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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23)화 (2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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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들고 다니기에 알맞은 크기의 단도였다.

상상치도 못한 물건의 정체에 나는 의아해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걸 왜 주신 거죠?”

“어떤 위험이 언제 닥칠지 모르니 앞으로는 지니고 계셔야 할 것이라며 주셨습니다.”

나는 제국의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진 칼집을 바라보았다.

아벨리움에서 단도를 선물한다는 것은 당신의 평생의 안전과 안녕을 기원한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제국의 역사서에 기재될 정도로 오래된 풍습과도 같은 일이니 이미 이러한 의미가 희미해졌다고 봐도 무방했지만 오늘은 괜스레 그 의미가 더욱 되새겨졌다.

‘평생의 안녕이라…….’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하드엘이 보낸 단도를 받아 들었다. 칼집 안 날카로운 칼날이 번뜩이고 있을 걸 생각하며.

“아, 부인. 그런데 폐하를 공격한 그 남자는 어떻게 됐나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술과 약물의 중독으로 몸이 망가진 상태였더라고요. 게다가 그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과 노인들이 다치는 일도 빈번했던 모양이에요.”

살았어도 죽음을 면치 못할 자였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무거워지긴 했지만 가해자를 품어 줄 동정심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그 남자가 소리치던 말들.

‘빌어먹을 귀족 놈들! 내 돈! 도박장에서 다 네놈 같은 녀석들이 날 이용하고 버린 게지!’

그 발악에 가까운 소리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혹시 조문을 가시려는 건가요?”

“그런 자에게 베풀어 줄 관용은 없습니다. 대신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알아보고 싶으신 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도박장.”

“네?”

“도박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봐야겠어요.”

* * *

“오늘따라 바람이 찬데 이만 들어가시지요.”

“곧 봄의 무도회잖아요.”

“일어나시자마자 일을 하시는 것도 걱정스러운데 무도회가 열릴 별궁까지 직접 걸음 하시고 이렇게 무리하시다가…….”

“루안, 전 괜찮아요. 그리고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것보다 이렇게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는 게 건강에 더 좋을걸요? 안 그래요?”

“아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루안이 금세 수긍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토끼 같은 눈을 깜빡이는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이내 걱정스러운 마음에 혼자 중얼거렸다.

“무도회 준비가 잘되어야 할 텐데.”

무도회가 열리는 건 앞으로 일주일 뒤. 시간이 촉박했다. 그렇게 쓰러지고는 한동안 일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봄의 무도회가 플로리아의 평판을 바꾸기 좋은 기회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그동안 열심히 준비했는데.

“걱정 마세요! 저번에 별궁에 가 보았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동안 수많은 무도회를 보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무도회를 본 적은 없었어요. 게다가 정말 기발한 방법으로 예산까지 아껴 무도회를 꾸미셨잖아요. 도대체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

“무도회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이 루안처럼 내가 준비한 무도회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네요.”

“제가 장담하는데 폐하께서 이번 무도회를 꾸미실 때 사용하신 방법이 얼마 안 가 젊은 영애들 사이에서 큰 유행이 될 거예요!”

“그런가요?”

“물론이죠!”

루안이 한껏 상기되어서 말했다.

나는 그런 루안과 대화를 이어 가며 황후궁과 별궁을 가로지르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어머, 저것 좀 보세요!”

그런데 잘 가던 루안이 우뚝 멈춰 서더니 하늘을 보며 감탄하여 말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루안을 따라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짤막한 날개를 펼친 한 마리의 새가 있었다.

햇빛이 환하게 비치는 길을 따라 포로롱 날아다니는 작고 귀여운 새였다.

붉은 새의 깃털은 빛을 온전히 받아 윤기 있게 반짝였다.

“어! 새가 이쪽으로 와요!”

루안의 말대로 새는 정말 우리 쪽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어느새 유유히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그런 새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그러자 새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손안에 쏙 들어와 앉았다.

통통거리며 갸웃대는 모습이 너무나도 깜찍했다.

“신기해라. 폐하를 좋아하나 봐요.”

“누군가 키우던 새도 아닌 것 같은데 사람을 너무 잘 따르네요.”

“이리 와 봐. 작은 새야.”

이번에는 루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붉은 새는 루안을 보더니 휙 하고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 손에서는 통통거리며 잘만 놀던 새가 갑자기 낯이라도 가리는 것처럼 굴었다.

“사람을 따르는 게 아니라 폐하만 따르는 것 같은데요? 저한테는 굉장히 도도해요!”

“그런가요?”

두 손 가득 느껴지는 약간의 묵직함과 보드라운 털의 감촉이 싫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귀엽게 생겼어.

“그런데 이 새 굉장히 희귀한 새인가 봐요.”

“네? 왜요?”

“지금껏 아벨리움에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에요.”

“그런가요? 난 왜 익숙하지?”

“어? 그러고 보니 이 새 황후 폐하와 닮은 것 같아요! 영롱한 까만 눈동자 하며 아름다운 붉은 깃털 하며…….”

“아!”

“폐하? 왜 그러세요?”

이제야 생각났다! 이 새는 분명……!

빨간 깃털, 검은 눈동자.

분명 그때 그 새와 똑같았다.

나는 손안에 있는 새를 나의 눈높이에 맞춰 올렸다. 그리고 말똥거리는 새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 봤다.

틀림없이 이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한 직후 내가 쓰러졌었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거예요?”

“아니, 아니에요, 루안.”

나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웃음 뒤로 감추었다.

“혹여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다 싶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해요!”

“그렇게 할게요.”

루안은 다시 몸을 돌려 새를 보더니 흠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아무래도 나를 유독 좋아하는 새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황후 폐하, 저 새는 어쩌죠? 폐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데려가야 할까요?”

루안이 내 손에 몸을 비비고 있는 붉은 새를 보며 말했다.

난 고개를 짧게 내저었다. 아무리 이상한 우연이라 한들 새에게서 답을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넓은 세상을 두고 좁은 새장에 키울 수는 없지요. 이만 날려 보내줄까 봐요.”

나는 두 손을 펼쳤다.

그런데 새는 날아가기는커녕 아예 자리를 잡으려는 듯 손안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직접 하늘을 향해 새를 날렸다.

“자유롭게 살거라.”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루안의 말이 방금 뱉은 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새가 다시 돌아와요!”

“?”

나는 어쩔 수 없이 날아오는 새를 다시 손 위에 앉혔다.

-째액, 짹!

다시 돌아온 새는 내게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지저귀었다.

억지로 날려 보낸 것에 대해 울먹이며 섭섭함을 토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폐하, 어떻게 하죠?”

“그러게요. 엉덩이가 무거운 이 새를 어쩌면 좋을지…….”

“그냥 폐하께서 직접 키워 보시는 건 어떠세요?”

“내가 직접이요?”

“폐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으니 직접 키워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새를 키워? 내가?

나는 좀처럼 날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새를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당장은 별 수가 없다 판단해 그 새를 데리고 별궁까지 들른 후 황후궁에 돌아왔다.

“어머!”

“황후 폐하, 별궁에 다녀오시는 길 아니셨어요? 이 귀여운 새는 뭐예요?”

“꺅, 어떡해! 너무 사랑스럽다!”

황후궁 시녀들이 호들갑스럽게 내 곁에 몰려들었다. 까만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복슬복슬한 붉은 새를 보기 위해서였다.

루안이 앞선 시녀들의 물음에 왜인지 뿌듯해하며 앞으로 나섰다.

“길을 걷는데 갑자기 이 새가 날아오지 뭐예요. 폐하께서 가라고 보내 주셨는데도 금세 곁으로 되돌아오더라니까요!”

“정말요? 신기해라. 제가 키우는 새는 아무리 불러도 안 오던데.”

“새를 키우셨나요? 그럼 이 새가 무슨 종인지도 아시나요?”

새를 키운다고 말한 시녀를 보며 루안이 궁금한 듯 물었다.

“글쎄요. 저도 새를 키우면서 종에 관해 나름 공부를 많이 해서 웬만한 새는 알고 있는데 이런 새는 처음 봐요.”

“그러시군요. 아! 폐하, 황후궁에서 키우실 건가요? 새장이나 모이를 미리 준비해 둘까요?”

“음…….”

대답하기를 망설이자 시녀들이 애원하는 듯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 왔다.

손아래를 내려다보니 붉은 새도 그녀들과 똑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못 키울 이유는 없지.

“그럼 모이를 가져다주세요. 아, 새장은 말고요.”

“네? 새장이 없으면 새가 날아 가 버릴지도 모르는데요?”

새를 키운다는 시녀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그래서예요. 원래 자유롭게 살던 새이니 원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날아갈 수 있게 두고 싶어요.”

“그래도 이름은 지어 주실 거죠?”

“이름이요?”

“폐하, 칼드윈은 어때요?”

시녀들은 우르르 자신들의 의견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칼드윈이라는 이름에는 대체로 반대 의견이 많았다.

“그건 왠지 시골에 있는 외숙부 이름 같지 않나요? 붉은색이 멋지니까 위드랑 레드 어때요?”

“이렇게 귀여운 새에게 그런 이름은 안 어울려요! 포르델라! 그게 딱이네요.”

시녀들은 너도나도 붉은 새의 이름을 지어 주기 바빴다.

자신들의 이름이 더 어울린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탓에 주변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죄다 너무 귀족스러운 이름들뿐이었다.

붉은 새의 이름 후보들을 듣고만 있던 나는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뿌뿌 어때요?”

“네?”

순식간에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왜들 그래요?”

“하하, 폐하께서도 참!”

시녀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뿌뿌라니요. 폐하께서는 농담도 잘하신다니까!”

“농담이 아닌데요?”

“그럼 정말 뿌, 뿌뿌…….”

“왜요? 이상한가요?”

귀엽기만 한데.

-짹! 짹!

“새는 뿌뿌라는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루안이 붉은 새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루안의 말을 듣고 내 손안에서 짹짹거리는 새를 바라봤다.

짧고 강하게 지저귀며 날개를 정신없이 흔드는 것이 ‘뿌뿌는 절대 안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어쩌지……. 아!”

“뭔가 좋은 이름이 생각나셨어요?”

“알링! 알링 어때요?”

“오! 좋아요!”

“저도 좋은 것 같아요!”

시녀들의 반응에 힘입어 나는 붉은 새의 반응을 살폈다.

“알링, 어때 마음에 들어?”

뿌뿌를 말할 때와는 달리 큰 반응 없이 고요했다.

가끔씩 손에 얼굴을 부비는 행동만 보일 뿐이었다. 어쨌든 마음에 든다는 거겠지?

“폐하, 혹시 휘파람 소리를 내실 수 있으신가요?”

“휘파람 소리요? 네, 가능해요. 그런데 왜요?”

“휘파람을 신호로 새를 부르기도 하거든요. 새장 안에 가둬 키우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니 알링을 휘파람으로 훈련시키면 어떨까 싶어서요.”

“휘파람으로 훈련을요? 할 수 있을까요?”

새를 키워 보는 것도 처음인데…….

“알링이 폐하를 따르니 충분히 가능하실 것 같은데요?”

“음… 좋아요! 한번 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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