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34)화 (34/164)

16609261420763.jpg 

#034

아까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와 다시 보니 책방의 구조가 익숙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갑자기 뭔가 떠올라서요.”

어디서 봤지? 어디서…….

순간, 원래 세계에서의 기억 일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그 중고 책방!

이곳은 플로리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바로 그 문제의 책을 발견했던 중고 책방과 너무나도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아니, 이건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억에 남을 만큼 특이하게 배치되어 있던 책장의 구조부터 세세한 소품까지.

우연이라기엔 지나쳤다.

나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세요?”

“잠깐 확인할 게 있어요.”

“확인이요?”

분명 구조상 여기쯤인데.

나는 한 책장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연분홍색 겉표지를 발견하고는 얼어붙었다. 정확히 같은 자리에 내가 찾던 그 책이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여기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눈앞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것을 펼쳤다.

백지? 이럴 리가 없는데?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일일이 확인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책에 글씨라고는 단 한 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거예요?”

아델은 이런 내가 몹시 걱정스러웠는지 빠르게 다가와 내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자리에 서서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차분히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아델 경, 지금 당장 궁으로 가요.”

심각해진 표정 탓인지 아델은 더 이상의 것을 묻지 않고 내 말을 따라 주었다.

책방에서 나가기 전, 나는 연분홍 책을 책방 주인 앞에 내밀었다.

“이 책 사겠습니다. 얼마죠?”

“…이걸 산다고요? 안에 보셨어요? 불량이에요.”

“네. 알고 있어요.”

책방 주인은 내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쓸 데가 없을 텐데? 그럼 그냥 가져가요. 어차피 이번에 정리할 때 버리려던 거니까.”

“폐하.”

책방을 나오자마자 아델이 나를 불러 세웠다.

뒤를 돌아봤을 때 그는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책과 무슨 연관이 있으신 겁니까?”

“왜 그러죠?”

“책 안에 마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마력?

“보통 마법사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마력입니다. 아니,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마력이죠.”

“혹시 누구의 마력인지도 알 수 있나요?”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이 책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이 정도의 마력을 걸어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애초에 보통 책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 책 때문에 내가 아벨리움이라는 세계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고 발단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서 눈을 뜨기 직전, 스스로를 수호자라 칭한 자는 그런 말을 했다. 아벨리움에서의 기억은 에스타란토의 기억과 함께 이 책에 가둬져 있을 거라고.

‘정체 모를 마력이 책의 내용을 모조리 지워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그의 말에도 처음부터 오류가 있었다.

‘애초에 나는 아벨리움에서의 기억이 없는데.’

그가 가둔다는 아벨리움에서의 기억은 나의 것이 아닌 오로지 플로리아의 것이었다.

그런데 수호자라는 자는 왜 내게 와서 그런 말을 했을까. 어째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더더욱.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마차가 힘껏 내달리는 내내 나는 창 너머로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끝없는 질문만 이어지는 사이 마부는 별궁의 근처에서 마차를 세웠다.

나는 아델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에서 가볍게 내려섰다.

“여기서 헤어지죠.”

아델은 내명에도 좀처럼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아닙니다. 제가 황후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직 신전 기사단이 공식화된 것도 아닌데 사람들 눈에 자주 띄어서 좋을 건 없습니다. 그러니 나 혼자 돌아가겠어요.”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나는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그를 뒤로 한 채 먼저 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가다 보니 떠오른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구나.

몇 걸음 안 가 뒤를 돌아봤을 때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아델 경, 오늘 고마웠어요.”

그는 소리 없이 빙긋이 웃었다. 정말 구김 없이 밝은 사람이었다. 보기만 해도 편해지는 그런 사람.

“제게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폐하를 보필하기 위해 제가 신전에 들어온 것이니까요.”

믿을만한 사람이어서 다행이야.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어서 들어가라 말하며 다시 몸을 틀었다.

“폐하!”

황후궁 근처에 다다르자 루안이 보였다. 그녀는 멀리서 나를 발견하자마자 아연실색하여 달려왔다.

“루안, 무슨 일이에요? 왜 나와 있어요?”

“어떡해요, 폐하.”

루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걸 그녀는 억지로 참아 내고 있었다.

“침착하고 천천히 말해 봐요.”

“그게 황제 폐하께서 몇 시간째 기다리고 계시…….”

“황후.”

루안의 말이 끊기고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드엘, 그의 목소리였다. 하드엘이 왜 황후궁에…….

그는 날 빤히 응시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하드엘의 얼굴엔 안도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폐하께서 왜 여기에 계십니까?”

내 질문에 그가 핏물이 도는 듯한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기다리고 있었소.”

날 기다렸다고?

“어딜 다녀오는 길인지 묻지 않겠소.”

시녀들을 모두 물린 황후궁에서 나와 하드엘이 마주 보고 섰다.

날 내려다보는 회색빛 눈동자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도박장에 관한 일은 내게 맡기고 그만 손을 떼시오.”

역시, 알고 왔구나. 어떻게든 알아냈겠지. 하드엘, 당신이라면.

“싫습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그러자 하드엘이 내게 한 발짝 다가오며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시녀들을 벌하도록 하지.”

“그녀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들을 벌하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나는 발끈하여 언성을 높였다.

아무 잘못이 없는 시녀들을 벌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나도 잠자코 있을 순 없었다.

“잘못? 당신이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을 때 말리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이오.”

“제가 위험한 게 폐하와 무슨 상관이죠?”

잇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위험? 하드엘 네가 경계하는 건 도박장 문제를 해결하고 내가 얻게 될 민심일 테지.

날 경계하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니 이제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가 조금은 달라진 게 아닐까 생각했던 나 자신에게.

요즘 따라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하드엘을 보며,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은연중에 그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바보같이…….

“제가 민심을 얻고 지지를 얻는 것이 그렇게도 두려우십니까, 그게 폐하의 자리를 위협해서?”

“뭐?”

“모르실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폐하께서는 항상 저를 권력의 끝으로 내모셨죠. 제가 힘을 얻지 못하도록. 자,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억지로라도 절 막으실 생각이신가요?”

나는 격해진 감정에 그를 원망하는 말들을 쏟아 냈다.

플로리아의 몫이어야 했을 말들임을 알지만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드엘은 아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이런 나를 바라봤다.

어떤 동요도 없는 그와 마주할수록, 그가 내게 뱉을 다음 말을 생각할수록 내 마음은 텅 빈 듯 허전해졌다.

하드엘, 당신이 아무리 막아도 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 나는 힘을 키워 나와 내 사람들을 지킬 거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하드엘, 그는 계속해 침묵했다. 그렇게 입을 다문 채 한 걸음, 두 걸음 내 코앞까지 걸어왔다.

그러고선 나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쥐었다.

“놓아 주십시오.”

“내가 두려운 것은…….”

가까이서 본 그의 눈에 슬픔이 차올랐다. 아무 동요도 없다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이 엉켜 있었다. 그 어떤 감정도 또렷하게 하나가 되지 못해 헤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내 앞에 와서야 자신의 회색 눈에 슬픔만을 남겨 놓은 것이었다.

하드엘은 지금 자신이 어떤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내가 두려운 것은 그런 것이 아니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당신이 위험에 처하는 것. 지금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그뿐이야.”

내가 위험에 처하는 것이 두렵다고?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지 않았다.

“폐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이 제게 어떤 뜻으로 들리는지 알고 계십니까.”

“플로리아.”

하드엘은 처음으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부드럽고도 애달픈 음성이 내 귀에 꽂혔다.

“이렇게 그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나는 제국 지존의 자리를 버리기로 하였소.”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너무나 이상했다. 플로리아를 증오했던 사람이 이토록 한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단지 플로리아의 내면이 바뀌어 흥미가 동한 거면서 잔혹하게 플로리아를 짓밟고 지키게 될 그 자리를 버린다고?

말도 안 돼.

“신전 기사단이 공식화되는 날, 모두가 이를 알게 되겠지.”

“신전 기사단이라면… 설마 폐하께서 명하신 일이었나요?”

“그렇소.”

하드엘이 황제의 자리를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토록 지키려 애쓰던 자리를 버리고 내 아래에 서겠다고.

분명 기뻐해야 맞는 건데. 이제 그는 날 죽게 버려둘 수 없다며 환호성이라도 내질러야 하는데.

왜 이렇게 허무하고 슬플까.

“이렇게나 쉽게 버릴 자리였나요?”

“아니.”

“…….”

“만약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에스타란토라고 나타났다면 나는 끝내 그자의 목을 베어서라도 내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겠지. 그것은 나의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당신이기에, 지금 이렇게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에스타란토가 아니라 그저 플로리아 당신이기에 그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거짓말 같은 하드엘의 한 마디에 가슴이 뛰었다. 나의 무엇이 그를 이렇게나 변하게 만든 걸까.

하지만 그 두근거림이 죄책감으로 바뀐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는 깨달았다. 하드엘을 향한 이 마음이 플로리아의 감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결국 내 핑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지금 죄책감이 드는 이유는 딱 하나, 이 감정이 나의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아무리 소설이라고는 하나 하드엘이 플로리아를 죽게 버려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플로리아의 몸을 빌린 내가 이런 마음을 가져선 안 되는 것이었다.

난 어깨 위에 있던 하드엘의 손을 매몰차게 쳐냈다.

“황후.”

하드엘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난 주먹을 질끈 쥐었다.

지금 내가 두려운 것은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 그뿐이었다.

“저를 마음에 품었다 하셨나요.”

“플로리아.”

“그만.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폐하께선 저를 마음에 품으실 수 없습니다. 적어도 폐하께선… 그러실 수 없습니다.”

“내가 그대를 가슴에 품었다 하여 당신이 나를 보아 주는 행운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오.”

“아니요. 처음부터 제게 이런 고백을 해선 아니 됐습니다. 절 미워하던 폐하의 마음이 이렇게 쉽게 변해서도 아니 됐습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

“저를 매정하게 버려두셨기 때문에, 온갖 더러운 소문이 떠도는 것을 보고만 계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고 플로리아의 죽음을 방치했기 때문에.

나는 무너져 내리는 그의 표정을 보고도 외면하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가 주세요.”

차갑게 쏘아붙였지만 가슴은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아렸다. 누군가 마구 짓뭉개는 듯한 느낌에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오늘 일은 잊겠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저를 대하실 땐 이전처럼 대해 주세요. 저 또한 그럴 것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