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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31)화 (31/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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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아델의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나는 눈앞의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나 때문에 그간 불쾌하고 심란했다, 이 얘길 하고 싶은 건가? 그것도 저렇게 예쁘게 웃는 얼굴로?

처음 봤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만 조금 이상한 남자였다.

‘그나저나 도박판의 상세 기록 문서를 직접 가서 찾으려면 서둘러 내부 구조 파악하고 계획을 짜야 하는데.’

직접 들어가서 몰래 가져오는 일이니만큼 큰 위험이 뒤따를 수 있었다. 위험할수록 계획은 치밀해야 했고.

우선, 뭐든 이 남자부터 빨리 돌려보내고 생각해 봐야겠다.

“그나저나 신전 일이 바쁠 텐데 내가 너무 오랜 시간 세워 둔 거 아닌가요? 이만 돌아가 보세요.”

“네? 어디로요?”

“?”

어디라니, 당연히 신전으로 돌아가라는 소리지.

“신전으로요.”

“아 참, 제가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안 드렸군요.”

“인사라니, 갑자기 또 무슨…….”

아델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뜬금없이 기사의 예를 갖추었다.

나는 당황하여 미간을 구긴 채 그를 쳐다보았다.

“뭐죠?”

“아델 페르제 듀크, 오늘부로 신전 기사단의 일원으로 명 받았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걸고 폐하께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자, 잠깐만요. 뭐라고요? 신전 기사단?”

“네. 앞으로 황후궁과 신전을 오가며 생활할 것입니다. 오늘은 황후궁에서 황후 폐하를 보필할 예정이고요.”

나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상황을 파악해갔다. 아무래도 긴 얘기가 필요할 듯싶었다.

“루안, 물 좀 가져다줄래요?”

“네!”

루안이 물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신전 기사단이라는 이야기는 다 들렸을 텐데 그녀의 반응은 의외로 침착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나를 대했다.

우선 나는 앞에 있는 물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녀들보다도 당장은 앞에 있는 이에게 물을 것이 너무나 많았다.

“누가 이런 명을 내렸다고요?”

“신전 일은 오로지 장로님의 권한입니다.”

“그러니까 장로가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다는 건가요?”

신전 기사단이라니.

아무리 하드엘이 요즘 이상해졌다지만 이런 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설득하려고…….

신전 기사단이 꾸려진 것은 내가 내 입으로 에스타란토가 황후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닌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건 그냥 내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겠다는 의미였다. 이러다 괜히 명만 재촉하는 거 아니야?

“네. 장로님께서 명하신 일이기는 합니다. 아, 물론 가장 먼저 기사단에 들어온 것은 저의 뜻이고요.”

“그대의 말에 의하면 다른 기사들은 아직 임명되지 않았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신전 마법사의 마력을 시험해 적합한 이들이 선발되는 대로 신전 기사단이 공식화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당장은 저뿐인 것이죠.”

아직은 비공식이다, 이 말이었다. 하드엘의 귀에 소식이 들어가지 않은 건 그래서인가 보다.

“그러면 그대는 마력 시험을 남들보다 빨리 통과한 건가요?”

“아니요. 저는 시험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방금 마력을 시험해야 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예외의 경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장 먼저 임명될 수 있었죠.”

“예외?”

“마력의 양이 남다르거든요, 제가.”

그가 내 질문에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지금까지의 대화 내내 긴장하는 구석이라고는 없는 사람. 손짓, 표정 하나에도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마력의 양이 남다르다고 스스로가 말할 정도면 어느 정도라는 거지?’

어쨌든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단, 그가 내 편임이 확실시될 때만.

* * *

“부인.”

“예, 폐하.”

오늘부터 황후궁 근무라는 아델은 필요할 때 언제든 불러 달라는 말을 남기고 보통의 기사들이 황후궁 입구에 서 있는 것과는 달리 침실 바로 밖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나는 그런 그를 두고 방금 전 아델과의 대화 자리에 함께 있던 시녀들을 따로 불러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신전 기사단이라는 단어를 듣고도 이상할 정도로 태연했던 그녀들의 태도에 대해 이유를 묻기 위해서였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에게 물으면 답을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 신전 기사단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왜 놀라지 않았던 거죠?”

루안과 백작 부인을 비롯한 황후궁 시녀들의 현재 반응을 보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상했다. 분명 루안도 플로리아가 에스타란토라는 사실을 훗날에야 알고 놀랐는데. 이것 또한 운명이 바뀐 건가?

“실은, 저희 모두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눈치채고 있던 게 맞았구나. 그런데 언제부터… 아!

“궁 밖에서 내가 쓰러진 날, 그때부터이군요.”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 사이에서 내가 붉은빛을 뿜어냈다는 목격담이 떠돌고 황후궁에 장로까지 찾아왔던 그날.

항상 나와 함께 있던 시녀들이라면 뭔가를 짐작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난 왜 지금껏 깨닫지 못했을까.

“폐하, 걱정 마세요. 저희는 이 모든 것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백작 부인의 말에 동의하며 루안도, 다른 시녀들도 저들끼리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지금까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건 자신들의 생각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곤란해질까 봐, 나를 위해 입을 열지 않은 거였다.

내가 걱정되어서.

“난 그대들을 믿습니다. 고마워요, 다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 걸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그녀들을 보자 주먹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속 깊은 곳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번만은, 최소한 이번만은 이 사람들을 지켜 주고 싶었다.

플로리아 때문에 장로를 포함한 이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옥에 갇히고 슬픔에 빠지는 일은, 적어도 그런 일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강해져야겠다.

나를 위해서, 내 사람들을 위해서 반드시.

* * *

며칠 뒤.

이른 오전부터 황후궁은 조용히 북적이고 있었다. 나의 출궁 준비 때문이었다.

백작 부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단장을 도와주던 루안 또한 내키지 않는 손길로 느릿하게 내 머리에 장신구를 올려 주고 있었다.

“부인, 벨리타 영애의 행적은 어떻던가요?”

“지난 나흘간 칸제로스 공작저에 방문하고,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구매한 게 전부라고 합니다. 특별히 수상한 행적은 없는 듯해요.”

칸제로스 공작저? 그렇다면 레이샤를 만났단 이야기인데.

하긴, 벨리타는 워낙 레이샤를 좋아하고 따르니까 공작저에 놀러 갔다 해서 이상할 건 없지. 의상실도 옷을 사러 간 것이라고 하니 문제 될 것이 없고.

백작 부인의 말대로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우선은 계속 지켜봐 줘요. 그리고 수상한 행적을 보이면 곧바로 내게 보고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폐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백작 부인은 내가 궁 밖에 나갈 채비를 마쳐 가는 것을 보며 출궁을 간곡하게 만류하기 시작했다.

사실 어젯밤부터 부인과는 내내 출궁 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절대 나가시면 안 된다’, ‘난 무조건 가야 한다’, 이 팽팽한 접전이 오늘까지도 계속되는 것이었다.

“도박장에 직접 가시다니요.”

“가야 합니다. 몰래 빼내 오는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저를 시키시면…….”

“그러면 그대가 위험에 빠지잖아요. 그리고 이건 내 일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기사도 없이 홀로 나가시는 것은 아니 됩니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믿고 함께할 수 있는 기사는 없었다. 더군다나 잠입인데 기사들을 거느리고 간다면 그것만큼 대놓고 들어가는 잠입이 또 어디 있을까.

“기사들 중 딱 한 분만이라도 동행을…….”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아델 경?”

제 모습을 드러내며 그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분명 오늘은 신전 근무라 했었는데?

“죄송합니다. 일부로 들으려던 것은 아닌데 바깥문이 조금 열려 있는 바람에.”

시녀들이 단장을 위해 방과 방을 오고 가면서 문을 열어 둔 모양이었다.

큰일이다. 그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거지?

‘설마 벨리타 이야기부터 들은 건가?’

지난번 기사들과 시녀들에게 아델을 보면 굳이 내게 알리지 말고 곧바로 안으로 들이라 한 게 잘못이었다.

기사단이 완전히 공식화된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말이 나오지 않게 한다는 게 지금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오늘 신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죠?”

“잠시 인사를 드리고 싶어 들른 것입니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나요?”

빙빙 돌려서 물어봤자 도움 될 것이 없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방금 들은 이야기 모두를 기억에서 지우겠습니다.”

“다 들었다는 얘기군요.”

“대신 오늘 폐하께서 가시는 곳에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날 협박하는 건가요?”

“아니요. 걱정하는 겁니다.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나는 인상을 쓰고 그를 올려다봤다.

날 걱정? 저 말이 진심일까? 서로 통성명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싫습니다.”

내가 거절하자 그는 절절한 눈빛을 보냈다. 정말 날 따라가고 싶은 눈치였다.

지금 그의 모습은 딱 문 앞에서 함께 나가자 애원하는 강아지 같았다.

“제가 의심스러우십니까?”

“솔직한 답을 원해요?”

“네.”

“믿지 못합니다. 아직은.”

“폐하, 저는 신전의 일원입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확실히 신뢰하기엔 마주한 시간이 너무나 짧았죠.”

“어떻게 해야 믿어 주시겠습니까?”

그의 눈이 너무나도 진실되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혼자 나가겠다는 나의 결심이 조금은 흔들렸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기사를 동행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가는 것을 끝까지 말릴 것이었고, 어차피 기사를 한 명 데려가야 한다면 당연히 아델이 적임자였다.

의도치 않게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까지 들어 버렸기도 했고 그의 말대로 그는 신전의 사람이었으니까.

“폐하께서는 궁 밖 지리에 약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궁 밖에서 생활하며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아벨리움의 지리는 다 제 손바닥 위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아델은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나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장점을 마구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어 보니 말하는 족족 모조리 맞는 말이었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도 사실 지리였다. 지도를 외웠다고는 하나 그 넓은 곳에서 헤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델은 마법사이니 뭔가 도움이 돼도 될 것이었다.

“믿어 주세요. 맹세코 저는 폐하만의 사람입니다.”

“확실해요?”

“네. 확실합니다.”

내 질문에 그가 돌연 표정을 바꾸고 대답했다.

누가 보면 신전에서 치르는 신성한 주술 행위에 앞서 엄숙하고 고결한 마음을 품기라도 한 줄 알 것이다.

“저기… 폐하, 단장이 끝났습니다.”

“고마워요.”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델을 그 자리에 세워 둔 채 창가로 걸어가 좁은 창틀 틈에 앉아 있는 알링에게 인사를 건넸다.

“알링, 다녀올게.”

알링은 조그마한 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어서 나는 시녀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녀올게요.”

그리고 그녀들의 답을 듣기 전에 마지막으로 멀뚱히 서 있는 아델을 보며 말했다.

“뭐해요? 보필하겠다면서, 어서 출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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