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
“공녀님께선 인품도 인물도 공작님을 똑 닮으셨습니다. 돌아 가신 부인께서 지금의 공녀님을 보셨다면…….”
“그만.”
“죄, 죄송합니다. 제가 또 실수를 했습니다.”
공작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를 보고 안심한 남작은 조심스레 공작의 눈치를 살피더니 어느새 일어나 자신이 가져온 귀중품을 공손히 두 손으로 가리켰다.
“공작님, 모쪼록 제가 가져온 것들은 전부 받아 주시지요. 이건 정말 제 마음입니다.”
“됐네. 이런 걸 바라고 도와주겠다고 한 게 아닐세.”
남작은 끝까지 거부하는 그를 보며 애원했다.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럽니다. 그동안 공작님께 소원했던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고요. 이걸 받아 주셔야 그나마 제 마음이 편해집니다.”
“휴, 남작이 그렇게 말하니 안 받을 수가 없겠어. 정 그러하다면 하나만 골라가겠네.”
하나만 골라간다. 그 답에 속으로 환호하는 건 남작이었다. 안 그래도 공작의 입에서 도와준다는 확답이 나오고서는 간절하던 마음도 사라졌던지라 이 모든 걸 공작에게 바치기가 아까웠던 참이었다.
“맘껏 골라 가십시오.”
베르시트 남작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눈꼬리를 휘었다.
“그러면…….”
공작은 응접실에 들여 놓은 몇 가지 물건을 살폈다. 값나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도 그 눈이 한없이 무심했다. 그런 공작이 어느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춰 섰다.
“아, 이걸로 하겠네.”
그의 손에 쥐어진 건 조그마한 푸른빛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체인이 찰랑 움직일 때마다 그 오묘한 빛깔은 더욱 깊어졌다.
“딸아이에게 선물하면 좋을 듯싶어서.”
목걸이를 바라보는 베르시트 남작의 얼굴은 소환장을 받아볼 때보다도 더욱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공작의 손에 들린 것은 자신이 싣지 말라 거듭 당부한 에페논의 눈물이었다.
“왜 그런가? 표정이 좋지 않은데?”
“아, 아닙니다…….”
“혹시 자네가 아끼던 것을 고른 건가? 나는 이쪽으로는 완전히 문외한이라 보석 알이 가장 작은 것을 골랐는데.”
오늘 공작 가에 가져온 물건들의 값을 다 더해도 에페논의 눈물을 살 수 없었다.
금액이 턱 없이 부족하기도 했을뿐더러 에페논의 눈물은 돈이 많다고 살 수 있는 보석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수로 챙겨 온 것이니 다른 걸 고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작은 차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고 대답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다 공작님께 드리려고 가져온 것인 걸요. 역시 공작님께서는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 * *
남작이 떠나고, 칸제로스 공작은 곧바로 레이샤를 불러 들였다.
레이샤는 아까 본 우아하고 고귀한 모습 그대로 공작의 앞에 섰다.
“에페논의 눈물이다. 잘 간직해.”
“감사합니다.”
“아까 남작의 표정이 참 가관이었는데.”
한없이 너그러워 보이던 칸제로스 공작이 제 딸의 손에 목걸이를 쥐여 주며 조소했다.
하지만 그 경멸 섞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작이 잡고 매달린 탓에 옷소매가 구겨졌다. 그걸 발견한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저런 경박한 작자의 뒤처리까지 해줘야 하다니.”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듯 그는 자신의 옷을 털어 냈다.
이런 공작의 행동을 빤히 응시하며 레이샤가 질문했다.
“정말 누명일까요?”
“누명? 쯧,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야.”
“그러면…….”
“남작은 누명을 쓸 자가 아니야. 더한 죄를 지었으면 지었지.”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제 딸을 칸제로스 공작은 어느 순간부터 아니꼽게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의 말처럼 자신과 똑 닮은 딸이었다. 하지만 그런 딸을 담은 눈에는 애정보다 더 큰 미움이 깃들어 있었다.
“레이샤, 네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으면 내가 이따위 추찹스러운 일에 엮이지도 않았을 것을.”
“죄송합니다.”
일상 같은 타박에 레이샤의 목소리가 줄어들자 동시에 공작의 한숨도 터져 나왔다.
그는 봄이 펼쳐진 창가 너머로 아예 시선을 돌리며 뒷짐을 졌다.
“알면 되었다. 생각할 게 많으니 이만 올라가봐.”
* * *
종일 서재에 있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낮이 밤이 되고 또 밤이 낮이 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문을 열고 들어온 루안은 아직도 문서를 살피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폐하!”
“루안, 왜요?”
“눈을 좀 붙이셔야죠! 이러다 몸이 상하실까 걱정입니다.”
“아직 괜찮아요. 이것만 좀 더 보고…….”
루안은 몸을 던져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온갖 서류들을 가렸다.
“절대 안 됩니다! 잠깐 쉬기라도 하세요!”
틈을 찾으려 했지만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나는 루안의 철통방어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문 근처에 세워둔 트레이 카트가 보인 건 그때였다.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카트는 루안이 끌고 온 것으로 보였다.
“저건 뭐예요?”
내가 자신을 속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루안은 서류를 가린 그 상태 그대로 고개만 살짝 돌렸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요?”
저러면 내가 가리킨 게 안 보일 텐데.
“저기 카트 위에 그릇이요.”
“아아!”
그녀가 그제야 번쩍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새초롬한 눈으로 날 주시하고 있는 건 여전했다.
그런 루안이 귀여워 난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루안, 걱정마요. 정말 쉴게요. 이제 됐죠?”
“꼭 그리하셔야 합니다.”
“내 걱정을 이리 많이 해 주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죠. 근데 정말 저게 뭐예요?”
“데유슈리냑이요!”
데유슈리냑? 이름이 꽤 어려웠다. 무엇일까 추측하는 사이 루안은 내 앞에 그릇을 놓고 공손한 동작으로 덮개를 치웠다.
따뜻한 김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얼마안가 나는 그것이 채소와 달걀이 들어간 수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폐하께서 보내셨다고요?”
“네. 황후 폐하께서 밤을 새운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황실 주방에 일러 이걸 꼬옥 만들어 보내야 된다고 하셨다죠? 흐흐.”
루안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흐뭇함을 참지 못해 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이걸 먹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수프 위에 둥둥 떠다니는 익힌 당근과 초록 채소를 가만히 쳐다봤다.
“드셔 보세요!”
“…….”
“어서요!”
스푼을 들자 루안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음식은 죄가 없다. 루안의 간절한 바람을 무시할 수 없던 난 결국 그런 판단을 내렸다.
근데 수프가 투명하니 별로 맛이 없을 것… 와! 이거 뭐야?
“너무 맛있어. 딱 내 취향인데요?”
“황후 폐하께서 평소 즐겨 드시던 수프잖아요.”
“아 그랬나요? 하하. 기억이 잘 안 나서.”
플로리아가 즐겨 먹던 스프를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멋쩍게 변명을 하며 난 다시금 수프를 떠냈다.
“폐하께서는 어떻게 아시고 이걸 딱 보내 주셨는지.”
“그러게요.”
정말 내 입맛에 딱 맞았다. 고소하면서도 깔끔해 입 안 가득 풍미가 돌았다. 아벨리움의 음식은 대부분 맛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이 수프는 단연코 최고였다.
“벌써 다 드셨어요? 한 그릇 더 내오라 이를까요?”
수프는 양이 너무나도 작아 몇 번 떠먹으니 금세 사라졌다. 이곳의 식기가 죄다 조막만 한 것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럼 한 그릇을 더…….”
잠깐. 마주할 때는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으면서 보내준 수프는 두 그릇이나 먹었다고 하면 좀 웃기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냥 두세요.”
“네. 그럼 치워드릴게요.”
루안이 내 앞에 놓여 있던 그릇을 들었다. 아쉬운 마음에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시선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어? 루안, 잠깐만요.”
“네?”
그릇 바닥에 종이가 껴있었다. 루안에게서 빈 그릇을 다시 받아든 나는 곧장 그것을 빼냈다.
종이를 펼치자 반듯하기 이를 데 없는 글씨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보았던 신전 기사는 그대로 두기로 하였소.
짤막한 한 마디였다. 편지라기보다는 쪽지에 가까웠다.
이 쪽지를 보낸 이는 내게 수프를 보낸 하드엘이겠지. 그가 말하는 신전 기사는 아델일 테고.
둘이 원만히 해결한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낸 쪽지를 읽음으로써 내겐 애매한 문젯거리가 하나 생겼다.
‘답장을 보내야 할까?’
아무리 쪽지라지만 답장을 안 보내자니 그건 그거대로 마음에 걸렸다. 더군다나 이렇게 그릇을 깨끗하게 비워놓고 잠자코 있기도 뭐하고.
그래. 수프를 보내줘서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어차피 또다시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때 직접 보고 ‘수프가 참 맛있었다.’ 그런 얘길 나누는 것보다야 간단한 쪽지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는 게 내편에도 차라리 나았다.
나는 시선을 들었다.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루안과 마침 눈이 마주쳤다.
“루안, 종이랑 펜 좀 가져다줄래요?”
나름 열심히 글을 적어 내린 나는 이만 펜을 내려놨다.
이 정도면 되겠지 싶어 글자가 쓰인 종이를 고이 접어 루안에게 건넸다.
“이걸 폐하께 좀 전해줘요.”
“네!”
명랑한 대답소리와 함께 그녀는 들뜬 발걸음으로 황제궁으로 향했다. 통통 튀는 걸음을 따라 뒤로 질끈 묶은 머리가 흔들렸다.
“정말 못 말려.”
소중하게 내가 쓴 답장을 안고 가는 루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난 쌓여 있는 서류들로 눈길을 돌렸다.
루안의 당부가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재판까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가 변호나 판결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일을 벌려 놓고 나태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이곳의 법이 내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달라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예측하는 데 애를 좀 먹었지만 아벨리움에 적응하기 위해 초기에 법률서를 외워둔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어쨌든 이대로라면 베르시트 남작이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건 확실했다.
“황후 폐하!”
그만 다 읽은 서류를 넘기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문을 벌컥 열었다.
가쁜 숨소리가 들려오자 고요가 깃든 평온은 한순간에 깨졌다.
나는 놀란 눈으로 앞에 선 사람을 바라봤다.
“백작 부인?”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어느 때라도 예의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인이 문을 벌컥 열다니.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뛰어왔는지 부인의 이마가 땀으로 흥건했다.
“부인, 무슨 일 있어요?”
“지금 어떤 남자가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합니다!”
“자백이라니요? 무슨…….”
“황후 폐하께서 조사 중이신 도박장 사건이요! 그 사건의 죄가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합니다!”
“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