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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43)화 (4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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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

수프는 맛있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앞으로는 제가 직접 황실 주방에 부탁할게요.

하드엘은 황후궁 시녀에게서 건네받은 쪽지를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그의 표정이 각기 미묘하게 바뀌었다.

“폐하.”

곁에 서 있던 백작은 그런 하드엘을 불렀다.

딱히 이유가 있어서 부른 건 아니었다. 그저 지금 황제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여서, 저런 모습은 처음이라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부른 것이었다.

손에 쥔 작은 종이를 몇 번이고 읽어 내려갈 때마다 하드엘의 오른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폐하?”

계속되는 부름에 하드엘은 다소 짜증이 섞인 어투로 답했다.

“왜 부르지?”

“보고 계시는 게 무엇입니까?”

궁금함을 참지 못한 넬슨이 큰 마음을 먹고 물었으나 하드엘은 백작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알 필요 없다.”

잠시 뒤, 그는 황후에게서 받은 쪽지를 서랍에 넣고 풀이 죽은 백작을 무시한 채 새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길어.”

“이건 너무 부담스러울지도.”

시간이 지날수록 구겨진 종이 뭉치가 그의 주변에 쌓여갔다.

“어렵구나.”

하드엘은 고개를 젖히고 한 팔로 자신의 두 눈을 가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에게 답장을 하고 싶은데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하자면 편지의 내용은 너무 깊어졌고 길어졌다.

무엇보다 자신은 이런 데 서툴렀다. 뭐라 말문을 열어야 하는지, 어떤 말이 당신에게 기쁨을 줄지 난 잘 알지 못했다.

‘사실 이뿐만 아니라 당신에 관한 모든 것이 내겐 어렵다마는.’

플로리아 그대에 대해 내가 아는 거라곤 비를 맞으면 감기가 든다는 것, 좋아하는 음식이나 사소한 습관 정도. 나머지는 감시를 붙여 얻은 정보가 다였다.

결국 이렇게 될 거라면 당신을 더 오래 눈에 담아도 되었을 텐데. 조금 더 빨리 가진 것을 놓을 수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한참 뒤 다시 펜을 잡으려 시야를 가린 팔을 치웠을 때, 하드엘은 축 처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가는 눈으로 백작을 보던 하드엘은 오늘 처음으로 그를 향해 먼저 말을 걸었다.

“넬슨.”

“말씀하시지요.”

“편지를 주고받으려면 어떻게 글을 적어 보내야 하지?”

“답장을 받으셔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답장.”

“어떤 분께 보내시는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황후에게.”

“네?!”

백작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저렇게 고심하고 계신 이유가 황후 폐하께 답장을 받기 위해서였다니 감히 예측조차 못 한 일이었다. 그럼 아까 그 흐뭇하던 표정도 황후 폐하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황후 폐하를 경계하셨는데 어느새 편지를 나누시다니.

생각해 보면 황후 폐하께서 쓰러지신 날 장로님을 불러들이신 것도, 요 근래 황후 폐하를 만나러 가시겠다며 자신을 다그친 것도, 황후 폐하를 위해 신전의 기사단을 만든 것도 죄다 수상했다.

이런 황제 폐하의 행동은 마치…….

‘설마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넬슨, 뭐 하고 있지?”

“아, 네! 의문문으로 끝을 맺으시면 대개는 답장을 보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의문문이라. 좋은 생각이구나.”

백작은 열심히 글을 적어 내려가는 하드엘을 흘끗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거의 확실했다.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진심으로 좋아하시게 된 거였다.

보통은 저리 차가운 사람들이 유독 사랑에 둔하다. 그러니 아마 폐하께서도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실 것이다.

혹시나 폐하께서 자신의 마음을 뒤늦게 깨달아 후회하시는 건 아닐지 백작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그는 안타까운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누군가 나서서 알려 드려야 해. 하루빨리 폐하가 스스로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도록.’

“폐하. 아무래도…….”

“더 좋은 생각이 있느냐?”

“아니 그런 것이 아니오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라.”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마음에 품고 계신 듯합니다.”

“뭐?”

그래 처음에는 부정하시겠지. 이런 반응이 어쩌면 당연해. 하지만 차차 인정하시게 될 거야.

“그걸 이제 알았나?”

하드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백작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음정이 어긋난, 조금은 이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역시 눈치가 없어.”

백작이 무어라 반박하려 했을 때였다. 문 앞을 지키고 선 기사가 큰 목소리로 누군가가 황제궁을 찾았음을 알렸다.

“폐하, 대법관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자백이라니요.”

나는 백작 부인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대법관을 찾아 갔다.

대법관 또한 갑자기 벌어진 일이 적잖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재판을 청구하신 황후 폐하께 지금 막 이 소식을 전해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오늘 아침 한 남자가 찾아와서는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자백을 한 자가 직접 자신이 죄를 지었다 그렇게 말을 하던가요?”

“네, 아!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범인이라는 여러 증거 서류와 자백서를 내밀더군요. 말을 못 하는 자인 것 같았습니다.”

“말을 못 한다고요?”

“예.”

변명을 하며 끝까지 발악을 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남작이 이런 식으로 처벌을 피하려 들 줄이야.

“분명 거짓 자백입니다.”

“하지만 가져온 증거들이 워낙에 확실한지라…….”

“진범은 도박장과도 연계가 되어 있을 테니 그런 증거는 충분히 조작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내가 증거로 제출한 상세 기록 문서, 그것을 반박할 증거도 있던가요?”

“아니요. 그것을 반박할 증거는 아직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고 저렇게나 우겨대니 우선은 재판을 미루고 재조사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는 건 도박장 측에서 아직 그 문서가 사라진 건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재판을 연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시간을 버는 일일 터.

재산 내역서에 스스로 기재한 재산 내역도 앞뒤가 같게 만들어야 할 테니 당장은 재판을 미루려 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동안 자백을 한 자에게 완벽히 그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 것이겠지.

“자백인 참여 재판. 그걸 진행하도록 하세요.”

“자백인 참여 재판이요? 그 재판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황후 폐하 그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판례집에서도 그 선례를 찾기가 힘듭니다.”

“선례를 찾기가 힘든 거지 할 수 없는 건 아니잖아요? 소환장을 받은 자와 자백을 한 자. 이 둘을 같은 날 같은 재판에 출석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이뿐입니다.”

“같은 재판에서 판결하지 않아도 저희가 재조사를 진행한 후에 다시 재판을…….”

“시간을 벌어 주자 이 말인가요? 그땐 이미 늦습니다.”

“잘못되었다간 저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 책임, 내게 물으라 하세요.”

“폐하.”

“지금 그 자는 어디에 있나요?”

“…지상 감옥에 있습니다. 완전히 죄가 밝혀진 것이 아니기에 우선은 그곳에 가둬두었습니다.”

“내가 직접 그 자를 만나야겠습니다.”

궁 안을 한참 내달리던 마차가 완전히 멈추어 섰다. 나는 곧장 내려 그 길로 지상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들은 뜻밖의 얼굴이라도 본 듯 저마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무슨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오늘 자백을 했다는 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안내하세요.”

그들은 내게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갑자기 내 등 뒤를 보고는 허겁지겁 그쪽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드엘?

나는 기사들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 등에서 내린 하드엘이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폐, 폐하께서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오셨는지요.”

날 마주할 때와는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하드엘은 짧게 나를 응시하더니 다시 그들을 보았다.

“열거라.”

“네? 네!”

기사들은 그의 명에 곧바로 길을 내어 주었다. 그렇게 나는 하드엘과 단둘이 감옥으로 들어가는 복도에 들어섰다.

아직 죄가 판결나지 않은 이들이 모여 있어서인지, 지상 감옥은 지하 감옥보다 그 형편이 나아 보였다.

조금 어두운 것만 빼면.

“혼자 오기에는 위험한 곳이오.”

줄곧 정면만 응시하던 그가 나를 향해 먼저 말을 걸었다.

이렇게 하드엘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델과 그 사이의 다툼이 있고서는 처음이었다.

새벽의 어스름 같은 어둠이 깔린 곳에서 하드엘 눈은 이채를 머금고 빛나고 있었다.

가만히 그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지키고 선 기사들이 있는데 위험할 리가요. 폐하께서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최대한 무심한 어조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이기도 했지만 그를 향한 어떠한 감정도 티를 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법관이 사람을 보냈소.”

“그럼 폐하께서도 자백을 한 자를 찾아오신 거군요.”

“아니. 난 그 자에게는 볼 일이 없어.”

“그럼 왜 오셨습니까?”

“그저 황후 그대가 이곳에 있다기에.”

흔들리지 않겠다. 그렇게 다짐한 마음이 그의 앞에선 이리도 쉽게 허물어진다.

속마음을 들켜버릴 것 같아 나는 천천히 눈을 내리떴다.

“이전처럼 대해달라는 말을 잊으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는 참…….”

“조심!”

몸이 휘청였다.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딘 탓이었다.

그는 넘어지려는 나를 향해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간신히 잡은 한쪽 팔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익숙한 향기가 짙어졌다.

그의 품 안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한동안 멍하니 두 눈만 깜빡였다.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필요했다.

“!”

세찬 심장박동 소리가 점점 크게 귀에 울려 퍼지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고 괜히 구겨지지도 않은 드레스를 정리했다.

당황한 것이 티가 났는지 그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허락도 없이 안거나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소.”

“압니다. 그저 우연이었죠.”

나 또한 그를 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얼굴에서 시작한 생생한 열감은 어느새 목까지 전달되었다. 지금 내 모습을 상상하기 싫었다. 그나마 어둠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나는 전보다 속도를 높여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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