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뭐?”
일순 정적이 흘렀다.
하드엘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바빠진 신전. 장로와의 만남이 잦은 부황. 갑작스럽게 내정자에서 파해진 공녀.
그리고… 나의 반려가 될 플로리아.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에스타란토. 그 하나로 이해가 가지 않던 상황 전부가 설명되었다.
하지만 하드엘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착각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시 말해 보아라.”
어둡게 그림자 진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 무겁게 울렸다.
“전하…….”
플로리아, 그녀가 에스타란토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지금 당장 부황께 가야겠다.”
그는 지체 없이 황제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왔느냐.”
황제의 집무실에 나이 든 황제가 근엄하고도 점잖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하드엘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황제의 행동은 침착했다.
“에스타란토라니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그 목소리는 오히려 그 어떤 감정도 헤아릴 수 없게 했다.
“일이 완전히 정리되면 네게 말해 주려 하였다.”
“어떻게 그리 태연하십니까? 모르십니까? 에스타란토가 나타나면 황제는 자신의 윗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자신의 것이어야 마땅한 황제의 자리. 그 위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가장 높은 곳에서 아벨리움을 돌보아야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의 권위는 그렇게 지켜져 왔고 선대 황제 중 누구라도 그 사실에 예외를 둔 적은 없었다. 자신도 그 하나를 위해 지금껏 무수한 시련을 견뎌 왔다. 그런데 에스타란토?
“안다. 더불어 에스타란토가 아벨리움의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도.”
“평생을 에스타란토의 발밑에서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다!”
이보다 치욕스러운 일은 없었다. 감히 누가 황제의 머리 위에 앉는단 말인가.
“영광스러운 일이다!”
주먹을 세게 쥐자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는 새빨갛게 젖어 가는 붕대를 보며 읊조리듯 물었다.
“평생을 혹독하게 살아온 결과가 고작 이것입니까? 왜 하필 저입니까?”
“미련한 소리. 넌 그저 지금처럼 완벽한 황제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야! 에스타란토의 힘이 깨어날 때 네 위에 올라설 그분을 잘 보필하는 것이 앞으로 황제로서 네가 해야 할 일이고!”
하드엘은 고함치는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렇게 그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이자 아벨리움의 황제인 그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누구입니까.”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그 영애입니까?”
그는 아니라는 말이 부황의 입에서 나오길 바랐다.
그녀가 에스타란토라면……. 만약 그렇다면 당장 없앨 수도 없을 테니까.
“네 옆자리에 앉을 그 아이. 그 아이가 에스타란토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가장 마지막까지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마주했다.
그의 세상이 무너졌다. 너무나도 당연했던 그의 세상이. 그동안 죽을힘을 다했던 노력 전부가 헛된 게 되었다.
부황의 단 한 마디에.
플로리아. 그녀의 존재 하나 때문에.
태자궁으로 돌아온 그는 별 다를 것 없는 일상을 보냈다. 그러나 잠들지 못해 깨어있는 밤들이 많아졌음을 그 스스로도 모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졌고, 약해졌다. 한없이 유해지는 마음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잠시 동안 그대가 내 반려가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이제라도 알았으니 차라리 잘되었다. 감정이 깊지 않으니 접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
마음을 주지 않는 건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전하…….”
백작은 걱정 어린 말투로 하드엘을 불렀다.
황제와의 대화 후 며칠간 밤을 지새운 하드엘의 얼굴은 혈기 없이 창백했다.
“왜 그런가?”
“플로리아 영애께서 전하를 뵙고 싶다 청하셨습니다.”
플로리아.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표정은 단숨에 굳었다. 책장을 넘기던 손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세상은 잠시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흘러드는 은은한 꽃향기만이 그의 세상 속에 스며있었다.
플로리아. 그녀와 닮은 봄은 당분간 깊어져 갈 것이다. 이름 모를 꽃향기도 짙어지겠지.
하지만 이 봄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아무리 아벨리움의 봄날이 길다 해도.
그는 차디찬 시선을 들어 백작을 바라봤다.
“바쁘다 전해라.”
플로리아가 찾아오면 하드엘은 요 며칠 뻔한 핑계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없었다.
백작은 며칠 내내 그래 온 것처럼 오늘도 이 매정한 답을 플로리아에게 전하러 가야 했다.
그런데 오늘 넬슨 백작의 행동이 굼떴다.
그는 하드엘의 눈앞에서 손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며 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보다 못한 하드엘의 물음에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밀며 말을 덧붙였다.
“며칠 동안 찾아오셨으니 이번에도 못 뵐 줄 아셨던 것 같습니다. 영애께서 제게 이것을 주시더군요. 전하께 전해 달라 하시면서요. 새 붕대와 이전에 전하께서 영애께 드렸던 방우구입니다.”
궁내 의원에게 얻어 온 것으로 보이는 깨끗한 붕대와 봄비의 흔적이 사라진 잘 마른 방우구가 백작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드엘은 그것들은 보지도 않은 채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긴 손가락을 다시 움직여 책장을 넘겼다.
가벼운 종잇장일 뿐인데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소리가 베일 듯 날카로웠다.
“폐하.”
“버려라. 전부.”
넬슨의 부름에 응하는 하드엘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냉정함이 깃든 낮은 목소리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베었다. 그렇게 무참히 감정의 싹을 짓밟았다.
영애였던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기까지.
플로리아에 관해 그가 하는 일이라면 그녀가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일뿐이었다.
줄곧 피해 다닌 게 지친 건지 그녀도 이후엔 더 이상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알아서 피해 주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마주치면 숨기 일쑤였으니까.
그에겐 잘된 일이었다. 덕분에 남은 감정을 애써 무시할 수 있었다.
플로리아가 더는 자신을 보고 웃지 않고, 다가오지 않고, 말을 걸지 않았을 때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외면하고 또 외면하면 언젠간 그 봄날을 완전히 잊을 수 있겠다고.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황제의 자리. 제국 지존의 자리. 그것이 전부니까.
하지만 미처 몰랐다.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이 그렇게나 끈질긴 것일 줄은. 몇 년간 놓지 못한 마음이 저도 모르게 몸집을 불려 가는 줄도 몰랐다.
감정이란 것은 미련했다.
미련해서 버릴 수가 없었다.
찬연한 봄날의 햇살 아래서 검게 반짝이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어서. 엷붉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날 위로해서, 당신의 웃음이 그리워서.
그 무수한 이유들이 날 짓누르는 바람에.
* * *
집무실에 서서 한참 동안 화원의 다리를 바라보고 있던 하드엘은 그만 그 시선을 거두었다.
고개를 돌렸지만 창가에서부터 스민 빛은 계속해서 그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플로리아.”
그는 부르고 싶어 부르지 않았던 그 이름을 다정히 읊조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그녀의 이름을 읊는 것만으로 제 입 안이 달콤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당신을 여전히 잊지 못했다.
당신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잘 견뎌 왔다 생각했는데, 결국 이렇게 쉽게 무너진 내가 우스웠다.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리 괴롭지도 않았을 것을.
당신이 날 보고 웃지 않았다면. 그 봄날 화원에서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플로리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난 이제 당신을 매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가 없는데.
당신이 쓰러지는 순간 깨달아 버렸으니까. 나는 어떻게든 플로리아 그대를 살려내고야 말 거라는 것을.
난 당신을 죽일 수 없다. 아니, 살길 바란다.
내 옆에서, 영원히.
“설령 그대가 내 자리를 위협한다 해도…….”
그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치던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느껴지는 듯했다.
더 이상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만약 화원의 다리에서 그녀가 다치지 않았다면, 내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오지 않았다면, 날 구하려 뛰어들지 않았다면 흔들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작 뒤돌아본 것은 나였고, 당신을 처음 만난 그 봄날을 잊지 못해 몇 해를 앓아 온 것도 나였다. 오히려 황후 그대는 태연한데.
‘하긴 그대가 해 주던 소소한 말들이 내게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 플로리아, 당신은 몰랐겠지.’
* * *
며칠간 의원들이 쉴 새 없이 다녀간 후로 쓰러진 것이 이상했을 정도로 개운했던 몸은 오히려 피곤해졌다.
안 그래도 생각할 것들이 차고 넘치는데 괜히 기운만 뺐다.
‘그 빛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사람은 의원이 아니라 장로였다. 어떻게든 장로를 만나 내가 본 붉은 빛에 관해 물어봐야 했다.
더군다나 이번 사건. 이렇게 큰 사건이 소설 속에선 다뤄진 적이 없다.
이를 통해 나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운명은 바뀌고 있다는 것.
고로 이젠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었다. 앞으로의 소설 내용이 죄다 뒤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니.
분명 바라던 일임에도 왜인지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때때로 올라오는 하드엘을 향한 플로리아의 마음. 그 마음이 내 것이란 착각이 들기 때문일까.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리고라도 뛰어드는 플로리아의 감정은 지금 내게 무척이나 위험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나조차도 주체할 수 없기에 더더욱.
“황후 폐하.”
백작 부인이 금색의 쟁반을 두 손으로 든 채 다가왔다.
그녀는 곧 그것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죠?”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보내신 것입니다.”
하드엘이?
나는 금색의 쟁반 위를 살폈다. 그 위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한 장의 봉투가 있었다.
유독 꼼꼼히 봉해 놓은 봉투를 뜯자 편지지가 보였다.
대충 훑어보아도 걱정 어린 내용의 편지. 내게 이런 편지를 쓸 사람은 장로뿐이었다.
“이걸 폐하께서 보내셨다고요?”
“네.”
하드엘이 장로의 편지를 대신 보내 줬다고?
나는 의아함을 품은 채로 편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편지 속에서 장로는 깨어나 다행이라고 몇 번이고 말하며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그 빛이 나타나게 된 것인지를 내게 상세히 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편지의 마지막에 쓰러진 나를 위해 하드엘이 자신을 급히 찾아왔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한참 동안 편지에 적힌 내용을 계속해서 다시 살폈다.
당시 나를 감싸던 붉은빛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에스타란토의 힘이었다는 것도, 내가 그 힘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다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하드엘이 대가 없이 나를 위해 장로를 불러들였다는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장로에게 대가를 요구했을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장로의 편지에 황제의 인장을 찍어 보내 주었다는 것 자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왜…….’
쓰러지기 직전 그의 표정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처럼 굴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참, 폐하.”
“왜 그러시죠, 부인?”
“폐하께서 저를 따로 부르시어 황후 폐하께 전하라 명하시며 주신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