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루안이 이끄는 곳에는 스위츠와 푸딩, 여러 종류의 과일로 만든 젤리와 음료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위에 올라간 장식을 세세하게 살피며 점검하고 있는 사이 루안이 불쑥 잔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폐하, 이 음료 드셔 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마침 그냥 무도회장을 돌아다니기엔 손이 허전했던 탓에 나는 투명한 음료가 담긴 잔을 기꺼이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마시자 달콤하면서도 화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당도가 더 높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었는데 음료에 내 의견이 잘 반영되어 있었다. 급하게 변경하는 바람에 걱정했는데.
“맛있네요.”
“그렇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 케이크도 가져와 볼게요!”
“그래요.”
“소문과 많이 다르던데?”
그렇게 잠시 루안을 떠나보내고 그녀가 건네준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시려는 때였다.
등 뒤에서 숙덕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탓에 그들은 자신들의 뒤에 누가 왔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악녀에 추녀라 하더니.”
“솔직히 아까 걸어오는데 멍하더라니까.”
“맞아. 그런 아름다움이라면 명성이 나고도 남았어야 했는데. 역시 악녀라느니 하는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우리 같은 시골 귀족이 황후 폐하를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나저나 요즘 에스타란토가 황후 폐하라는 소문이 돌던데. 진짜일까?”
“어머, 뭣들을 모르시네.”
그들의 대화에 앙칼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 또한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겉모습이 아름다우면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참 단순하시군요.”
“누, 누구?”
“데보니안가의 벨리타 영애시잖아!”
“데보니안?!”
그들의 반응에 벨리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후 폐하가 에스타란토이니 뭐니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만 하고 계시다니. 황후 폐하께서 기억을 잃으신 거 다들 아시죠?”
“알다마다요.”
“그럼 그게 모두 거짓이라는 건요?”
“예?”
“어떤 건 기억하고 또 어떤 건 기억을 못 하신다고 하시니…….”
“세상에, 그렇게 기억을 잃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니 거짓이라는 거죠!”
뒤늦게 돌아와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루안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케이크를 들고 그들을 향해 매섭게 돌진하려 들었다.
나는 그런 루안의 손을 꽉 잡으며 그녀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나 역시 비아냥거리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치밀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고작 이런 말들에 휩쓸려 이성을 잃고 나선다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터.
그렇게 된다면 내일 신문 1면에는 황후가 무도회장에서 패악을 부렸다는 자극적인 가십 기사가 실릴 것이다. 그동안 힘들게 준비한 무도회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왜 그런 거짓말을?”
“황제 폐하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러시는 것일 수도 있죠. 아아, 불쌍하신 황후 폐하. 그래서 이렇게 화려하게 무도회를 꾸며 놓으신 걸까요? 헛헛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저번 봄의 무도회처럼 별 볼 일 없는 것보다야 낫지만 제국민들의 본보기가 되셔야 할 분이 이렇게나 사치스러워서야……. 어머? 황후 폐하!”
들려오는 말들을 무시하고 씩씩거리는 루안을 이끌며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려 할 때였다.
벨리타가 어색한 말투로 나를 불러 세웠다. 나는 탁자 위에 들고 있던 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안에 든 음료는 금방이라도 넘칠 듯 찰랑였지만 또 금세 잔잔해졌다.
그렇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벨리타가 보였다. 난처해 보인다기보다 즐거워 보이는, 그러면서도 약간은 멋쩍어하는 그녀가.
“설마 듣고 계셨던 건 아니죠? 어쩜 좋아…….”
“푸흡!”
나는 그 순간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유치할 수가.
‘벨리타, 너는 이미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었구나.’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이들은 이미 얼어붙어 있었고, 벨리타는 웃음이 터진 나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나는 그들과 벨리타를 번갈아 보다가 벨리타의 바로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보며 가늘게 미소 지었다.
“조용히 빠져 주려 했는데……. 벨리타, 이번 무도회가 그렇게나 화려하다고 생각했나요?
“네?”
그녀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퍽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보란 듯 고개를 꼿꼿이 들고 답했다.
“네. 아름답고 화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다만?”
“소외된 제국민들이 이런 무도회를 본다면 박탈감을 느낄 것 같았어요. 황후 폐하 덕분에 저희는 즐거운 하루를 보내겠지만 이 무도회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황실 예산이 쓰였을지 생각해 보면…….”
그녀는 눈으로는 슬픔을 연기하며 입가에는 교활한 웃음을 숨기고 있었다.
이런 말이 누구의 입으로든 나올 줄 알았다.
황후가 무도회 준비를 잘 해냈느냐. 그건 처음부터 벨리타 같은 이들에겐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였다. 어떻게 트집을 잡을까 고민하기도 바쁘니 말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몰라. 말다툼이라도 하는 건가?”
벨리타의 한 마디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굳이 지나가는 날 붙잡은 걸 보면 그녀가 노린 것이 이런 것이겠지.
나는 그에 대응해 더욱 차분한 어조로 그녀를 대했다. 벨리타가 원하는 논란의 여지를 만들어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백작가의 영애께서 황실 예산까지 걱정해 주다니. 기특하네요. 그런데 어쩌죠? 영애의 예상과는 달리 이번 무도회에 쓰인 황실 예산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폐하, 솔직해지셔도 됩니다. 예산이 많이 쓰이지 않았다니요. 여기 있는 무도회 장식들만 보아도…….”
“영애, 황후 폐하께 무례하게 굴지 마세요. 설마 지금 폐하께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까부터 화가 나 있던 루안이 흥분하여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를 본 벨리타는 더욱 조소했다.
과하게 반응하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하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도 폐하께서 거짓을 말씀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조금 말이 안 된다고 여길 뿐이지요.”
조금이 아닐 텐데.
뭐,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이제 알게 될 테지.
나는 다시 한번 루안을 진정시키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말이 안 된다고 확신할 수 있나요? 영애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지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번 무도회 장식들은 모두 지난번 황실 연례행사 때에 쓰인 것들을 재활용한 것입니다.”
벨리타는 황당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장 무도회장 곳곳을 살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연례행사 때 이런 장식이 쓰인 적은 없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리폼한 것이죠.”
“리폼이요?”
벨리타는 도무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 이들의 반응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폼? 그게 뭐야?”
“몰라? 나도 처음 들어 보는데.”
그들은 무도회장을 훑어보며 서로에게 리폼의 의미를 묻고 있었다. 이곳에는 없는 개념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낡고 유행이 지난 것들을 고쳐 새로운 숨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죠. 그게 바로 리폼이에요. 안 그래도 덕분에 배정된 황실 예산이 꽤 많이 남아 필요한 곳에 기부금을 보낼 생각입니다.”
벨리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붉은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예상 답안이 아니었나 보지? 하기야 네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소외된 제국민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갸륵하네요. 어때요? 이제 영애의 걱정거리가 해결되었나요?”
나는 미소를 띤 채 벨리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리고 이후의 말은 그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귀족 영애가 황후를 대하는 예법은 안 배운 건가요? 예법서라도 사 드려야 하는 건가…….”
벨리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화가 났는지, 창피한 건지 그도 아니면 둘 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렇게 벨리타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벨리타와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들은 이미 자리를 벗어나고 없었다.
그런데 통쾌한 기분을 느끼기도 잠시, 난 그녀가 떠난 자리에 떨어져 있는 조그만 종잇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저게 뭐지?’
그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저 별 볼 일 없는 쓰레기라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벨리타가 떨어뜨리고 간 것이라면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폐하, 잘 하셨어요! 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근데 손에 들고 계신 건 뭐예요?”
“벨리타 영애가 떨어뜨린 것 같아요.”
나는 조심스레 접혀 있는 종잇조각을 펼쳐보았다.
무도회와 관련해 황후를 질책할 것. 기억을 잃었다는 건 거짓으로 몰아.
이게 뭐야? 어떻게 망신 주면 좋을지 적어 놓고 다니기라도 한 거야?
‘소름 끼쳐.’
그녀의 악랄함에 치를 떨며 나는 쪽지를 찢어 버리기 위해 양손의 집게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퍼뜩 떠오른 쪽지의 내용이 묘하게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용이 아니라 거기 담긴 명령적 어조가 수상했다. 벨리타가 직접 적었으면 이런 지시적인 말투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다시 그 쪽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동안의 이유 없는 악행이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었음을.
벨리타 그녀의 뒤에 분명 누군가가 있다.
그렇다면 벨리타를 내세워 플로리아를 괴롭히려는 이는 도대체 누구지?
레이샤의 추종자들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소설 속에선 훗날 그녀의 추종자들이 모여 레이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녀를 황후로 추대하는 집단을 만들기도 한다. 레이샤는 그 일로 황후에게 사과까지 했었고.
하지만 아무리 플로리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 해도 이런 유치한 짓을 벌일 자들은 아니었다.
그냥 나를 싫어하는 귀족들의 장난인 건가? 그런데 무려 데보니안가를 배경으로 둔 벨리타가 이들의 명령에 휘둘린다고?
‘그건 말이 안 돼.’
“황후.”
복잡한 생각들에 휩싸여 주변을 보지 못하고 있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았다.
가볍게 닿았을 뿐이었지만 나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폐하.”
하드엘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분명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의 눈을 피해 재빨리 쪽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어디가 안 좋은 것이오? 불러도 듣지 못하기에.”
“아닙니다.”
그는 나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서도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마치 걱정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으로.
“황제 폐하께서 왜 황후 폐하께 오신 거지?”
“함께 춤이라도 추시려는 건가?”
“설마!”
아직 흩어지지 않은 귀족 무리가 우리 둘을 보고 속닥거렸다.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라지만 워낙에 여러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지라 그들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들을 빠르게 훑었다. 당장은 저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도 벅찼다. 벨리타의 일은 우선 잊고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듯싶었다.
사람들의 말에 반응이라도 보이듯 마침 잔잔하던 음악이 경쾌하게 바뀌었다.
‘춤이라…….’
앞에 있는 하드엘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절대 춤은 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연히 먼저 내게 춤을 추자 할 리도 없어 보였고.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아까부터 수군대기 바쁜 귀족들을 뒤에 두고 보란 듯이 하드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저와 춤을 추시겠습니까?”
황후인 내가 먼저 춤 신청을 했으니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마지못해 받아들이겠지.
황실의 위엄을 생각해 내게도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사람이니 무안을 주며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내키지 않아 하긴 하겠지만.
“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