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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44)화 (4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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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앞만 보고 걸으면 위험하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다행히 점점 원래의 빛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에게 안겼던 순간은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난 창피한데 하드엘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아까부터 나를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벌리면 그는 단번에 내 속도를 따라잡았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나란히 서더니 그는 꾸중하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 빨리 걸어도 위험하고.”

“제가 알아서 걷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고 긴 복도의 끝이 보였다. 그곳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하드엘이 내 뒤에서 손을 뻗더니 철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그 문이 열리고서야 내가 아는 지상 감옥이 드러났다.

꽤 넓은 방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 안의 상태는 예상대로 꽤 나쁘지 않았다.

물론 창살로 앞이 모두 막혀 아무리 괜찮은 방이라 해도 감옥이긴 하였지만.

감옥 양 끝에는 사람이 각 한 명, 그러니까 이곳에 갇혀 있는 이는 총 두 명뿐이었는데 자백을 해서 들어온 자는 문과 가장 가까운 옥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들어오자마자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맨바닥에 앉아 있었다.

“칼몬 엘 드리오.”

나는 대법관을 통해 알아낸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들리자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리고 나와 내 등 뒤에 있는 하드엘을 번갈아 보더니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인사는 되었네. 자백을 한 이유가 뭔가? 그대는 범인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가 말을 못 한다는 것을 알고 미리 챙겨온 종이와 펜을 창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답을 적게.”

그런데 남자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감히 황후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냐.”

남자의 태도를 본 하드엘은 그를 서늘하게 내려 봤다. 그 탓에 남자는 더욱 움츠린 채 내 눈을 피했다.

저리 다그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 뻔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하드엘의 앞을 가로막고 창살 가까이로 다가갔다.

“왜 자백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누명을 쓰겠다고 나서도 달라지는 건 없네. 그들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문서를 남겼거든. 지금 그게 내 손에 있고. 계속 그렇게 우기면 그대는 공범으로 옥에 갇힐 뿐이야. 그런데 난 무고한 이가 벌을 받는 걸 원치 않네.”

차분히 설명해 보아도 그는 여전히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누명을 쓰려는 이유가 뭘까.

나는 눈물이 맺힌 남자의 눈을 마주 봤다. 눈은 억울했으나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떠올렸다.

“협박을 받았군. 아니면 대가를 약속받았거나.”

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내가 도와주겠네. 그게 뭐든.”

내가 들춰낸 범죄에 억울한 이가 벌을 받는다면 나 또한 죄책감이 들 것이다.

나는 그가 제발 마음을 바꿔 진실을 말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협박이든 대가든 그들은 그대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야. 어찌 되었건 감옥에 들어가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될 테니.”

한참을 머뭇거리던 남자가 드디어 펜을 잡았다.

그는 주변을 의식하며 글을 적어 내려가더니 곧 내게 종이를 건넸다.

남작가의 하인이라는 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백을 해준다면 타국으로 팔려갔던 제 딸을 만나게 해준다고 하더군요.

잘못된 일인 걸 알았지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거절한다면 딸을 죽인다고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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