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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41)화 (4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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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한 남자의 얼굴에 붉은 피가 잔뜩 엉겨 붙어 있었다. 맞은 자리가 그대로 부어올라 누구인지 알아보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뭐? 없어? 고작 여자 하나 제대로 못 찾아와!”

장시간 심한 구타를 당한 듯 얼굴뿐 아니라 남자의 몸 곳곳에는 보랏빛 피멍이 맺혀 있었다.

“살, 살려 주… 쿨럭!”

그는 터진 입술로 간절히 애원했다.

“네까짓 목숨도 사람 목숨이라고 살고 싶으냐?”

그러나 베르시트 남작은 아랑곳 않고 그를 내려다봤다.

“그리도 살고 싶었으면 주드랑 아내를 내 앞에 데려왔어야지.”

-퍽!

이어지는 구타에 남자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의 축 늘어진 팔을 발끝으로 툭툭 건들던 베르시트 남작은 이제 그만 손을 털고 일어섰다.

“에이, 빌어먹을 놈.”

“남작님.”

그때, 밖에 서 있던 남작 가의 하녀가 그를 불렀다.

아직 화가 다 풀리지 않은 참이라 베르시트 남작은 애꿎은 하녀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뭐야!”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끼익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검붉게 부식된 창고 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뭔데 불러 대?”

문틈 사이로 검붉은 덩어리가 된 남자가 보였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문밖까지 새어 나오는 듯했다.

하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애써 쓰러져 있는 남자를 무시하고 베르시트 남작을 향해 새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남작님 앞으로 이런 게 왔습니다.”

“?”

베르시트 남작은 하녀의 손에 들린 봉투를 덥석 빼앗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봉투를 뜯어 그 안에 정성스럽게 접혀 있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집어 들었다.

그것은 재판의 출석을 명령하는 소환장이었다.

남작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그의 얼굴 위에 드리워졌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의 눈이 어느 순간부터 소환장의 맨 끝, 대법관의 이름 아래 적혀 있는 황후의 이름에 고정되어 있었다.

소환장에 황후의 이름이 적힌 이유는 하나였다.

황후의 권한으로 재판을 청구했기 때문.

남작은 한동안 못 박힌 듯 제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아니라 황후였다.

주드랑을 데려간 것도, 그의 아내를 빼돌린 것도 모두 황후의 짓이었다.

그가 아는 황후는 절대 이런 일을 벌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물러 터진 성격은 둘째 치고 겨우 글이나 읽고 쓰는 주제에 이번 일에 관해 아는 게 있을 리가.

하지만 이 소환장은 분명 황후의 권한으로 급히 발부된 것이 맞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 가는 거야.’

문득 남작의 머릿속에 얼마 전 황후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황후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자신을 대했다.

설마 약점을 잡았다 생각해 그리 나왔던 건가? 그동안 자신을 하대했던 것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고?

그래, 어쩌면 이제야 순진한 가면을 벗고 본성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른다.

혼자 생각해냈을 리는 없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 나를 칠 계획을 짠 거겠지. 같잖게 주제도 모르고 거만하게 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주드랑도 빼앗기고, 그녀의 아내도 인질로 잡아두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제 잠자코 형벌이 내려지기를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게다가 재산 내역서까지 황제의 손에 있었으니 어찌 손쓸 도리가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딴 여자 때문에 내가?

“으악!”

그는 광증에 걸린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더니 소환장을 마구 구겨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이내 손톱을 물어뜯으며 주변을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의 걸음을 따라 낡은 나무 널이 삐거덕 소리를 내었다.

생각을 해야 했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제발, 제발…….

“아! 칸제로스 공작!”

눈을 번쩍 뜬 남작이 옆에 있던 하녀를 가리켰다.

“거기 너!”

가뜩이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남작을 보고 놀라 움츠려 있던 하녀가 그의 부름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집사에게 가 지금 당장 칸제로스 공작저에 갈 채비를 하라 일러라.”

“알, 알겠습니다.”

“그리고 뒤뜰 정원 창고에 있는 물건들 중 온갖 귀한 것을 마차에 실어 놔.”

이만 말을 마치고 계단을 오르려던 남작은 무언가 생각난 듯 아차 하더니 뒤를 돌아 당부했다.

“얼마 전에 구한 에페논의 눈물, 그거는 빼고. 그건 절대 마차에 싣지 마.”

* * *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진귀한 보석부터 구하기 어렵다는 서적, 드레스까지 세상 귀하다는 것들을 잔뜩 실은 마차가 떨거덕 소리와 함께 궁 못지않은 대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남작을 응접실이 딸린 이층 방으로 안내했다.

환한 대리석 바닥과 유리 테이블 그리고 저택의 주인 칸제로스 공작이 그를 반겼다.

남작은 칸제로스 공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찾아왔는데도 이리 만나주시니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남작이 온다는데 나야 당연히 환영이지. 앉아서 차라도 마시게나. 그나저나 나를 급히 찾은 연유가 무엇인가?”

중년의 미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남작에게 물었다.

입과 눈은 웃고 있었지만 왠지 모를 날카로운 위압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우선 이것들을…….”

남작은 자신이 지니고 온 물건 중 일부를 응접실 안으로 들여 공작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외에도 가져온 물건이 더 있습니다.”

공작은 그것들을 찬찬히 살피더니 남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리 귀한 것들을 왜 내게?”

“공작님을 존경하는 저의 마음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칸제로스 공작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남작.”

“예?”

“내가 이런 걸 받을 사람으로 보이는가? 자네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쾌하군.”

“이건 정말 순수한 마음에……!”

“당장 돌아 가게.”

‘안 돼!’

칸제로스 공작의 도움마저 받지 못한다면 그땐 정말 끝이었다.

“공작님!”

그는 바닥에 코가 닿을 정도로 넙적 엎드리며 돌아서려는 칸제로스 공작을 불러 세웠다.

“도와주십시오!”

“방금까지는 순수한 마음이라 하지 않았는가?”

“공작님께 드리려 가져온 선물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가져온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공작님의 도움이 필요해 찾아뵌 것 역시 사실입니다.”

“무슨 일이기에 내게 이러는가.”

“그게… 제가 누명을 썼습니다.”

남작의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누명?”

“예.”

칸제로스 공작가는 대대로 청렴하고 올곧다 평판이 나 있는 가문이었다. 제국민들이 공작 가를 존경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을 고한다면 이런 성품을 지닌 자가 자신을 도와줄리 만무했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호소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공작은 실제 누명을 쓴 이들을 종종 도와온 적이 있으니.

“도박장에서 제가 무슨 조작을 하였다고 하는데 결단코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 소환장까지 날아와서 이를 어쩌면 좋을지. 흐윽.”

“그래서?”

“…네?”

칸제로스 공작은 남작을 향해 되물었다.

“그래서 내게 어쩌라는 거지?”

베르시트 남작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하여 바닥에 엎드린 그 상태 그대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공작의 입과 눈에 웃음기가 사라진지는 오래였다. 방금 전 반갑게 자신을 맞이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는 아예 귀찮다는 듯 남작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남작은 포기하지 않고 무릎으로 기어가 공작의 소매 끝을 붙잡았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거짓 증인까지 만들어 가며 저를 몰아세우려 하십니다! 공작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제발…….”

무관심하게 남작의 말을 듣고 있던 칸제로스 공작이 돌연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잠깐. 남작, 방금 뭐라 하였는가?”

“황후 폐하께서 거짓 증인을 만드셨다는…….”

“뭐? 황후 폐하께서?”

공작의 입가에 순간 비릿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는 주저앉아 있던 남작의 손을 꼭 쥐었다.

“우선 일어나게. 그리고 내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게나.”

남작의 입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중 대부분은 거짓에 약간의 사실을 덧붙인 소설이었다.

공작은 눈물을 닦아 내는 베르시트 남작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내가 이 정도로 달변가였단 말이야?’

자신을 대하는 공작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뀐 것을 보고 남작은 자신의 말솜씨에 뿌듯해했다.

하지만 차마 만족감을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그는 눈물이 맺혀 있지도 않은 눈가를 애써 벅벅 문질렀다.

“황후 폐하께서 뭔가를 단단히 오해하신 모양일세. 어쨌든 억울한 이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 내가 방법을 찾아보겠네.”

“감사합니다, 공작님.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베르시트 남작이 공작을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릴 때였다. 문밖에서 단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레이샤. 들어오거라.”

곧이어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레이샤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공작과 남작이 있는 곳을 향해 걸었다.

드레스에 대비되는 그녀의 검은 머리칼은 움직임에 따라 살랑였고, 장미를 베어 문 듯한 입술에는 수줍은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레이샤를 보았다.

걸음에서조차 우아한 기품이 배어나는 그녀는 너무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순백의 천사 같았다.

“손님이 와계시다 하여 잠시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공녀님, 정말 오랜만에 뵙니다.”

남작이 먼저 허리를 숙였다.

“남작께서는 무탈하셨지요?”

“네. 공작님께서 굽어살펴주신 덕에 무탈했습니다. 그나저나 공녀님께서는 해가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다.”

“칭찬이 과하십니다.”

“사실입니다. 정말 아까는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지 뭡니까, 하하!”

“흠흠!”

둘의 대화 사이에 공작의 헛기침 소리가 섞였다. 힐끗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본 레이샤는 곧바로 남작과의 대화를 중단했다.

“중요한 말씀을 나누시던 중에 제가 실례를 했네요. 잠시 인사만 드리려던 것이니 저는 가 보겠습니다.”

“벌써요? 이렇게 왔으니 차라도 한 잔…….”

“괜찮습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잡고 공작을 향해 사뿐히 인사를 올렸다. 그런 레이샤를 지켜보던 남작이 탄복하며 말했다.

“와, 정말 고루 갖추셨습니다. 예법이면 예법, 지식이면 지식. 이런 공녀님께서 황후의 자리에 오르셨어야 했는데! 공녀님을 뵐 때마다 감탄만 나온다니까요.”

“그런 말씀은 지금의 황후 폐하께 실례입니다.”

한순간 레이샤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그걸 본 남작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공녀는 워낙에 천성이 고와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며 추켜올려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황후와는.

황태자비 내정자에서 파해진 당시에도 그러했다. 분통할 만도 한데 언제나 자신을 편들어 황후를 깎아내리는 자들을 꾸짖었다.

그 답답할 만큼 올바른 성정 덕에 공녀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칭송하는 이가 더 늘었다마는.

“죄송합니다. 공녀님을 보니 저절로…….”

그녀는 남작을 향해 싱긋 웃었다.

“다음부터는 주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정중히 인사를 올린 레이샤는 끝까지 공작의 표정을 살피며 물러났다.

응접실의 문이 완전히 닫히자 한순간을 빼놓고 웃음을 잃지 않던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봄날의 아침처럼 싱그럽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곁에 서 있던 그녀의 유모 잔느가 이런 레이샤의 표정을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혹시 또 공작님께서 때…….”

“유모, 입 좀 다물어.”

그녀는 분홍빛 입술을 세게 씹었다. 그러자 윤기가 흐르던 입술에서는 피가 새어 나왔다.

‘황후가 재판을 청구했습니다! 모든 게 황후의 함정입니다.’

응접실에 들어서기 직전 밖에서 들었던 남작의 말이 귓가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황후가 재판을 열어?

“하.”

햇빛이 환히 비쳐드는 복도를 지나며 레이샤는 낮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더없이 싸늘한 음성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천박한 게 오만하기까지 하니 이제 어쩜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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