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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24)화 (2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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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

봄이 한창인 날에 꽃이 가장 만개했다.

봉오리가 열려 꽃이 피는 봄날의 그 당연한 이치에 맞춰 아벨리움은 드디어 기다려 왔던 축제의 당일을 맞이하였다.

봄의 무도회 덕분에 시녀들은 다른 때보다도 분주했고 궁 전체가 손님을 맞을 준비에 바빠졌다.

하지만 정신없이 수선스러운 와중에도 궁 안의 사람들 모두가 은근히 들떠 있었다.

“폐하, 들으셨어요? 제국민들은 벌써부터 축제를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네, 아까 전해 들었어요. 열심히 준비한 축제를 좋아해 주니 보람이 느껴지네요. 상가 이용권도 잘 배부되었다고 하니 한시름 덜었어요.”

비단 궁 안의 사람들만이 이러한 축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궁 밖에서 처음 열리는 봄의 무도회를 제국민들은 며칠 전부터 기다려 왔다. 그들 덕택에 광장은 일찌감치 축제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흘러나오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단장을 하다가 문득 거울에 비치는 창문을 바라봤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꽃잎들이 문밖에서 흩날렸다.

이 세계에서의 시간도 흐르긴 흐르는구나. 운명이란 거, 잘 바뀌고 있는 걸까.

깊은 상념에 젖어 들 무렵 창틀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알링이 포로롱 날아와 거울 앞에 앉았다.

내 앞에서 붉은 날개를 펼쳤다가 접기를 반복하는 것이 어쩐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알링, 뭐 하는 거야.”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작고 귀여운 날갯짓을 보니 무겁게만 느껴지던 생각들이 부유하는 먼지처럼 가벼워지는 듯도 했다.

“우리 많이 친해졌다. 그렇지?”

짹짹 소리밖에 못 내는 알링에게 말을 거는 사이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문서와 같은 것을 두 손에 가득 든 채로 다가왔다.

“루안, 황후 폐하의 단장이 얼마나 남았죠?”

“거의 끝났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그녀가 들고 온 한 아름의 종이 뭉치가 무엇인지 왠지 짐작이 되었다. 도박장. 그 일에 관한 것이겠지.

“폐하,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을 잠시 멈추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부인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전에 명하신 도박장 출입 명부와 수익 내역 및 몇몇 귀족들의 상세한 재산 사용 내역입니다.”

나는 백작 부인이 건네는 문서를 간단히 훑었다.

당장은 시간이 없었기에 무도회가 끝난 후에 자세히 살필 계획이었다.

“고마워요. 이것들은 오늘 행사가 끝나고… 잠깐. 이게 뭐지?”

하던 말을 잇는 것도 잊은 채 나는 잠시 멈칫했다. 덩달아 문서를 넘기던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난 천천히 눈에 띄는 숫자를 읽어 내려갔다.

“1,000벨?”

믿을 수 없는 숫자였다.

연 수입이 150벨 정도인 자가 제 딸의 무도회를 1,000벨을 들여 열었다니. 무슨 수로?

도박장에서 연 수입의 6배가 넘는 돈을 벌어들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도박장 출입 명부와 수익 내역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문서를 집어 들었다.

‘베르시트 남작, 베르시트 남작… 찾았다!’

500벨, 1,000벨, 2,000벨.

도박장에서 그가 따낸 돈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섭게 불어났다.

게다가 도박장에 처음 출입한 날부터 굉장히 많은 돈을 한꺼번에 따냈다. 순수하게 게임을 즐겼다고 보기엔 상당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았다.

“부인, 도박장에서 거액의 돈을 계속해서 따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요?”

내 질문에 백작 부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는 도박장엔 출입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오히려 잃었다는 이야기라면 많이 들어 봤어요. 저희 가문의 사용인들에게 듣기를 연초부터는 돈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박에 빠지면 전 재산을 탕진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군요. 그럼 황제 폐하를 공격한 그 남자도 연초에 돈을 잃은 사람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니요. 오히려 그 남자는 연초부터 굉장히 부유한 귀족 못지않게 생활했다고 해요. 그런 남루한 행색으로 다닌 지는 얼마 안 되었다고 하고요.”

“네?”

나는 서둘러 문서에서 하드엘을 공격했던 남자의 이름을 찾았다.

부인의 말과 문서에 적힌 그의 행적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남자가 도박으로 벌어들인 돈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걸었던 판돈을 다 잃었다 기록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부유하게 생활했다?

역시 뭔가가 있음이 틀림없다.

-똑똑

“들어와요.”

“폐하, 이제 단장을 마무리하고 무도회장으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네. 나갈게요.”

나는 시녀의 부름에 문서에서 애써 시선을 떼며 그것을 서랍에 넣고 자물쇠로 잠갔다.

갔다 와서 다시 살펴야겠어.

* * *

“폐하, 고개를 조금만 들어 주시겠어요?”

루안이 머리 위에 투명한 보석들로 장식된 티아라를 올려 주며 말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역시 이 티아라를 고르길 잘했어요.”

공식 행사이니만큼 드레스나 장신구가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위엄이 있었다.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티아라만 보아도 그러했다.

“폐하, 단장이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무도회장으로 가 볼까요?”

내가 머리를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 시녀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숨이 가득 차 헉헉거리면서도 기필코 제 할 말을 해나갔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황후궁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다 합니다!”

“?”

정말 뜻밖의 말이라 나와 황후궁 시녀 모두가 달려온 그 시녀를 쳐다보았다.

공식적으로 하드엘과 나는 별궁에 따로 마련된 방에서 만나 무도회장으로 함께 입장해야 했다. 그게 정해진 절차였다.

그런데 하드엘이 굳이 날 찾아왔다고?

“폐하께서 왜요?”

“그대와 걷고 싶어서.”

의외의 곳에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이 들려왔다.

이젠 익숙한 목소리.

황후궁에 있던 시녀들 모두가 고개를 숙였고 문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시녀도 화들짝 놀라며 비켜섰다.

내 시선이 향한 곳에서 황제의 제복을 갖춰 입은 하드엘이 나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함께 나가시지요.”

잠시 그를 바라보던 나는 한 발 늦게 걸음을 뗐다.

“몸은 괜찮은 것이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말했지 않소. 걷고 싶었다고.”

빈틈없는 기사들의 호위 틈에서 하드엘과 나는 나란히 별궁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불규칙하던 그의 걸음 소리와 나의 걸음 소리가 이제는 겹쳐 들렸다.

“저와 걷고 싶으셨다고요?”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는 건가?

‘설마.’

그가 먼저 저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나는 앞을 보던 눈을 돌려 하드엘을 바라봤다. 잘 넘긴 백금발 머리가 그의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곧은 눈부터, 반듯한 콧날과 단정한 입매. 차례로 눈에 담은 그의 얼굴은 그린 듯 아름다웠고 여전히 차가웠다.

그럼에도 뭔가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은 내 착각일까?

시선을 느꼈는지 하드엘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황후의 말대로 내가 그대에게 큰 빚을 져서.”

“?”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직접 물어보고 싶었소.”

“그건…….”

빚. 그와 나 사이에 빚이 있었다.

훗날 소설대로 내가 죽어 간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말의 죄책감 정도는 느끼라고 한 말을 하드엘 그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대가 없이 장로를 불러 준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그 정도의 빚은 갚았다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말뿐인 빚에 이렇게나 신경 쓰고 있을 줄도 몰랐고.

“그건?”

여전히 날 응시하며 그가 되물었다. 그에 난 잠시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훗날, 아주 먼 훗날을 위해 아껴 두겠습니다.”

“아껴 둔다?”

하드엘은 내 말을 되풀이하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답했다.

나는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약간은 놀란 상태로. 그가 웃고 있다는 게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게다가 지금 그의 얼굴은 꽤 편안해 보였다. 나와 함께할 때면 늘 긴장하며 경계하던 그였는데.

그래. 분명 그런 하드엘이었는데 지금은 궁 밖에 나갔던 날과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이번은 내 착각이 아닌 게 확실했다.

“그러도록 하지.”

나는 휘어진 그의 입가와 눈매를 꽤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번져가는 봄바람이 그의 정돈된 머리칼을 흩뜨렸기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의 등 뒤로 늘어선 연녹색의 나무들이 눈을 사로잡은 탓인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신기했다. 날 보고 그가 웃고 있다는 게.

하드엘, 당신은 이렇게 웃을 수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조금 멍한 기분으로 길을 걸어서일까. 이상하리만큼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별궁 앞에 다다라 있었다.

“양 폐하께서 드십니다.”

근엄한 목소리와 함께 봄의 무도회의 개최지인 별궁의 문이 열렸다.

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처음 여는 무도회. 정렬하여 고개를 숙인 다수의 귀족들. 티 파티 때와는 그 규모부터가 달랐다.

앞에 선 기사들이 차례로 제 위치를 찾아가며 길을 내 주었다.

이제 나아가야 할 때였다.

나는 긴장감을 뒤로한 채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드엘과 동시에 발걸음을 내디뎠다.

양옆에 선 귀족들은 나와 하드엘이 걷기 시작하자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나는 그들의 쏟아지는 시선을 받아 내며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었다.

무도회에 처음 참석하는 듯 보이는 몇몇 어린 귀족 아이들은 신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외의 귀족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때때로 당황하여 눈을 피하거나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듯이 더욱 뚫어져라 나를 응시했다.

얼마 안 가 나는 별궁의 입구와 제일 먼 곳, 그 한가운데에서 멈춰 섰다.

“아벨리움의 오랜 전통에 따라 이토록 아름다운 봄의 무도회를 베풀어 주신 황후 폐하께 무궁한 감사를 표합니다.”

하드엘을 제외한 모두가 내게 허리를 숙였다.

숙이고 싶지 않은 듯 티 나게 쭈뼛거리는 귀족들도 더러 있었지만 이는 인사치레이기에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다들 허리를 굽혔다.

“꽃이 가장 만개한 오늘, 봄의 마지막 무도회를 맘껏 즐기세요.”

준비했던 말이 끝나자 차분하고도 가벼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경직되었던 분위기도 금세 풀어졌다.

평소 친분이 있는 귀족들은 저들끼리 모여 춤을 추거나 담소를 나누기 바빴고, 어쩌다 눈이 맞은 이들은 얼굴을 붉히며 무도회장을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그리고 하드엘은 순식간에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는 선망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대상이었다.

그의 냉랭함에 평소라면 다가가기조차 힘들어했을 귀족들도 이번을 기회로 무리를 지어 그에게 다가가 한마디 말이라도 걸어 보려는 것이었다. 황제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에 반해 나에게 다가오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지 가끔씩 곁눈질로 힐끔거리는 귀족들은 있어도.

오로지 무도회에 참석한 황후궁 시녀들만이 내 곁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나는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생각이었기에 황제와 황후를 위해 준비된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 이렇게 아름다운 무도회장에서 앉아만 계시려고요?”

그런데 루안은 이제 막 등받이에 몸을 기댄 나를 일으켜 세웠다.

거절하려 했지만 이미 손이 잡힌 후였다. 루안을 따라 옆에 있던 시녀들도 눈을 반짝이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 내가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다른 시녀들도 돌아다니질 못하겠구나.

“어서요, 어서 가요!”

루안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하지 않은 채 결국 난 그녀가 안내하는 대로 순순히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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