어도 쉽게 발을 뺄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딱 지금처럼.

‘이런 사람이 내가 누명을 쓴 줄 알아서 도왔을 리가 없어.’

처음부터 자신을 도와준 것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자신이 이 재판에서 이겼을 때 가장 난처한 입장에 처할 사람.

그것은 황후뿐이었다.

이어 공작은 더욱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내가 나를 버리면서까지 너를 도울 줄 알았더냐?”

웃음기 가득한 말에 남작도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설마 처음부터 목적이 황후였습니까?”

칸제로스 공작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졌다.

남작은 그의 답도 듣지 못했고, 뒤돌아선 그의 얼굴도 볼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무서운 사람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남작이 멀쩡한 목을 더듬거렸다. 더 나아가 공작을 협박한다면 그는 참수형을 받게 하는 게 아니라 이 옥사에 있는 기사를 사서라도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감옥에 있더라도 목숨만은 건져야 했다. 지하에 남몰래 묻어 놓은 금괴 몇 개는 건져야 하니까.

공작과 더 이상 얽혀선 안 된다는 것을 남작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으아악!”

그가 손에 잡힌 촛대를 집어 던졌다.

창살에 부딪친 촛대는 챙- 소리와 함께 튕겨져 돌아와 바닥에 나뒹굴었다.

공작이 사라진 후, 지하 감옥은 한참 동안 남작의 절규로 가득 찼다.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 나아 가던 공작의 시야가 점차 환해졌다. 동시에 남작의 고함소리는 희미해졌다. 이 더러운 감옥을 서둘러 빠져나가려는 찰나 뜬금없는 기사들의 대화가 그의 발목을 잡아 세웠다.

“신전 사람이 황후궁에 왔다 갔다 한다고?”

“응. 내가 봤어. 신전에서 기사단을 꾸린다는 얘기도 들려오던데.”

“뭐야. 그럼 소문이 사실이야?”

“소문이라면 그 에스타란토가 황… 아, 공작님.”

지하 감옥을 지키고 선 기사들은 밖으로 나오는 칸제로스 공작을 뒤늦게 발견하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남작과 이리 만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맙네.”

공작은 그들쪽으로 천천히 걸어와 한 마디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대신 감옥 출입은 꼭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그나저나 공작님께서 남작님을 많이 아끼신 모양인데 이렇게 되니 속상하셨겠습니다.”

“나도 남작이 저런 일을 꾸밀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아무리 속상해도 어쩌겠는가.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 이만 가 보겠네. 나중에 식사라도 하지.”

“네, 그럼 들어가십시오.”

내내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던 공작은 그들에게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표정을 굳혔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방금 들었던 기사들의 말을 곱씹었다.

‘신전 사람이 황후궁에?’

* * *

“폐하!”

“루안.”

“신문 보셨어요? 그야말로 난리예요, 난리! 심지어 서랠 왕국에도 황후 폐하에 관한 기사가 실렸대요!”

“네, 봤어요.”

재판정 이후, 나를 옹호하는 기사가 쏟아졌다.

신문사는 앞다투어 그동안의 소문이 묻힐 만큼 나를 대단한 영웅처럼 추켜세웠다.

사람들은 영웅인 줄 알았던 사람이 악인이 되거나 반대로 악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영웅이 되었을 때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나는 후자의 경우였다.

그러나 이런 우호적인 시선이 얼마나 갈지 솔직히 장담은 못 한다.

벨리타를 이용해 나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누군가는 지금 이 상황을 못마땅해할 테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내 평판을 단숨에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제국의 황후에게 있어 무능력하고 바보 같은 것이 얼마나 독이겠는가. 이제 적어도 그런 소문은 돌지 않을 테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우리 폐하께서 이런 분이다! 하고 제가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는지 몰라요.”

루안이 말을 하며 팔을 넓게 뻗자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신문이 책상 모퉁이를 스쳤다.

그에 하얀 종이가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앗! 죄송해요.”

루안은 서둘러 몸을 굽혀 그것을 주워들었다.

“어? 황후 폐하, 이게 뭐예요?”

“쪽지예요.”

그것은 칼몬을 만나러 감옥에 다녀왔던 날 하드엘이 건네고 간 쪽지였다.

아직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은 쪽지는 원상태 그대로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왜 읽어 보지 않으셨어요?”

“그냥… 잊어 버려서요.”

“어떤 분께서 보내신 건데요?”

“황제 폐하께서 주신 거예요.”

“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말을 이었다.

“어서 읽어 보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폐하께서 쪽지를 보내신 거면 굉장히 중요한 말이 적혀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가? 하긴, 이깟 쪽지 하나 읽은 게 뭐 대수라고.

루안은 내 앞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중요한 말이 있을 수도 있으니 읽어 보라 한 그녀였지만 정작 중요한 말이 아닌 다른 말이 쓰여 있길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안의 바람대로 나는 종일 만지작거리기만 했던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종이 위에 쓰인 반듯한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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