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자료실이… 찾았다!
자료실을 찾아 안쪽으로 들어오니 도박장의 중심부와는 달리 확연히 사람이 없었다.
여기서 자칫 내부인을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내쫓기거나 추궁당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 확실했다. 더욱 서둘러야만 했다.
-달칵. 달칵.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문고리를 돌렸지만 자료실의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혹시나 열려 있지 않을까 싶어 먼저 확인했는데. 역시나.
“잠겨 있어요.”
“그럼 이제 어찌할까요?”
“위험하겠지만 우리가 열쇠를 훔쳐야 해요.”
“제가 열까요?”
직접 연다고? 무슨 수로?
내가 놀라 반문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문에 자신의 손의 가져다 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잘칵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듯이 너무나도 쉽게.
아, 이 사람 마법사 맞구나. 이런 걸 할 수 있으면 진작 좀 알려 주지.
나는 잠시 허탈하게 웃으며 아델을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냥 함께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쓸모가 있다니 영광입니다.”
그는 와중에 한결같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내게 허리를 굽혔다.
다급한 건 나뿐인가 싶었는데 그의 행동이 나보다도 재빨랐다. 순식간에 아델은 자료실의 문턱을 넘어섰다.
“어서 들어오시죠.”
어쩌다 보니 그가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방 안에 들어섰다. 뒤를 도니 수많은 책장이 보였다. 그 책장에는 정체 모를 문서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다.
“찾으시는 문서가 이 많은 자료들 중 하나입니까?”
와, 하고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며 아델은 감탄 아닌 감탄을 쏟아 냈다.
“네. 그런 셈이죠.”
“이 사람들, 여기서 뭐 하나 없어져도 아무것도 모르겠는데요?”
실제로 자료실 안에 놓인 자료들은 그 양이 너무나도 방대했다. 아델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다 저들 나름의 규칙대로 정리했을 테니 없어진다면 눈치는 챌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최대한 늦게 눈치채도록 시간을 끌어야겠죠.”
나는 어깨를 감싸 허리까지 내려오는 숄 안에서 숨겨온 책 하나를 꺼냈다.
아델은 미간을 모아 가며 내 손에 들린 책을 유심히 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내가 만든 문서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눈속임용이죠.”
찾고자 하는 문서가 어디 있는지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운 좋게 정보를 얻어 미리 알아낸 덕분이었다.
난 망설임 없이 두 번째 책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책장의 오른쪽 맨 위에서 내가 찾던 문서를 엮어낸 책을 뽑아냈다.
그것은 내가 품에서 꺼낸 책과 겉모습이 똑같았다.
“무엇이 없어졌다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겁니다. 나는 그동안 일을 해결해야겠죠.”
나는 말을 마치고 책장 한구석의 허전한 빈자리를 눈속임용 책으로 메웠다. 그러고선 몸을 돌렸는데 이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델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요?”
“멋있으셔서.”
“그런 말을 굉장히 스스럼없이 하네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고맙긴 한데 시간이 없으니 우선 빨리 나가죠.”
-터벅
나무 널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누가 오고 있나?
가까이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쉿! 조용히.”
나는 아델을 멈춰 세우고 문 너머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내부인이 이곳에 들어오려 하는 거면 큰일이었다.
“주드랑은 요즘 왜 안 오는 거지?”
“그러게. 한참 푹 빠져서 들락거리더니.”
“아니, 이렇게 발길을 뚝 끊을 수 있었으면 진작 좀 끊지.”
대화를 들어 보니 다행히 내부인은 아닌 듯싶었다.
그런데 주드랑? 어디에서 많이 들어 본…….
‘아! 출입 명부에서 본 그 이름!’
주드랑은 하드엘을 찌른 괴한과 베르시트 남작 사이의 유일한 접점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니면 이익을 볼 때 발을 빼던가. 매번 따내는 판돈도 엄청나던데 꼭 다 잃어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원. 보는 내가 안타까워 죽겠다니까.”
“맞아. 나라면 딱 거기서 멈출 텐데.”
“도박 중독인 거지 뭐.”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에이,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 아무튼 덕분에 남작만 좋겠네.”
“아, 그러고 보니까 그 사람도 안 보이네?”
“누구?”
“그 바람잡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주드랑한테 돈을 얼마나 뜯겼다고. 판돈만 엄청 걸어서 사람 혹하게 하더니.”
“맞아 나도! 이상하게 바람잡이랑 주드랑만 끼면 매번 지더라?”
“에이, 생각하니까 괜히 또 억울하네. 안 되겠다. 오늘 잃었던 돈은 따고 가야지. 한 판 더?”
“물론!”
저들이 말하는 남작은 분명 베르시트 남작일 것이다. 바람잡이는 누가 들어도 그 괴한이고.
머릿속에서 남작과 괴한, 주드랑 이 셋 사이의 관계가 점차 뚜렷해지고 있었다.
“간 것 같은데요?”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고 말소리 또한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아델이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 것 같죠?”
우리는 사람이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문까지 원래대로 잠그고 나서야 자료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가는 문을 모조리 막아! 판돈으로 걸었던 보석이 죄다 없어졌어!”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람?”
“천박하게 누가 도둑질을!”
그런데 밖에서는 예상치 못한 소란이 일고 있었다.
한 귀족 여인의 고함에 도박장의 내부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큰일입니다. 일이 터진 모양이에요. 모든 출구를 막고 있습니다.”
나와 아델은 그 탓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어쩌지? 지금 나가야 하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이런 식의 위기는 상상도 못 했던지라 나 또한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하필 다 와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지금부터 몸수색을 시작하겠습니다. 남성분들은 오른쪽, 레이디들께서는 왼쪽으로 줄을 서주십시오. 불가피한 일이니 모두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몸수색이라니 절대 안 돼. 이제 와서 발각될 순 없어.
나는 숄 안에 숨기고 있던 상세 기록 문서를 더욱 꼭 품었다.
“어쩌죠?”
“경, 지금부터 내가 숫자를 셀 거예요.”
“숫자요?”
“저기 보이죠?”
난 지금 서 있는 위치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출구를 가리켰다. 겉보기에 연약해 보이는 이들 두 명이 그 출구를 막고 서 있었다.
어차피 도둑은 안에 있을 테고 난 이 상황만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셋을 셀 때 뛰는 겁니다.”
“뛴다고요?”
“하나.”
“정말?”
“둘.”
그런데 바로 그때, 거구의 장정 한 명이 줄을 서지 않고 있는 방황하는 나와 아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셋을 세면 늦는다.
그 생각이 머리에 스치자마자 나는 아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미친 듯이 내달렸다.
“잡아!”
험악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리고 그 목소리만큼이나 험상궂은 이들이 우리를 쫓았다.
아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더니 그들을 향해 수상한 손짓을 보냈다.
“으악! 뭐야!”
그러자 뒤쫓던 이들이 춤을 추듯 휘청이더니 곧바로 우르르 넘어졌다.
입이 벌어질 정도로 진기한 광경이었지만 숨이 차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지. 더 이상 뛰기엔 역부족이야.
아델은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잡혀 있던 손목을 빼냈다. 그러고는 도로 내 팔을 잡아 어딘가로 날 이끌었다.
“쫓아오는 사람들은 없죠?”
아델은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네, 없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난 멀쩡해요. 품 안에 있는 것도 멀쩡하고. 그러니 이제 내 팔 좀 놔 줄래요?”
“죄, 죄송합니다.”
그가 화들짝 놀라며 조심스레 내 팔을 놓았다. 아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더워요?”
“아니요?”
“얼굴이 빨개서.”
“하하, 지금 생각해 보니 더운 것 같기도 하네요.”
나는 숨을 고르다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아델을 마주하고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듯 속절없이 넘어지던 아까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방금 전 그것도 마법인가요?”
“네? 그거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넘어뜨린 거 말이에요.”
“아, 맞습니다. 아주 단순한 마법이죠.”
“그럼 도박장에서 날 밀친 여자를 넘어뜨린 것도 그대군요. 뭔가 이상하긴 했어요.”
“그건… 황후 폐하를 보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잘했어요.”
“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 말을 되물었다.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진 않았는데.
“왜 그러죠?”
“그동안 보아 왔던 황후 폐하의 성정대로라면 괜한 자를 다치게 했다며 저를 다그치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왜요? 정확히 말하자면 괜한 자는 아니죠. 그리고 날 위해서 한 일이 아닌가요?”
“그건 맞습니다.”
“그럼 됐어요. 사실 나도 통쾌했거든요. 그냥 참고 지나가기엔 억울했던지라.”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양 뺨에 보조개가 깊이 파일 정도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끅끅거리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정말… 예측이 불가하신 분입니다.”
예측이 불가하다?
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그 속뜻을 곰곰이 생각했다.
“나쁜 건가요?”
내 물음에 그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좋은 겁니다. 적어도 제게는.”
아델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긴장이 풀려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불규칙하던 숨소리도 원래대로 제 호흡을 찾아가고 있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다 싶을 때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디지?’
뒤늦게 주변을 살피니 곳곳에 책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게 보였다. 오래된 서적의 쾨쾨한 냄새가 가득 찬 이곳은 이름 모를 책방이었다.
책방 안에 손님이라곤 아델과 나 둘뿐인 듯 주위가 한산하기만 했다. 심지어는 주인조차 손님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런 책방은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여기가 숨기 좋거든요. 가장 가깝기도 했고요.”
“많이 숨어 봤나 봐요.”
“가끔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아벨리움의 지리는 다 제 손바닥 위에 있다고.”
그가 내 눈앞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쫙 펼쳐 보였다. 일부러 지어내는 거만한 표정까지 곁들여 가며.
나는 그런 아델을 보고 미소 지었다. 그가 나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진정이 됐어요. 그럼 이만 나갈까요?”
“벌써요?”
아델의 입이 비쭉 나왔다.
“벌써라니요? 더 이상 쫓는 이들도 없는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 아! 책방!”
책방?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쉬우니 이 책방이라도 구경해 보시는 게 어때요?”
“괜찮아요. 난 전혀 아쉽지 않은데.”
“제가 아쉬워서 그럽니다.”
“아, 책을 구경하고 싶었나요?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요.”
“그건 아니지만…….”
아델의 시선이 나의 어깨 부근에 머물렀다.
그는 무엇을 발견하고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 또한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겨 내 어깨를 내려다봤다. 언제 묻었는지 모를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델은 나보다 먼저 손을 뻗더니 자신의 손으로 직접 내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그리고 이후 할 일을 끝낸 듯 다시 물러났다.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이은 건 그다음이었다.
“책을 구경하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그런 걸로 치겠습니다.”
그가 잔잔한 미소를 띠웠다. 난 알 수 없는 말에 픽 웃어넘기며 책장 사이를 거닐었다.
“황실 도서관과는 많이 다르네요. 특히 이런 책들은 황실 도서관엔 없는데.”
나는 여러 종류의 책들을 일일이 꺼내 넘겨보았다.
『백작 영애의 발칙한 사생활』, 『이성을 사로잡는 12가지 비밀』 등 제목도, 내용도 자유분방했다.
“법전이나 마법서만 가득한 황실 도서관과 이곳은 애초에 다른 세상이죠. 이런 작은 책방은 규율에 얽매이지 않으니까요.”
다른 세상이라.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책방을 훑어보다 문득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