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그런데 들려온 답은 예상과 달랐다. 그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그런 하드엘의 손 위에 살포시 내 손을 얹었다. 그를 닮아 닿으면 얼음같이 차가울 것만 같았던 손은 보기와 다르게 꽤 따뜻했다.
무도회장의 중앙에 서자 모두가 물러섰다. 악사들도 황제의 등장에 곡을 바꿔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아하면서도 웅장한 곡조가 홀 안에 퍼져갔다.
하드엘은 내 허리를 감싸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나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몸과 몸이 맞닿았다.
“긴장하지 마시오.”
* * *
“죄송해요. 많이 아프세요?”
“아니오.”
그는 난감한 표정을 겨우 숨기고 있었다.
‘아닌데, 아플 텐데.’
왜냐면 춤을 추는 동안 내가 몇 차례나 그의 발을 밟았으니까.
하드엘의 회색빛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눈 주위가 방금 전보다 조금은 퀭해진 것도 같았다.
나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틈틈이 춤을 연습했던 건데 오늘 보니 그 노력은 모두 허사였나 보다.
이런 볼품없는 실력으로 무도회장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다니. 하드엘과 춤을 추었던 방금 전 장면을 회상하니 조금은 창피해졌다.
주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내 실력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들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은 황제가 황후와 함께 춤을 췄다는 사실. 오로지 그거 하나뿐일 것이다. 바로 그 사실이 플로리아의 입지에 조금은 도움이 될 테고.
나도 그걸 노리고 하드엘에게 먼저 춤을 추자 제안한 거였다.
“어! 레이샤 공녀님이다.”
“어디?”
“세상에, 어쩜 저렇게 아름다우실 수가…….”
하드엘과 무도회장의 코너에 들어서는데 한 남자의 넋 나간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에 장 내의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졌다.
레이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보이지 않았지. 뒤늦게 참석했나 보구나.
옆에서 중얼거리던 남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레이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와 하드엘을 향해 우아하게 고개를 살짝 숙였고 곧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레이샤의 사소한 움직임은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에겐 한없이 날카롭기만 했던 귀족들이 그녀의 앞에서는 무장 해제되었다.
하기야 저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명문가의 귀족 영애를 어느 누가 싫어하겠느냐마는.
“인사가 늦었습니다. 양 폐하를 뵈옵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나와 하드엘을 번갈아 보았다.
단아하게 땋아 올린 흑단과도 같은 검은 머리가 그녀와 참 잘 어울렸다.
“공녀는 오늘도 아름답네요.”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황후 폐하 앞에서…….”
그녀가 시선을 낮춰 수줍게 웃었다.
내가 남자였다면 레이샤에게 이미 수백 번은 반했을 텐데.
나는 무심코 하드엘을 올려다보았다. 지루함에 가까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가 보였다.
“황후 폐하?”
“아,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모쪼록 오늘 이 봄의 무도회가 공녀에게 즐거운 하루를 선물해 줬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자리를 피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하드엘은 돌아서자마자 방금 전 그 표정이 무색하게도 내게 말을 걸어왔다.
“황후, 아까는…….”
“폐하, 잠시만요!”
그러나 다급하게 하드엘을 붙잡는 레이샤의 목소리에 의해 그의 말이 끊겼다.
하드엘이 차갑게 돌아섰다.
“무슨 일이지?”
레이샤는 그의 냉랭한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다소곳하게 그를 향해 다가섰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소곤댔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며.
나랑은 상관없는 말인데, 분명 상관없는데. 누군가 달궈진 쇠꼬챙이로 마음을 들쑤시기라도 하는 듯 가슴 속이 뜨겁게 쓰라렸다.
“매무새가 흐트러지셨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녀가 하드엘의 옷깃을 향해 손을 뻗었다.
“…….”
나는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이것도 플로리아의 감정일까. 스스로 질문을 던졌지만 이전처럼 그렇다는 확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
어이가 없게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가 저 남자를 좋아하게 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헛된 착각에 빠져 있는 건지.
‘이젠 정말 모르겠어…….’
-탁!
그 순간, 하드엘이 레이샤의 손을 쳐 냈다. 그녀의 손은 어색하게 허공에 머물렀다.
“손대지 말거라.”
-삐
느닷없이 이명이 들려왔다.
차디찬 그의 음성 뒤에 알 수 없는 기억들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송구합니다. 단지 꽃잎이 붙어 있기에…….’
‘허락 없이 손대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