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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40)화 (4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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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답하라.”

하드엘이 거리를 좁히고 다가섰다. 아델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얼마나 살벌한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이런 하드엘의 시선을 받는 당사자는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아델 페르제 듀크, 황후 폐하를 보필하는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아델은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그에 하드엘의 곧은 눈매가 찌푸려졌다.

“너 따위가 왜 황후를 보필하는 거지? 감히 누구의 명으로.”

“신전 기사단이 되어 황후 폐하를 보필하라 장로께서 명하셨습니다,”

“뭐?”

하드엘은 예상치 못한 답변이라도 들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지금까지의 하드엘의 반응을 보면 아델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폐하.”

나는 거의 뽀뽀라도 할 듯이 붙어 있는 두 사람을 갈라놓고 그 사이에 섰다.

“아델 경은 신전 기사단의 일원으로 저를 보필하는 신전 마법사입니다. 폐하께서 신전 기사단의 창설을 명하셨다 알고 있는데 아델 경을 모르셨습니까?”

하드엘은 그제야 아델이 두른 망토를 살폈다.

하얀 망토 위에 새겨진 황금색 마법 휘장이 그가 신전 마법사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당장 황후궁에서 나가라.”

하드엘은 마치 벌레라도 보는 듯 아델을 쳐다보며 말했다.

“장로님의 명이 있기 전에는 아무리 황제 폐하시라도 절 내쫓으실 수 없습니다.”

“순순히는 못 나가겠다?”

하드엘이 신전 기사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던 거라면, 그렇다면 지금 둘은 봄의 무도회 날 이후 처음 재회하는 것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 가장 난감한 처지에 놓인 것은 나였다.

둘을 번갈아 살피다가 나는 우선 아델에 대한 해명부터 내놓기로 하였다.

“아델 경은 이전에 보았던 그런 자가…….”

“나는 여인의 손목을 덥석 잡아채는 저런 무뢰배 같은 자를 당신의 곁에 두라 명한 적이 없소.”

“폐하, 무뢰배라니요. 오해십니다.”

해명을 하려 애쓸수록 아델의 대한 경계심만 높아졌다.

하드엘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아델의 여유롭던 표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황후, 지금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오?”

“편을 들어 주는 게 아닙니다. 아델 경은 제게 꼭 필요한 사람이기에…….”

하드엘이 돌연 내게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내 양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꼭 필요한 사람?”

“네.”

“왜 저자가 황후 그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 것이오?”

“제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니까요.”

“…….”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미동도 않고 나를 바라봤다. 좀처럼 그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입을 다문 동안 잠시의 침묵이 이어졌고 아델의 목소리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황후 폐하, 저와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셔야죠.”

아델은 다행히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래, 우선 저 핑계로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

“폐하, 일단 이에 관한 건 다음에…….”

“가지 마시오.”

하드엘의 음성이 귓가에 낮게 울렸다.

돌아서려 했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 단지 그것 하나 때문에.

“폐하, 죄송하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저와 하실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내 어깨를 잡고 있던 하드엘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는 나를 자신의 등 뒤에 둔 채 아델을 향해 말했다.

“나도.”

“네?”

“나도 황후와 나눌 말이 아주 많아. 그러니 혼자 나가거라. 신전 기사단에 대해서는 차후에 따로 얘기하도록 하지.”

“하기야, 저는 황후 폐하의 곁에 종일 머무를 테니…….”

“!”

나는 아델이 뱉은 말에 당황하여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하드엘을 일부로 자극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뭐라 하였느냐?”

“방금 제가 드린 말씀 그대로입니다. 저는 황후 폐하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으니 폐하께서 먼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하지만 신전 기사단으로서 황후 폐하께서 계신 곳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하드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쳤다.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앞으로도 네가 그걸 장담할 수 있을까?”

“신전은 폐하의 것이 아닌 에스타란토의 것이니 장담할 수 있습니다.”

“넌 신전을 나가면 그만이지만 난 황후와 평생을 보낼 사람이야.”

“황후 폐하께서 궁을 나가시기 전까지 제가 신전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드엘이 백금발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그러자 정돈되어 있던 머리가 오히려 흐트러졌다.

“설마 내가 일개 마법사 하나도 어찌하지 못할까 봐?”

둘의 유치한 말싸움에 놀란 것도 잠시, 어느새 나는 완전히 해탈하여 이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갑자기 왜들 싸우는지. 말리고 싶어도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난 왜 쩔쩔매고 있지?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만!”

결국 나는 큰 소리로 그들의 말싸움에 끼어들었다. 그 덕에 둘의 시선은 단번에 내게로 집중되었다.

이때를 노려 나는 차근히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폐하께서 황후궁엔 어쩐 일이십니까?”

“그거야 재판에 관련된 일 때문에…….”

“재판에 관련된 것은 대법관에게 물으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아델 경, 내가 부탁했던 일은 후에 대화를 더 나누고 진행하도록 하죠.”

“네? 오늘이 황후궁 근무인데요?”

나는 당차게 걸어가 밖으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어차피 황후궁은 내 궁이었다. 그러니 해결 또한 간단했다.

“이제 두 분 다 나가 주시겠어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각났지 뭐예요.”

* * *

아델은 못내 아쉬운 듯 황후궁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보다 앞서가던 하드엘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이런 아델에게 다가왔다.

지독히도 찬란한 봄볕이 아무런 표정이 담기지 않아 오히려 섬뜩한 하드엘의 눈가를 또렷이 비추었다.

“앞으로 황후의 눈에 띄지 말거라.”

“제가 황후 폐하의 눈에 띄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불쾌하니까. 이보다 더 한 이유가 필요한가?”

아델은 오래도록 답하지 않았고 하드엘은 오래도록 그의 답을 기다렸다.

지금 이 끈질긴 태도도, 황후궁에서 보여준 행동도 죄다 이상했다. 황제는 마치 질투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분명 황후 폐하를 노골적으로 냉대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했다. 궁내에 모두가 입 모아 말하는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변덕인가?’

아델은 늘 띄우고 있던 미소를 없애고 황제를 바라봤다.

정말 단순히 변덕이 나서 황후 폐하께 이리 구는 거라면…….

가까이서 마주 보았던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연분홍 꽃잎처럼 엷붉던 그녀의 입술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나의 모든 걸 다 내어 주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었고.

상처만 받지 않고 매일을 오늘처럼만 웃어 준다면 정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제국의 황제를 해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뭐든.

아델은 그답지 않게 냉랭한 표정으로 하드엘을 바라봤다. 그리고 굳게 닫았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황후 폐하를 지켜드릴 겁니다. 제 평생을 바쳐. 그러니 저는 단지 그런 이유로 황후 폐하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황후에 대한 충성심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

“그리고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평생을 바쳐 황후를 지키는 건 네가 할 일이 아니야. 앞으로도 변함없이 황후의 옆에 있을 사람은 나니까. 그러니 그것 또한 내 몫이다.”

저자와의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내려 보던 하드엘은 이만 돌아섰다. 그렇게 황제궁에 도착한 하드엘은 여전한 불쾌감에 사로잡힌 채 입을 뗐다.

“넬슨, 당장 장로를 불러와.”

“지금이요?”

“그래, 당장.”

백작은 황제의 명을 받고 급하게 뛰어나갔다.

혼자 남은 하드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끓는 화를 애써 삭이고 있었다.

‘설마 그런 자가 황후의 옆에 있었을 줄이야.’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후 앞에서 웃고 있는 거 하며, 행동, 말투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황후를 바라보던 아델 그자의 눈빛이었다.

떠올릴수록 목이 탔다.

하드엘은 거친 손길로 매고 있던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폐하.”

오래지 않아 문밖에서 백작의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장로께서 오셨…….”

“들여라.”

다급한 부름에 급히 달려온 탓에 장로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자를 신전 기사단으로 임명했지?”

하드엘은 장로의 사정을 배려않고 물었다. 그에 장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신전 기사단이요? 아, 아델 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신전으로 돌아 가는 즉시 그자의 자격을 박탈토록 해라.”

“죄송하지만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뭐?”

“폐하, 아델 경은 마법사로서 그 능력이 뛰어난 자입니다. 지니고 있는 마력의 양까지 풍부하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마법사이죠. 이런 인재가 스스로 신전 기사단을 자청했는데 그만두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전이 그대의 소관이니 내 뜻에 따르지 못하겠다, 이 말인가?”

“아델 경을 내치지 못하는 것이 저의 욕심 때문이었다면 폐하의 뜻대로 하셔도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전 기사단은 황후 폐하와 직결된 문제인 만큼 저도 물러설 수 없습니다. 그는 분명 황후 폐하께 커다란 도움이 될 사람입니다.”

장로의 마지막 말에 그는 멈칫했다.

‘도움이 될 사람…….’

신전 기사단은 곧 황후의 힘이다.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자신이 함부로 내쳐서는 안 되는 게 맞았다.

게다가 플로리아 그대가 원하는 자라면 더욱이 내겐 그자를 내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저번과 같이 에스타란토의 힘이 갑자기 발현되어 황후 폐하께서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신다면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이는 아델 경뿐일 것입니다. 앞으로 다른 신전 기사단이 임명되더라도 그 정도의 실력과 마력의 양을 고루 갖춘 마법사는 없을 테니까요.”

입을 닫은 하드엘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플로리아가 몸을 던졌던 그날을 떠올렸다.

정체 모를 붉은빛에 휩싸여 쓰러져 가는 그녀를 보면서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녀를 안고 뛰는 게 전부였을 뿐.

만약 같은 일이 반복되어 또다시 당신이 위험에 처한다면 그때도 나는 그리도 무력하겠지.

“…두어라.”

“네?”

“아델 경, 그를 신전 기사단에 그대로 두라 하였다.”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장로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하드엘은 장로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그를 향해 단호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단, 황후에게서 아주 멀리 떨어져 보필할 것을 명한다.”

“아주 멀리면 어느 정도를…….”

“스무 걸음.”

“스무 걸음이요?”

“아니, 잠깐. 스무 걸음이면 지금 그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아닌가?”

“예. 대략적으로 그러한 것 같습니다.”

보필이라는 걸 하기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장로는 이를 깨달은 황제가 당연히 거리를 수정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곧이어 이어진 황제의 명은 장로의 바람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건 너무 가까워. 오십 걸음으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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