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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39)화 (39/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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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폐하, 황후 폐하께서 대법관에게 재판을 청구하셨습니다.”

“벌써?”

넬슨 백작의 말에 하드엘은 꽤나 놀란 듯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입가엔 엷은 웃음이 번졌다.

그 모습에 백작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근래에 들어서 황후 폐하의 이야기만 나오면 황제 폐하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저게 무슨 웃음꽃이냐 할 정도로 잔잔한 미소였지만 그가 보기엔 화사하다 못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송곳날처럼 매일이 날카로운 사람이 저리 나오니 기쁜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모두에게 부드러워진 건 또 아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확실한 건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일관 되게 차갑다는 것이다.

“넬슨, 황후궁으로 가자.”

줄곧 별말이 없던 하드엘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이렇게나 갑자기요?”

하드엘은 청색 타이의 매듭을 매만져 바로잡고 벗어 뒀던 조끼를 집어 들었다.

“황제로서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알아야지.”

“아, 그런 거라면 대법관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보고도 올라올 것이고요.”

“넬슨.”

“네?”

얼굴에 감돌던 웃음기를 지우고 하드엘이 백작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잠시나마 온화하던 표정은 무언가에 의해 바스러진 듯 금세 사라져 있었다.

“원래 이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이었나?”

하드엘의 물음에는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영문을 모르는 넬슨은 동그랗게 뜬 눈을 끔벅거렸다.

눈치가 없다는 말은 평생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 반대라면 혹시 모를까.

“무슨 말씀이신지……?”

한심하다는 듯 짤막한 한숨을 뱉은 하드엘이 이만 시선을 거두고 백작의 곁을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 * *

“주드랑의 아내는 안전한 거처로 옮겨 두었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백작 부인은 내가 밤새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소식을 전해 줬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장담하긴 했지만 나 또한 혹시나 일이 잘못될까 두려웠기에 지금껏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의원은 붙여 줬나요?”

“네. 실력이 좋은 의원을 추려 보내놨습니다.”

“수고했어요. 그럼 이제 주드랑에게도 이 소식을 전해 줄래요?”

어제 주드랑은 자신의 아내를 걱정하다 밤을 새웠다. 지금도 불안해하고 있을 게 눈에 훤했다.

“예, 명을 따르겠습니다.”

부인이 공손한 자세로 물러나고, 나는 책상 위에 널브러진 자료들을 훑다 밤새 일해 피로해진 눈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손을 떼고 몇 번 눈을 깜박이자 흐릿해진 초점이 돌아왔다. 덕분에 종이 위 빼곡한 글자가 아까보다 더 선명히 보였다.

나는 다시 차근히 그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이제야 이 사건의 끝이 보인다. 재판만 무사히 열린다면 더 이상의 변수는 없었다.

대법관에게도 속히 재판을 열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으니 못해도 오늘내일이면 남작은 소환장을 받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이대로만 가면 모든 게 순조로웠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렸다. 고개를 들자 앞에 아델이 서 있었다.

“언제 왔어요?”

“방금이요. 불러도 듣지 못하시기에 이따 다시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습니다.”

“미안해요. 머릿속이 좀 복잡해서. 근데 무슨 일이에요?”

“신전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하러 왔습니다. 오늘이 황후궁 근무거든요.”

그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며 답했다.

긴 다리로 성큼 걸어오니 가까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럼 오늘은 종일 황후궁에 있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책방에서 발견한 그 책에 대해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안 그래도 물어볼 만한 사람이 아델뿐이라 언제 오나 했는데.

“마침 잘 왔어요. 안 그래도 기다렸는데.”

“네? 저를 기다리셨어요?”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굉장히 기뻐 보였다.

“물어볼 게 있었거든요.”

“다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우선 서재로 가죠.”

나를 뒤따라오는 아델의 발걸음이 들떠 있었다. 누가 보면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알겠어.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황후 폐하께서 저를 기다리셨다 해서요.”

“아, 그건 단지 책에…….”

“뭐든 좋습니다. 제가 폐하께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아델이 넉살 좋게 생긋거렸다. 그의 천연스러운 태도에 나는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오히려 내가 고맙네요.”

아델을 서재로 들이고, 나는 한 책장 앞에서 여러 책을 훑어 보며 눈으로 연분홍 표지의 책을 찾았다.

루안이 저번에 그 책을 이 책장에 꽂아 두었다 했으니 여기 어디쯤 있을 것이다.

“아, 찾았다.”

너무 튀는 겉모습 덕에 수많은 책 사이에서 그것을 찾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만 책장의 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빼내기에 어려움이 있을 듯했다.

시녀들에게 사다리를 가져다 달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혹시 몰라 한번 손을 뻗어 보았다.

얼추 닿을 것도 같은 높이였다.

손끝으로 책 끝을 툭툭 쳤더니 책등이 튀어나왔다.

“제가 꺼내드리겠…….”

책등을 잡고 빼내 간신히 손에 쥔 책을 품에 안고 몸을 돌린 순간 아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책은 내 품에 있었고 바로 뒤에 서 있던 아델과는 코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누군가를 마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꽤 당황한 건지 날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델 경?”

그는 내 부름에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델과 책장 사이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고 있던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다시 본 그의 얼굴은 저번 책방에서 봤던 것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민망해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를 배려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그나저나 경, 이 책 좀 봐줄래요?”

“폐하, 이 책은……!”

“맞아요. 저번에 마력이 깃들어 있다 했던 그 책. 물어볼 게 있다 했던 것도 이 책에 관련된 거예요.”

“제가 대답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답해드리겠습니다.”

난 책상 앞으로 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그 위에 올려두었다.

“우선, 이 책에 깃든 마력을 없애줄 수 있나요?”

그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합니다.”

“이유는요?”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감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마력이 아닙니다. 더 강한 마력을 지닌 이가 필요해요.”

“그럼 내가 없애는 건 가능한가요?”

“네?”

“내가 에스타란토의 힘을 지니고 있다면서요. 그럼 나는 없앨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혹시 이 책에 깃든 마력이 에스타란토의 힘보다도 더 강한가요?”

“아니요. 에스타란토의 마력보다 더 강한 마력은 없습니다.”

“근데 왜 안 된다는 거죠?”

“황후 폐하께서는 아직 힘을 깨워내지 않으셨잖습니까.”

“그거라면 방법이 있어요. 내가 다칠 뻔할 때 잠시 에스타란토의 힘이 발현된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 내가 그때처럼 위험에 처해 마력을 깨우면…….”

“절대 안 됩니다.”

“실제로 다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난 괜찮아요.”

“아니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매번 웃던 그가 드물게 표정을 굳혔다. 아델은 내 말에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반응했다.

“폐하께서 위험에 처할 때 이를 보호하기 위해 힘이 발현된 것은 그 순간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죠. 그래도 위험에 처하겠다고 하신다면 저 또한 죽을 각오로 이를 말릴 것입니다.”

“…아델 경, 혹시 화났어요?”

“네, 화났습니다. 폐하께서 자꾸 위험에 처하려 하시니까요.”

하기야, 아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진짜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땐 마력을 없애기는커녕 내 목숨만 위태로워질지도 모른다.

그래, 천천히 하자.

책의 마력을 없앤다 한들 내가 원하는 걸 알게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으니까.

우선 에스타란토의 힘이 깨어난 뒤에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다.

‘아, 잠깐!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플로리아는 깨어나려는 에스타란토의 힘을 견디지 못해 죽어 갔다.

그런데 애초에 내게 마력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러면 에스타란토의 힘이 깨어날 때 어느 정도 그에 대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책에 깃든 마력은 그다음에 내 힘으로 없애면 되는 것이었다.

“아델 경, 그럼 내게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나요? 이건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잖아요.”

“앞서 하신 말들을 무르신다면 얼마든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려고 물어보는 거예요.”

“말씀만으로는 안 됩니다. 다신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 주셔야 합니다.”

“약속할게요.”

그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반짝이는 보라색 빛이 부드럽게 나를 감싸왔다.

놀란 내가 그 빛에 손을 대려 하자 그것은 뿌연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방금 뭘 한 거죠?”

“보호 결계를 만든 것입니다.”

“보호 결계?”

“이게 저와의 약속입니다.”

양 볼에 보조개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그가 환하게 웃었다.

“내가 느끼기엔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요?”

몸 곳곳을 살폈지만 이전과 똑같았다. 도대체 무슨 보호 결계를 만들었다는 건지 궁금해 열심히 그 흔적을 찾고 있을 무렵 문밖에서 루안이 나를 불렀다.

“폐하, 들어가도 될까요?”

“그럼요. 들어와요.”

루안의 걸음에선 어째서인지 약간의 조급함이 묻어났다. 그 이유는 그녀의 다음 말에 의해 곧바로 밝혀졌다.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폐하께서 오셨다고요?”

산책에 이어 황후궁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미움을 받더라도 옆에서 받아야겠다는 말이 이런 의미인 줄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일전에 봄의 무도회의 일이 떠올라 나는 아델과 문밖을 번갈아봤다.

‘그날 하드엘이 아델을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것 같은데.’

아니,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정도가 아니라 거의 죽일 듯이 쳐다봤었던 것 같다.

둘이 만나도 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지만 얼마 안 가 나는 이것이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걸 깨달았다.

신전 기사단을 명한 게 하드엘이다. 그렇다면 둘은 이미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진짜 걱정은 정작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보면 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상상만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한숨 같은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루안, 우선 폐하가 계신 곳으로 가죠.”

서재에서 나오고 몇 걸음도 가지 않아 하드엘이 보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황후.”

그런데 이상하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 갔다.

‘왜 저런 표정이지?’

안 좋은 일이 있나 생각할 정도의 표정도 아니었다. 차게 식은 두 눈에는 강한 위협감이 서려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줄곧 내 뒤를 향했다.

“멈춰라.”

하드엘이 살갗이 아릴 정도로 서느런 음성을 내뱉었다. 그것은 내가 아닌 나를 뒤따르던 아델을 향한 것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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