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뭐, 뭐 저런!”
황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남작은 그제야 석상처럼 굳어 있던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는 황후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뒤늦게 불같이 화를 냈다.
“내게 감히 그딴 말들을 지껄여?”
아무리 황후가 되었어도 저 여자가 몰락 귀족 출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황후라는 신분을 앞세워 나와 내 딸을 농락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자신이 그런 황후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전에 보았을 때는 분명 저런 성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알아서 고개를 숙여줬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겁까지 상실한 거야? 하, 뭐라고? 조끼처럼 형편이 없어? 이 조끼가 얼마짜린데!”
감히 저딴 몰락 귀족이 자신에게 수치를 주다니. 거슬리다 못해 치가 떨렸다. 도대체 어떻게 대갚음해 줘야 하지?
남작은 짜증을 가득 담아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손에 들고 있던 두툼한 서류봉투가 구겨졌다.
“안 돼! 폐하께 드릴 재산 내역서가!”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린 남작은 황급히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폈다.
그러다 돌연 남작의 얼굴에 야비한 웃음이 감돌았다.
“아차,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황제 폐하가 계시잖아. 황후를 너무나도 싫어하는 황제 폐하가.
봄의 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 사이에서 한때 황제가 황후와 함께 춤을 췄다는 놀랄 만한 이야기가 떠돌기는 했지만 헛소문일 게 확실했다.
사실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일 것이다.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으니.
가끔 궁에 왔을 때 남작은 황제가 황후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실제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적이 있었다.
황제는 황후에게 관심도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쩌다 황후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제가 황후를 싫어할 거라는 자신의 판단을 확고히 믿었다.
‘폐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면 지금 황후를 만난 이야기에 어떤 살을 붙여야 할까나.’
“기다려라. 기고만장해진 태도를 단번에 꺾어 주지.”
남작은 아까보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황제궁을 향해 신이 난 발걸음을 내디뎠다.
“폐하를 뵈옵니다.”
남작은 하드엘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머리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부른 이유는 알고 있겠지?”
작위 부여와 관련된 일이라는데 설마 내가 모를 리가.
“예, 폐하. 지체하면 폐하께 혹여나 누가 될까 모든 일을 제쳐두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내가 그동안 제국에 대한 남작의 기여를 너무 낮게 평가한 듯싶어서. 이례적인 일이지만 마땅히 공을 치하해 줄 생각이네.”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스러울 따름입니다.”
미소를 띤 남작이 깍듯하게 답하자 하드엘은 남작의 뒤에 있던 시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황제의 뜻을 알아차린 시종이 곧바로 남작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져온 문서를 넘겨라.”
한결같이 냉랭한 목소리로 황제가 명하자 남작은 제 손에 들린 문서를 짧게 바라봤다.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도박장에서 벌어들인 돈은 다른 수입원 기록에 조금씩 더해 적어 뒀으니까.
애초에 작위 부여와 관련되어 서류를 제출하는 것이라면 사실상 필요한 건 자산 총액뿐이었다.
재산 내역서에 포함된 상세한 기록은 자신의 자산 총액을 알리는 것 말고도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형식적인 기록 정도였다.
‘분명 자세한 기록까지 훑을 일은 없겠지.’
남작은 그렇게 생각을 정돈하며 마음속에 껄끄럽게 자리하던 불안감을 완벽히 지워 냈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나를 눈여겨보고 계셨을 줄이야.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이 믿기지 않아 그는 남몰래 몇 번이나 감격했다. 오늘을 위해 어제 하루 동안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모른다.
소문이 크게 날 만한 곳을 찾아 기부금을 보냈고, 영지 소작농과 사용인에게 밀린 급료도 지급했다. 무려 자신이 직접 그 모든 일을 순식간에 해냈다.
스스로가 대견스러워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 무렵이었다.
“우두커니 서서 뭐 하고 있지?”
“죄, 죄송합니다.”
재촉하는 황제의 말소리에 그는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슬그머니 내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서둘러 시종에게 넘겼다.
그렇게 제출된 문서는 곧바로 황제의 손에 쥐어졌다.
“좋은 쪽으로 잘 살펴보도록 하지.”
“저로선 감읍할 뿐입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게.”
벌써 나가 보라니? 아직 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은 상태였다.
“폐하!”
나가라는 말에 마음이 다급해진 남작이 앞뒤는 생각 않고 무작정 황제를 불렀다.
“내게 더 할 말이 남았나?”
“그것이… 사실 황후 폐하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후?”
하드엘은 남작의 입에서 황후라는 말이 나오자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됐다! 남작은 그런 황제를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후라는 말만으로도 벌써부터 저렇게 기분 나빠하다니. 어쩌면 눈에 거슬렸던 황후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폐하의 총애까지 얻을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랐다.
남작은 주저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방금 전 근처에서 황후 폐하를 뵈었는데 그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으시기에 무슨 일이 있으신지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황후 폐하께서 황제궁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시더니 고개를 내저으시지 뭡니까. 그래서 재차 여쭈었더니…….”
자신이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도 내뱉는 듯 주위를 살피고 목소리를 낮추는 행동은 섬세하기까지 했다.
“폐하께서 매일 같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면 모두 자신을 탓하여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라 하시는 겁니다. 게다가 입에 담기에도 두려운 말을 서슴없이 하시는데 대부분이 폐하를 욕보이는 말인지라 감히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남작은 살짝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은 아까보다 더 차갑고도 싸늘했다.
계획대로 되어 가기는 하는 것 같은데 어쩐지 등에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으스스한 오한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네?”
황제의 반문에 깜짝 놀란 남작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서 그대는 가만히 있었는가?”
“당, 당연히 저는 그런 불손한 말을 듣고만 있을 수 없어 폐하께 이 무슨 불충한 말이냐. 아무리 황후 폐하라도 안 되겠다. 당장 폐하께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대수롭지 않게 웃으시며 만약 제가 그리한다면 황궁에 시녀로 있는 제 딸아이를 곁에 두고 괴롭힐 거라고 협박하셨습니다.”
황후를 추궁해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황후가 아니라 우겨도 어차피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의 말을 믿지 않을 테니.
‘…그런데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시지?’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남작의 말이 끝나고도 하드엘은 한참을 침묵했다.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당장이라도 황후를 불러오라 할 줄 알았던 남작은 의아함에 고개를 조금 더 들어 황제의 얼굴을 살폈다.
하드엘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남작.”
그가 입을 열었다. 분노를 삼킨 듯 낮게 가라앉은 황제의 목소리에 남작은 절로 간담이 서늘해져 왔다.
“지금 스스로를 죽여 달라 애원을 하는 것인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남작이 허둥대며 하드엘의 눈을 피했다.
이럴 리가 없었다. 황제라면 당장 그 여자를 벌하겠다 나오는 게 맞았다.
그는 급하게 자신이 한 말들을 되짚어 보았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도대체 뭐가 문제야!
아무리 떠올려도 실수한 것은 없는 것 같았지만 우선 그는 다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폐, 폐하.”
“일개 남작 따위가 황후를 욕보여?”
“폐, 폐하! 저는 단지 폐하를 위해……!”
“당장 그 입 다물어라.”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음성이 무겁게 울려 퍼졌다.
하드엘은 남작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턱을 당겨 고개를 들게 했다.
그에 남작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와들와들 떨렸다.
“저는 황후 폐하와 나눈 이야기를 그, 그, 그대로 전달했을 뿐입니다! 커헉!”
“정녕 혀가 잘리고 싶은 것이냐?”
하드엘은 남작의 턱을 잡고 있던 제 손에 악력을 가했다. 그 탓에 남작은 캑캑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조용히 있었으면 이따위의 난잡한 일도 없었을 것을.”
“폐, 컥!”
“오늘은 이쯤 해 두지. 조만간 다시 봐야 하는데 몸을 상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드엘이 몸을 일으키며 그의 턱을 내던지다시피 놓아 주었다.
남작은 고개가 돌아간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어 몸의 중심도 가누지 못한 채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생생히 느껴지는 위압감에 감히 무슨 행동을 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더러운 입에서 황후의 이야기가 또 한 번 나온다면 그땐 이 자리에서 네가 직접 네 혀를 내놓고 가야 할 것이야.”
하드엘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남작은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전에 필사적으로 황제를 향해 납작 조아렸다. 머릿속에는 작위 부여고 뭐고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는 걸 확인하고서도 남작은 일어설 수 없었다.
전신을 옥죄어 오는 공포와 두려움이 다리를 굳게 만들었다. 게다가 조만간 다시 봐야 한다는 황제의 마지막 말은 그에게 더한 불안을 심어 주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도와드릴까요?”
마침 지나가던 시종이 바닥에 붙어 있는 그를 향해 말을 걸어 주었다.
“됐네! 필요 없어!”
창피함을 느낀 남작은 그제야 두 다리로 바로 설 수 있었다.
그는 눈치를 살펴가며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황제궁의 출구를 찾아 걸었다.
‘잘못된 거야.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어. 왜 불똥이 내게! 우선 며칠간은 쥐 죽은 듯이 숨어 지내야겠어.’
* * *
“황제 폐하께서 이걸 보내셨습니다.”
루안의 손에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분명 아까 남작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었다.
‘벌써?’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봉투 안에 있는 문서를 꺼냈다.
한 장 한 장에 참 정성스럽게도 베르시트 남작 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난 앉은 자리에서 기록들을 꼼꼼히 읽어 갔다. 역시 도박장에서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돈은 죄다 다른 수입원에 나눠 기재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 부분은 조사를 시작하면 기재된 액수와 원래의 액수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루안, 폐하께 잘 받았다고 전해 주세요.”
“그렇게만 전하면 될까요?”
“고맙다고… 그 말도 덧붙여 전해줘요.”
“네!”
도박장에서 가지고 온 상세 기록도 있고, 인장이 찍힌 재산 내역서까지 얻었으니 이제 증인만 있으면 완벽했다.
내겐 그들에게 변명할 여지조차 줄 수 없는 확실한 증인이 필요했다.
“폐하.”
루안이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내게 다가왔다.
할 말이 있는 듯 보여 나는 보고 있던 재산 내역서를 내려놓고 백작 부인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죠?”
“찾았습니다.”
“찾았다니요?”
“일전에 주드랑이라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라 명하셨잖아요. 그자가 누구인지 찾았습니다.”
주드랑을 찾았다니! 틀림없이 내겐 엄청난 희소식이었다.
“누구라던가요?”
“평범했습니다. 그저 식료품이나 일상 물품 같은 것을 파는 잡화상이더라고요. 주변 사람들 말로는 꽤 성실한 사람이었다고들 하고요. 그리고 근래에 도박장 출입은 없었습니다. 아 참, 아픈 아내가 있다고도 들었어요.”
“아픈 아내? 그럼 지금 어디에 있는 지도 알 수 있나요?”
“네.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인.”
“예, 폐하.”
“사람을 시켜 주드랑이라는 자를 궁으로 불러와줘요.”
“궁으로요?”
나는 백작 부인에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네, 궁으로. 호위를 붙이되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데려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