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집무실에 앉아 있는 하드엘은 평소와 달리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백작은 한낮에 어두운 기운을 뿜어대는 하드엘을 불렀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가 보통 때보다도 더욱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대외 정책과 기사단 창설을 위한 보고가…….”
“나중에.”
하드엘의 명에 넬슨 백작은 곧바로 가져온 서류들을 시종에게 넘겼다. 요즘 들어 황제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우선시하던 중요한 보고들까지 미룬 것으로 보아 보통 일은 아닌 듯싶었다.
‘폐하를 괴롭게 할 만한 현안들이 있었던가? 아니면 대외적으로 우리 아벨리움의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 생겼었나?’
“아무래도 날 피하는 것 같아.”
“예?”
철저하고 냉철한 황제가 고민에 잠겼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생각하던 넬슨이 희미한 중얼거림에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폐하, 저에게 하신 말씀이신가요?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다. 아무것도. 이만 나가 보거라.”
고충을 털어놔 주시는 걸까 기대하던 넬슨은 금방 실망하여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넬슨의 정갈한 말투에선 이와 같은 실망감이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네, 폐하. 그럼 아까 말씀드린 대외 정책과 기사단 창설을 위한 보고는 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무슨 보고?”
“대외 정책…….”
“아니, 그 뒤에.”
“그 뒤라면 기사단 창설을 위한 보고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그거.”
넬슨 백작은 하드엘의 반응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런 백작을 보며 하드엘은 아까부터 고민하던 문제의 정답을 찾기라도 한 사람처럼 한층 밝아져 입을 열었다.
“서류를 가져간 시종을 당장 다시 불러들여라.”
“다시요?”
“중한 사안이 아니더냐.”
“네. 그럼 서류를 가져오는 대로 바로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서류를 받아 황후궁으로 갈 것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황후에게 기사단 창설에 대한 사실을 알려야 할 게 아니냐. 그리고 황후와 관련된 것인 만큼 직접 서류를 검토하게 할 것이다.”
“폐하, 그런 것이라면 번거롭게 걸음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마침 보고 드리려던 것이 그것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황후 폐하께서는 이미 신전 기사단에 대해 알고 계십니다. 가장 먼저 신전 기사단으로 임명된 마법사가 황후 폐하께 며칠 전 인사를 올렸다 합니다.”
“그래. 잘되었구나. 그래도 가져온 서류는 황후가 직접 검토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 황후궁으로 가야겠다.”
“서류라면 제가 따로 사람을 시켜 전달토록…….”
“넬슨.”
하드엘의 냉랭한 목소리에 백작이 몸을 움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두 번 말하지 않아. 내가 직접 간다.”
황제를 발견한 황후궁의 기사들이 자세를 바로하고 길을 열었다.
“폐, 폐하! 폐하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직접…….”
“황후에게 내가 왔다 전하거라.”
하드엘을 마주한 황후궁 시녀들은 그의 말 한마디에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녀들의 얼굴빛은 새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뭐 하고 서 있는 것이냐.”
하필 황후궁 주인이 자리를 비운 지금,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가 찾아올 줄이야.
“그것이…….”
다른 시녀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한 걸음 앞서 나왔다. 그녀는 자리에 있는 시녀들과 달리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송구하지만 황후 폐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하드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샤티아 백작 부인을 비롯한 황후궁 시녀들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굳게 닫혀 있는 황후궁 침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폐하께서 찾아오셨다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황후가 자고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하드엘은 더 이상 백작 부인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닫힌 문을 빤히 보던 시선 또한 거두었다.
“넬슨, 이만 가지.”
“예, 폐하.”
시녀들은 돌아서는 황제를 보며 속으로 저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황제에게 거짓을 고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이던가.
긴장하기로는 마샤티아 백작 부인도 마찬가지였던 지라 그녀도 다른 시녀들처럼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폐하, 이 서류는 어찌할까요?”
발걸음을 돌린 하드엘을 뒤따르던 넬슨이 물었다.
그는 대답을 하는 대신 황후궁 시녀들의 떨리는 목소리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표정을 곱씹고 있었다.
분명 평소와 달라.
“폐하? 왜 그러세요?”
완전히 황후궁을 빠져나가서야 하드엘은 백작의 물음에 입을 열었다.
냉랭하게 식은 목소리에는 남들은 모를 초조와 불안이 담겨 있었다.
“넬슨, 지금 당장 황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
“네?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침실에…….”
“거짓이다. 저들은 지금 내게 거짓을 고하고 있어.”
* * *
“아! 이게 얼마 만의 자유인지!”
궁 밖에 나온 아델은 거리를 거닐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 정도라면 폐부 깊숙한 곳까지 활기찬 광장의 공기가 들어찰 것이다.
‘밖에 나오는 걸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생기가 넘쳐 보였다.
나는 그런 아델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흘겨보았다.
“혹시, 신전 일을 하기 싫어 나를 보필하겠다고 핑계를 댄 건 아니겠죠?”
“설마요.”
상당히 합리적인 의심을 부정한 그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기야 내 사람이라고 내 앞에서 맹세까지 한 이가 그럴 리가.”
나 또한 그의 능청스러움 받아 천연스럽게 답했다.
아델은 내 말을 듣고 나와 잠시 눈을 맞추더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신전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유를 포기할 각오는 했습니다.”
“사명감이 대단하네요. 이렇게나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보다 제게 더 중요한 것이 생겼거든요.”
“중요한 것? 그게 무엇인데요?”
“그것은…….”
“잠깐!”
“왜 그러십니까?”
“저기.”
나는 손가락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아델은 하려던 말을 잇지 못한 채 내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도박장이네요.”
이렇게 빨리 찾을 줄이야. 좀 더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실제 지도만 보았을 때는 찾기 힘들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걱정하기도 했고.
에스카의 제과점과 루블리아 의상실이 있는 히볼르 3가의 골목을 지나야 보인다는데 그곳을 내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유명한 음식점 못지않게 길게 늘어선 줄 덕에 쉽게 찾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참으로 기이한 장면입니다.”
“그러게요.”
아이를 등에 업고 온 여인부터, 해진 옷을 입은 노인, 호기심 가득한 눈을 지닌 청년까지.
도박장에 출입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은 참으로 가지각색이었다.
연초부터 돈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건 아닌가 보다.
“가죠.”
나는 도박장을 향해 걸음을 뗐다. 그러자 지금까지 나와 보폭을 맞추며 걷던 아델이 큰 걸음으로 나를 앞지르더니 돌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왜 그래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았다니까.”
그는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길을 내어 주었다.
그런 아델의 얼굴에서 날 걱정하며 마음을 졸이고 있을 황후궁 시녀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히 돌아가야 했다.
“서두르죠. 빨리 줄을 서지 않으면 오늘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겠어요.”
역시나, 한 시간이 지나도 줄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박장 내부가 사람으로 가득 찬 건 지금 내게 유리한 일이었지만 이렇게나 오래 기다려야 하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처음이십니까?”
기다림에 지쳐가던 중, 처음 보는 낯선 이가 갑자기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차림새로 보건대 도박장의 내부인 같았다.
“네. 처음입니다.”
그는 나와 아델을 위아래로 훑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천천히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
나는 그에 긴장감을 감추려 애썼고 아델은 앞에 있는 자를 경계하며 위급 시 당장이라도 품에 있는 검을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잠시 이쪽으로 오시죠.”
다행스럽게도 아델의 검은 쓸 데가 없었다.
시선을 거둔 도박장의 내부인이 이쪽이라며 가리킨 곳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테두리가 금빛으로 장식된 문은 원래 들어가려 했던 입구보다도 훨씬 특별해 보였다.
이제 알겠다. 저자는 내 차림새를 훑어본 거였구나.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따로 다른 입구를 안내해 준 거였어.
나는 여유를 되찾고 아델과 함께 그를 따랐다.
“두 분은 이 출입구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 앞으로 편히 올 수 있겠네요.”
다시 올 일은 없겠지만.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행운이 가득 따르시길 바랍니다.”
남자가 정중히 인사를 건네며 허리를 숙였다.
나는 아델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도박장의 내부로 들어섰다. 부디 행운이 따라야 할 텐데…….
“아델 경, 주변이 어두우니 날 잘 따라와요.”
“제가 앞에 서겠습니다.”
“아니요. 이곳의 내부 구조는 내가 더 잘 압니다.”
도박장은 창문을 모두 막아 빛 한 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 이러한 구조는 이들의 전략인 듯싶었다.
내부를 밝혀 주는 불빛이 있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전체를 환하게 밝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사람들의 흥을 더욱 돋우는 모양이었다.
웃음소리와 떠드는 말소리가 여기저기서 한데 뒤엉켜 들려오는 이곳은 여느 장터보다도 더욱 소란스러웠고 시끌벅적했다. 심지어는 싸우는 소리도 묻힐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러면 필요한 문서를 찾아 빠져나가기는 쉬울 테니.
“으, 짜증 나! 재수 없게 돈도 다 잃고. 거기 앞에! 비켜!”
그때, 느닷없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여자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대며 걸어오더니 날 밀쳤다.
피할 겨를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중심을 잡지 못해 잠시 휘청거리는 나를 뒤에 선 아델이 붙잡았다. 덕분에 바로 설 수 있었다.
“아델 경, 고마…….”
“악!”
“?”
가까이서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 소리에 놀란 나는 아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다 말고 몸을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방금 날 밀치고 지나간 여자가 우스꽝스럽게 넘어져 있었다.
밀쳐진 건 난데 어째서 멀쩡히 가던 저 여자가 넘어진 거지?
그런데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넘어진 여자를 바라보는 아델의 표정이었다.
가끔씩 진지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만날 때마다 예쁘게 웃는 모습만 보여 주던 그였다.
넘어진 여자를 서느렇게 바라보는 아델은 그간 내가 보아온 아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아델 경?”
그는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방긋 웃어 보였다.
이는 내가 원래 알던 그의 모습이었다.
“좋은 것만 보셔야죠.”
아델은 내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그러더니 넘어진 여자와는 반대로 방향을 틀게 했다.
방금 전에 그 눈빛은 뭐였지? 주변이 어두워서 내가 착각을 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