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저 사람 또 왔네.”
“비를 피하는 것도 아니고 매일같이 가게 앞을 저렇게 막고 있으면 장사를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안 되겠어. 내가 한마디 해야지.”
가게의 여주인은 호언장담하며 앞장서는 남편의 등짝을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렸다.
“왜 때려!”
“주변을 좀 봐 봐!”
“주변? 주변은 봐서 뭐해?”
여주인은 혀를 끌끌 차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나 눈치가 없어서야. 요새 우리 가게에 왜 이렇게 여자 손님들이 많게? 죄다 저기 서 있는 남자 보려고 온 거잖아!”
“왜?”
“왜긴 왜야! 딱 보면 몰라? 잘생겼잖아.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럼 방해꾼이 아니라 복덩이인가?”
“그렇지!”
“근데 저 사람은 왜 우리 가게 앞에 서 있대?”
“그거야 모르지. 하루 종일 두리번거리는데 누굴 찾는 것 같기도 하고.”
“다리 아플 텐데 의자라도 주고 올까?”
“의자는 무슨 의자야. 부담스러워서 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럼 파이를 좀 가져다줄까?”
“그래! 파이 좋다. 스카비오사 파이로 새로 만들어 줘. 내가 가져다드릴 테니까.”
갓 구운 파이를 든 남자가 당당히 앞으로 나가자 여자가 툭툭 치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에 스카비오사 파이를 넘겨주는 남자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내가 가고 싶었는데!”
남편의 울상에 개의치 않고 가게 여주인은 한 손에 파이를 든 채 거침없이 나아가 가게 문을 밀었다.
딸랑. 문 위에 달아놨던 종이 맑은 소리를 내자 아델이 무심코 돌아봤다.
여주인은 그를 보고 상냥하게 웃으며 들고 있던 파이 조각을 건넸다.
“드세요. 저희 집에서 가장 잘나가는 스카비오사 파이입니다.”
“이걸 왜 제게…….”
“가게 수익에 큰 도움을 주시니 감사해서요.”
“네?”
아델이 어리둥절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사이 가게 여주인은 그의 손 위에 무작정 파이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
“그냥 받을 수 없습니다. 값을 지불하겠습니다.”
“호호, 그냥 시식용이에요. 편히 드시고 부디 아주 오래 머물다 가세요!”
여주인은 오래 머물다 가라는 말에 유독 힘을 주며 말하고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델은 반강제로 받아든 파이와 여주인이 사라진 자리를 황망히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파이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시나몬 가루와 부드러운 과육, 보랏빛 잼이 어우러져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때마침 요 근래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실 때마침 생각났다 말하기도 새삼스러웠다.
아델 스스로도 그녀가 이제 막 생각난 것인지 아니면 쭉 그녀를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지 헷갈리는 참이었다. 하지만 둘 중 무엇이라도 좋았다.
그녀가 웃는 모습도 이 파이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울 것 같다. 그는 그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문득 초조하게 주변을 둘러보게 된 건 그 이후였다.
그녀가 선명해질수록 그는 조급해져 갔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 오래 있지 못하는데……. 아, 신전에 위치를 들키지만 않았어도! 그냥 확 가지 말까?’
잠시 진지하게 고민하던 아델은 결국 땅이 꺼져라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지. 이번에 안 가면 또 귀찮게 할 게 뻔해. 차라리 이 기회에 담판을 지어야지. 레이디, 부디 일찍 제 눈앞에 나타나 주세요. 제발…….’
* * *
“장로님, 아델 그 녀석이 오고 있습니다!”
창에 기대어 그 너머를 지켜보고 있던 마법사 한 명이 멀리서 힘없이 걸어오는 아델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 장로에게 달려왔다.
장로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 문을 바라보고 섰다.
“고얀 놈. 드디어 모습을 보여 주는구나.”
잠시 후, 신전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델은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왔느냐.”
“신전 계단은 마법으로 어떻게 편하게 못 바꿉니까? 숨이 차서 죽을 뻔했습니다.”
아델은 문에 기대어 헉헉거렸다. 장로는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살아생전 이 녀석을 이렇게 신전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아델이 신전을 떠난 지도 어언 15년. 아끼던 제자를 이곳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장로에게 오늘은 무척이나 특별하고 의미 있는 날이었다. 그러니 장로가 그의 등장을 반가워하는 건 당연했다.
“너 같이 허약한 마법사들 운동시킬 방법이 이것뿐이라. 그런데 넌 인사하는 방법도 잊은 것이냐? 표정은 왜 이리 죽상이고?”
“제 귀중한 시간을 빼앗겨서 죽상인 겁니다. 어쩌면 오늘은 만날 수도 있었는데…….”
아델은 들고 있던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만나? 누굴?”
“아실 필요 없습니다.”
장로는 아델이 내려놓은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근데 저 상자 안에 든 모자는 뭐냐?”
“장로씩이나 되는 분이 이런 데에 마력 쓰지 마십시오!”
“내 선물은 아닐 테고, 설마 네가 쓰려고 산 건…….”
“당연히 아니죠! 그런데 제게 하실 말씀이란 게 무엇입니까? 신전 마법사들까지 풀어 절 찾으신 걸 보면 대충 짐작은 됩니다만.”
“신전으로 다시 돌아오거라.”
“역시 또 그 이야기십니까? 사람을 보내실 때마다 제가 몇 번이고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제 답은 같…….”
“와서 내 자리를 물려받아.”
“네?!”
“물론 당장은 아니지. 내가 죽으면 네가 내 뒤를 이으란 뜻이다.”
“설마 몸이 안 좋으신 건 아니죠?”
아델이 돌연 표정을 바꿔 걱정스럽게 물었다. 장로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는 눈빛에 염려가 묻어났다.
그에 장로가 태연하게 미소 띤 채 입을 열었다.
“아직 건강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마법사들도 많잖아요. 왜 제게…….”
“그야 네 마력이 강하니까. 장로의 자리는 앉고 싶다고 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자리를 맡을 수 있을 만한 마력을 지녀야 하지. 그런 이는 너뿐이다, 아델.”
“싫습니다.”
아델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예상했던 답이었기에 장로는 큰 감정 변화 없이 그를 설득하려 들었다.
“에스타란토의 붉은 별을 타고나신 분이 계셔. 넌 아벨리움의 제국민으로서, 신전 에스타란토의 일원으로서 그분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어.”
“지켜야 할 분이라면 황후 폐하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장로의 표정이 사뭇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가 가늘게 눈을 뜨며 미간을 좁히고 앞에 선 아델을 쳐다봤다.
“모르셨어요? 폐하께서 에스타란토라는 소문이 궁 밖에 자자합니다. 오늘 궁에 와 보니 궁 안도 마찬가지인지 기사들이 저들끼리 떠들고 있더라고요. 일전에 황후 폐하께서 붉은빛을 뿜어내는 걸 봤다나? 아무튼 전 마법사든, 장로든 관심 없습니다. 신전을 나간 지 오래니 더 이상 에스타란토의 일원도 아니고요.”
“…그래. 네 말대로 황후 폐하께서 에스타란토이신 것이 맞아. 그토록 기다려 왔던 분이 이렇게나 가까이에 계시지. 그분을 보필하는 건 우리에겐 큰 축복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내가 부탁해도 너의 선택은 바뀌지 않는 것이냐?”
“저는 목숨 바쳐 누굴 지키거나 하는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럴 마음도 이유도 없고요.”
아델의 답을 들은 장로는 깊디깊은 한숨을 쉬며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네 생각이 정 그러하다면 더 이상은 나도 어쩔 수 없구나. 이만 가 보거라. 더 이상 귀찮게 안 하마.”
“귀찮게 안 하겠다는 그 약속! 이번에는 꼭 지켜 주셔야 합니다!”
힘이 쭉 빠진 장로와는 반대로 아델은 무척이나 신이 나 보였다. 그는 다급하게 상자를 챙겨 순식간에 떠날 채비를 마쳤다.
장로는 그런 아델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아까워라.”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좋거든요.”
다시 돌아가 그 영애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마음이 급한 아델은 신전을 빠져나오자마자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축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광장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서둘러야 했다. 왠지 모르게 오늘이 아니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아델! 왜 이렇게 걸음이 빨라! 내 얘기는 들은 거야?”
아델의 옆에서 나란히 걷던 신전 동기는 그의 걸음을 따라잡다가 이내 나무랐다.
“아, 미안, 미안. 뭐라고 했어?”
“너 장로님 부탁 또 거절한 거냐고! 벌써 세 번이나 물어봤다!”
“거절했지. 알잖아, 나 이런 일에 관심 없어. 따분해.”
“그러지 말고 그만 돌아와. 신전에 너만 한 인재가 없어.”
“왜 없어? 너 있잖아.”
“마력 자체의 크기가 다르잖아. 그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능력도 천지 차이고. 어릴 땐 잘 몰랐는데 신전에서 수련하고 연구하다 보니까 알겠더라. 그때 장로님이 왜 그렇게 네가 신전에서 나가는 걸 반대했는지 말이야.”
아델은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동기의 어깨를 두드렸다.
“사탕발림에 넘어갈 생각 없다.”
“하, 너도 참.”
“얘기 끝났지? 나 이만 가 볼게.”
“뭐? 오랜만에 만났는데 진짜 그냥 간다고?”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럼 잠깐만! 아주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봐. 내가 너 온다고 스카비오사 파이를 좀 구웠거든? 그거 너 줄게.”
“뭐? 스카비오사 파이?”
“응. 왜?”
다들 파이를 주는 걸 보면 오늘따라 먹을 복이라도 터진 모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그 파이 네가 직접 구운 거야?”
“내가 구운 거라고 방금 말했잖아. 매일 같이 신전에서 일만 하다 보니 취미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파이 굽는 법을 좀 배웠어. 원래 내 연구실에서 그동안 너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라도 나누면서 같이 먹으려고 한 건데.”
서운한 듯 자신을 흘겨보는 동기를 보며 아델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쉽네. 그런데 그 파이 그냥 안 받으면 안 될까? 네가 만들었다니까 뭔가 불안해.”
“불안……? 너 이거 안 받아 가면 내가 지금 당장 올라가서 장로님께 너를 다시 설득해 보자고 말할 거야!”
잠깐만 기다리라 한 동기는 몇 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아델은 제자리를 맴돌았다.
“빨리 가야 하는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설마 여기 온 사이에 그 영애가 상가 앞을 지나가진 않았겠지?
아델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엿보였다. 그는 손에 든 작은 상자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불안함을 드러냈다.
그때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동기가 사라진 방향과는 다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지만,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런 건 생각지 않고 서둘러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동기를 대신해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뒷모습조차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쏟아지는 봄 햇살 아래에서 또렷이 보이는, 흔치 않은 붉은빛 머리칼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설마…….’
그리고 잠시 뒤 홀린 듯 그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와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그의 심장도 점점 더 세차게 뛰었다. 얼핏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말도 안 돼.’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이름도 모른 채 몇 날 며칠을 기다리던 그녀가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왜 진작 황궁 내의 무도회를 떠올리지 못했을까.
궁 밖에서만 그녀를 찾으려 애썼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아델은 떨리는 손을 감춘 채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환한 빛줄기보다도 밝은 웃음을 자신의 얼굴에 띠우고 망설임 없이 그녀를 불렀다.
“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