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지?”
황후궁 침실.
하드엘은 잠들어 있는 플로리아를 바라보며 장로에게 물었다. 황제의 부름을 듣고 급히 달려온 장로는 숨을 고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에스타란토의 힘이 일순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에스타란토께서는 아니, 황후 폐하께서는 아직 온전히 힘을 발현시키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게다가 원래가 몸이 약하신 탓에 더 견디기 힘드셨을 겁니다.”
“감당치도 못할 힘이 발현되었다 이 말인가?”
“예. 빛이 터져 나온 그 순간만큼은요. 일종의 방어 본능이었던 것 같습니다. 황후 폐하를 지키기 위해 에스타란토의 힘이 스스로 보호 마력을 내뿜은 것이지요.”
“그래서 황후는 언제 깨어날 수 있는 거지?”
“순간적으로 힘이 발현한 것뿐이니 곧 깨어나실 겁니다. 다행히 에스타란토의 힘도 다시 잘 잠들었고요.”
“그러니까 그 곧이란 게 언제란 말이냐.”
하드엘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장로를 마주 보았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서늘한 광채를 띄고 있었다.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확실치 않기에…….”
장로는 플로리아에 대한 걱정과 근심, 그리고 자책으로 고개를 푹 숙이며 말꼬리를 흐렸다.
우울한 빛을 머금은 장로의 눈은 발끝을 향하고 있었다.
“이만 나가 보거라.”
쓸모없는 대답이었다.
하드엘은 장로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었다.
힘없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하드엘의 눈길은 다시 창백한 플로리아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폐하께선 제게 목숨을 빚지신 겁니다.’
쓰러지기 직전 힘겹게 내뱉던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 가늘게 떨리던 손. 그러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도대체 왜.’
가슴 한구석이 못 견디게 아려 왔다.
그래서 그토록 경계하던 에스타란토의 힘이라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데 당장은 쓰러져 가는 그대의 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두려웠다. 당신이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이후엔 아무것도 들리지가 않았다.
이미 죽은 괴한 앞에서 칼을 빼 들어 죽은 자를 또다시 죽이고서야 겨우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깨울 힘이란 게 아직도 날 잔인하게 옥죄어 오는데…….
하드엘은 두 눈을 감은 플로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플로리아의 붉은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태자 전하께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요.’
자신의 기억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그날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빛바랜 책처럼 너무나도 흐릿해져 버린, 하지만 미치도록 그리웠던 그 목소리.
동시에 지금보다 앳된 황후의 얼굴도 점점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하드엘은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플로리아의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황후를 보면 그리도 무디던 감각이 뚜렷해진다. 지금 손에 닿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세세하게 느껴지듯이.
그녀와 마주할 때마다 미움이 아닌 다른 감정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앞섰다.
그것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해 보려 했다. 쓸모없는 감정이니 잊어야 한다. 그렇게 되뇌고 또 되뇌며.
그 무수한 날들 동안 터무니없는 소문에 괴로워하는 당신을 무시하고, 짓밟으며.
하지만 이 부질없는 감정은 결국 지금의 나를 헝클어뜨렸다. 잊을 수 있다고, 지울 수 있는 마음이라고 스스로를 속이지도 못하게.
플로리아, 화살이 날아오던 그날도, 그리고 오늘도 당신이 날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를 피하고, 숨고, 무서워했어야 했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러면 나는 더 오래 날 속일 수 있었을 텐데.
“폐하,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황후의 침실 밖에서 넬슨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침묵하던 하드엘은 잠시 후, 플로리아의 붉은 머리카락을 훑던 손을 내렸다. 그리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들라.”
“폐하,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하드엘의 명이 떨어지고 어느새 그의 앞에 다가온 넬슨 백작은 공손한 태도와 어울리지 않는 잔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말이냐.”
“장로께서 오신다고 했어도 말리셨어야 합니다. 황후궁 사람들도 이렇게 급히 물리면 아니 되셨습니다. 그런데 황후궁 사람들을 이 밤에 모두 나가라 하신 것도 모자라 황후궁으로 와 달라 장로께 먼저 청하시다니요. 폐하답지 않으십니다.”
“그래,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지.”
“벌써부터 궁 안의 시녀들과 기사들 심지어는 하녀들까지 숙덕이고 있습니다.”
“엉망이구나.”
하드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황후가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장로뿐이었다. 그랬기에 이 밤에 모두를 물리면서까지 장로를 불러낼 수밖에 없었다.
자신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자신답지 않은 일을 그는 할 수밖에 없었다.
황후를, 플로리아를 살려야 했고 그 외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황후 폐하에 관해 폐하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황후에 관해?”
하드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작을 쳐다보았다.
단 몇 시간 만에 수척해진 백작의 몰골이 이제야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예. 요즘 황후 폐하에 관한 소문이 떠돈다고 합니다.”
하드엘은 소문이란 말에 오늘 다리 위에서 들었던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젊은 부부의 말소리를 떠올렸다.
“소문이라면 황후가 에스타란토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그 소문 말이냐?”
“알고 계셨습니까?”
넬슨 백작은 놀란 눈으로 황제를 보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어 하는, 딱 그런 표정이었다.
하드엘은 무심한 어조로 백작의 궁금증에 대한 답을 내어 주었다.
“오늘 거리에서 들려오더구나. 그래서 소문을 낸 사람은?”
“소문의 특성상 한 사람을 특정 짓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리에서 들려올 정도라면 소문이 이미 꽤 널리 퍼진 것은 아닐는지요.”
“그렇겠지. 어떻게 퍼지게 된 건지는 알아봤느냐?”
“그게, 처음엔 에스타란토가 궁 안에 있다는 소문과, 떠도는 소문 속 주인공이 황후 폐하라는 소문이 각각 따로 퍼진 듯싶습니다.”
“떠도는 소문 속 주인공? 그럼 처음부터 에스타란토가 황후라 특정 지어지진 않았다는 거군.”
“네. 황후 폐하에 관해 떠도는 소문이 워낙 많은지라 그저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각기 다른 두 소문이 함께 퍼지며 와전된…….”
“으으…….”
두 사람의 대화 도중 하드엘의 뒤에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드엘은 곧바로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통스러워하는 플로리아가 보였다.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식은땀을 쏟았다.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신음은 얼마 가지 않아 그쳤다. 플로리아는 곧 안정을 찾았는지 이전과 같이 조용히 잠들었다.
백작은 그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하던 말을 이으려 했다.
황제에겐 언제나 황후보다 아니, 황후뿐 아니라 그 어떤 것과 비교하더라도 에스타란토에 관한 소식이 우선이었다.
그러니 의원을 불러야 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하던 말을 잇는 것이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백작의 예상은 빗나갔다. 하드엘은 백작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차갑게 내려앉은 음성으로 명했다.
“넬슨, 물수건을 가져와라.”
* * *
“황후 폐하…….”
루안 목소리……?
“죄송합니다, 폐하. 죄송합니다. 흐윽, 윽.”
루안은 소리를 죽이며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내 뺨 위로 툭 떨어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우선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줘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루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흐릿한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것처럼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소리조차 낼 수 없어 울고 있는 루안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했다.
그녀의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달래 주지도 못한 채 난 비탄에 잠긴 루안을 그저 보고만 있어야 했다.
“장로께서 투옥되셨습니다. 더 이상, 더 이상은……. 폐하를 구해 드릴 방도가 없습니다.”
루안은 원망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저버리셨습니다.”
그 순간 하드엘의 잔상이 머릿속을 덮쳐 왔다.
모조리 내 기억엔 없는 모습들.
대부분 그의 뒷모습뿐이었다.
‘내가 왜 지금 그를 그리고 있는 거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슬프게 와 닿았다.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흐느끼어 몸부림치고 싶을 정도로 애통하였다.
“으윽…….”
“폐하, 아니 됩니다. 제발 눈을 떠 주세요!”
뜨거운 불길이 몸 안을 맹렬히 휘젓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폐하! 흐윽. 흑. 일어나셔야 합니다! 부인! 의원을, 의원을 불러 주세요! 당장!”
이젠 절규에 가까운 부름이었다.
날 깨우기 위해 루안은 내 어깨를 마구 흔들었지만 슬픔에 젖은 그녀의 간절한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 갔다.
* * *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을 떴다. 아무도 없는 듯 주변은 조용했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창문 너머로 흘러들어 왔다.
아까와는 다른 평화로운 분위기.
방금까지의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정신이 맑았다.
‘꿈이었구나.’
그다지 유쾌한 꿈은 아니었기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장로의 투옥이라니.
장로가 투옥되는 것은 플로리아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서야 일어나는 일인데. 하필 그렇게 쓰러진 뒤에 꾼 꿈이…….
“붉은빛이 펑 하고 터졌다고 했다니까!”
“정말?”
“그래! 거기 있던 기사들이 두 눈으로 직접 봤대!”
황후궁 기사들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이를 시작으로 방금까지 조용했던 황후궁 전체가 웅성거리는 소리들로 시끄러워졌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황후궁으로 들어오는 듯 발소리도 크게 울렸다.
어쩐지 곁을 지키는 시녀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럼 황후 폐하께서 마력이 있으셨던 거야?”
“간밤에 장로께서 왔다 가셨다는 소문도 있던데?”
“장로께서? 아! 그래서 우리가 그 밤중에 황후궁에서 쫓겨난 건가? 아니,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장로께서 왔다 가신 거라면 설마 그 마력이라는 게……!”
“폐하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조용히 하세요.”
그들에게 주의를 주는 마샤티아 백작 부인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미롭게 떠들던 기사들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곧이어 침실의 문이 열렸다. 백작 부인과 루안을 비롯한 시녀들이었다.
우울하고 축 처진 기색이 역력하던 그녀들은 멀쩡히 눈을 깜빡이며 자신들을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폐하!”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루안은 내가 깨어났다는 말에 앞에 있던 시녀들을 모두 제치고 제일 먼저 다가왔다.
“폐하…….”
루안이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훌쩍였다. 꿈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녀의 볼에 흐른 눈물을 직접 닦아 주었다.
“루안, 울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