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냉기가 흐르는 얼굴에 어울리는 거만한 말투였다. 하드엘은 어느새 나와 그 남자의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의 너른 등에 시야가 가로막혀 나는 금실 자수가 박힌 그의 검은 망토만 바라보아야 했다.
이런 일에 대신 나서 주는 사람이 아닌지라 조금 놀라웠다. 낯선 이가 말을 걸어 불쾌했나?
의문이 늘어 가는 사이 하드엘의 답을 들은 청년은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고는 황급히 돌아섰다.
하드엘은 멀어져 가는 청년을 끝까지 눈으로 좇았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걸음을 돌리며 내게 말했다.
“이만 가지.”
하드엘과 나는 광장을 벗어나 거리의 골목 구석구석을 살폈다.
통행에 불편함은 없을지, 이용권을 사용할 수 있는 상가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가 적절한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내게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이런 식의 불편한 동행은 이어졌고 그럼에도 실정 파악은 거의 완벽히 마무리되었을 때쯤, 우리는 거리와 거리를 잇는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무도회 준비도 거의 끝이 보이네요.”
“제국민들도 많이 들떠 있는 거 같더군.”
제국민들과 일 이야기뿐인 우리의 사무적인 대화에 한 소절의 노랫소리가 끼어든 건 다리의 중앙을 지날 때였다.
궁 안에 있다. 궁 안에 있다. 들끓는 불의 힘은 궁 안에 있다. 일렁이는 불씨가 타오를 때 우리 제국 축복을 맞이하리.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함께 섞여 들려왔다.
마침 지나가던 젊은 부부가 흥미로운 노랫말에 발목이 잡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다리 밑을 내려다보며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저 노래 말이야,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자주 불린다지? 나도 근래에 몇 번 듣긴 했는데.”
“근데 노랫말에서 불의 힘이 궁 안에 있다고 했잖아. 이상하지 않아?”
“그게 왜?”
“불의 힘이라면 에스타란토의 힘을 말하는 거잖아.”
“뭐? 에스타란토?”
“요즘 도는 소문이 그래. 에스타란토께서 오신 게 아니냐고.”
“그럼 궁 안에 에스타란토께서 계시다는 거야? 에이, 애들끼리 역사서나 마법서를 보고 마구잡이로 지어낸 노래겠지. 수백 년 동안 기록으로만 내려온 불의 힘이잖아. 게다가 난 들어 보지도 못한 소문인데?”
“당신은 이런 쪽으로는 귀가 어둡잖아!”
“그건 그렇지만, 아니 그러면 그런 소문이 진짜 돌고 있단 말이야?”
“그래! 게다가…….”
“게다가?”
“그 고귀한 신성의 상징인 붉은 별을 타고난 분이 바로 황후 폐하래!”
“뭐?!”
그들의 입에서 내 존재가 거론되는 순간 노랫말을 듣고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하드엘의 표정이 급격히 냉랭하게 굳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원래의 것보다도 무겁고 날카로웠다.
“궁으로 돌아가야겠군.”
그가 걸친 흑색 망토가 거세게 휘날렸다. 멀어져가는 하드엘의 뒷모습을 보며 난 조용히 미소 지었다.
‘소문이 아주 잘 돌고 있구나.’
하드엘 네가 날 죽게 버려둘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
그건 바로 모두가 나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
현재는 황실 내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플로리아가 에스타란토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은 그녀는 지키기 위함이었고, 플로리아가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우지 못할 경우 제국민들의 절망감을 덜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플로리아의 끝이 죽음이라는 걸 아는 이상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 비밀은 결국 나를 지키지 못할 테니.
오히려 이것을 이용해야만 내가 살 수 있다.
황후가 에스타란토라는 소문이 제국민들 사이에 퍼지게 되면 적어도 하드엘 그는 날 그렇게 쉽게 죽게 두진 못한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이중으로 일을 맡겨 꽤 많은 돈을 지불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일 처리였다.
하드엘을 데리고 소문이 도는 곳을 찾아다녀야 하나 걱정했는데, 노래로까지 만들어져 불리고 있을 줄이야.
소설에서 벨리타가 플로리아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 이용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기억해 둔 건 역시나 잘한 일이었다.
플로리아를 괴롭히는 방식이 너무나도 야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야비한 방식이 내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들킬 염려는 없었다.
플로리아에게 유익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 바닥에서 먹고사는 만큼 입은 무거운 사람들이니. 어차피 나 또한 발신 정보가 없는 밀지로 의뢰를 하기도 했고.
설사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임이 밝혀진다고 해도 소문의 근원으로 한 사람을 특정 짓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난 오늘 대담하게도 거리로 나온 하드엘에게 직접 이 소문을 듣게 해 줄 작정이었다.
넌 날 죽일 수 없다고, 날 죽게 버려둘 수 없다고 알려 주고 싶었으니까.
물론 굳이 두 귀로 직접 듣지 않아도 언젠가 소문이 퍼지고 퍼지면 황제의 귀에 들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내겐 없었다. 난 뭐든 해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들의 운명을 바꿀 수만 있다면.
톡.
그때였다. 손등 위에 두어 방울의 빗물이 떨어져 번졌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거리를 화사하게 비추던 햇살도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검게 피어 있었다.
“어머, 비 온다! 갑자기 웬 봄비가 내린담.”
방금 전까지 소문에 관해 숙덕거리며 이야기하던 부부가 황급히 비를 피해 어디론가 뛰어갔다.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원래 약한 몸이니 비를 맞으면 감기가 들 게 뻔했다.
나는 금세 굵어질 듯한 빗줄기 맞으며 앞서가는 하드엘을 빨리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드레스의 양옆을 잡았다.
그런데 꽤 멀리 앞서갔던 그가 오히려 방향을 틀어 내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드엘을 보았다.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어서 가시지요.”
그의 눈길이 빗물에 젖어 가는 나의 어깨에 머물렀다.
곧바로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폐하?”
내가 그를 부르는 동시에 하드엘의 길게 늘어진 검은 망토가 주저 없이 펼쳐졌다.
젖은 어깨 위로 펼쳐진 그의 망토가 내려앉았다.
나는 당혹감에 자리에 멈춰 섰다.
“……?”
뭐 하는 것이냐 묻고 싶었지만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눈빛으로 대신 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 멈춰 있는 나를 재촉하기라도 하는 듯 무작정 자신의 걸음을 옮겼다.
그 탓에 나는 바늘에 꿰인 실처럼 그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나는 하드엘과 다리 바로 너머에 있는 상가에 도착했다.
문이 닫힌 상가였지만 다리와 가장 가까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긴 제격인 장소였다.
“잠시 기다리고 계시오. 비를 피해 갈 수 있게 방우구라도 사 올 테니.”
그는 한마디 말만 툭 던진 채 돌아서려 했다. 나는 그런 하드엘의 소매 끝을 살짝 붙잡았다.
“네? 함께 비를 피하지 않으시고요?”
그제야 그가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손등에 닿는 빗물처럼 한없이 서늘하고 시리기만 한 눈빛이었다.
“빗줄기가 더 굵어질 것 같은데 한없이 여기 서 있을 순 없지.”
“그럼 제가…….”
“비가 더 내리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 할 것이 아니오. 내가 다녀오겠소.”
“잠시만요.”
나는 어깨를 덮고 있던 검은 망토를 도로 그에게 건넸다.
“돌려드릴게요. 전 이제 비를 맞지 않으니까요.”
* * *
‘비도 많이 오는데 왜 이렇게 늦지.’
여기저기 비를 피하려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서 있는 좁은 처마를 대신해, 옆 상가 처마 아래에 늘어선 사람들의 수도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났다.
그러고 보니 기사들도 어딘가에서 비를 맞고 있겠구나. 하드엘도…….
나는 고개를 돌려 젖은 어깨를 보았다.
축축하게 빗물이 스민 드레스가 살에 닿아 차가웠다. 바람이 스치면 그 냉랭한 감촉은 더욱 선명해졌다.
하드엘, 아깐 왜 갑자기 그런 행동을 했던 걸까.
“훗날 죽게 버려둘 거면서.”
먹구름이 낀 하늘을 보며 자그맣게 중얼거린 말이 어깨 위로 떨어진 빗물처럼 마음을 시리게 적셨다.
난 망토를 덮어 주던 그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드엘은 고작 비를 맞는 것에 동정심을 느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내가 지금 오지 않는 그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날 위해 몸을 던지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시오. 난 그대를 구할 생각이 없으니까.’
그리 매정한 말을 눈앞에서 들어 놓고서도.
하드엘이 되돌아오기를 기다릴수록,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갈수록 추위에 대한 감각은 점차 무뎌져 갔다.
나는 시선을 들어 봄비에 젖어 가는 거리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빗줄기가 굵어질수록 고르지 않은 길에 생긴 웅덩이가 깊어졌다.
아무리 하드엘이라도 이 비를 다 맞으면 감기에 걸릴 텐데. 아니지, 내가 뭔 상관이야? 감기에 걸리든 말든.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오는지 안 오는지 딱 그것만 확인하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나도 빨리 궁으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내가 처마에서 벗어나 겨우 한 걸음을 뗀 순간이었다.
“앗!”
무언가에 쫓기는 듯 뒤를 힐끔거리며 모퉁이를 돌아 달려오는 검은 머리의 남자 한 명을 미처 피하지 못해 그의 어깨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순식간이었다.
그 바람에 루안이 애써 골라 준 진주로 장식된 베일 모자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남자는 나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잡아 자신과 부딪친 탓에 넘어질 듯 휘청이는 나를 지탱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나를 놓아 주고 흙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건넸다.
“무례를 사과드리겠습니다. 모자는 따로 변상하겠습니다.”
“변상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모자가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실수로 일어난 일이니 그에게 책임을 묻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나는 베일이 벗겨지며 드러난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아닙니다, 레이디. 제가 당연히 변상을…….”
사람 좋게 생글거리던 남자의 표정이 멍하게 바뀌었다. 모자를 건네던 그의 손은 허공에서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조용한 정적이 찾아왔다.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호박색 눈동자가 빗방울이 맺힌 속눈썹 아래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델!”
그때, 남자가 튀어나온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델. 이 남자의 이름인 것 같았다.
“또 어디로 도망간 거야? 아델!”
여러 번 이름이 불리고서야 그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골치 아픈 영감, 지독하게도 쫓는구나. 사람을 풀다니!”
빚쟁이인가?
그는 재빠르게 뒤를 살피며 다급하게 말했다.
“레이디, 부디 내일 다시 이곳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네?”
그는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남기고 빠르게 멀어져 갔다.
“저기 있다! 아델, 제발 멈춰 봐!”
그를 뒤쫓는 듯한 이들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헉헉대다가 간발의 차이로 놓친 그를 다시 찾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어? 저 문양은…….”
그런데 앞서간 남자를 쫓는 이들이 두른 망토에 눈에 익은 문양이 있었다.
저 문양은 분명 에스타란토의 마법사들에게만 부여되는 마법 휘장이었다. 그럼 분명 저들은 신전의 마법사들일 터.
저 남자는 왜 마법사들에게 쫓기는 거지?
‘잠깐,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 남자를 떠올리자 왠지 모르게 머리 위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모자!”
나 지금 모자 도둑맞은 거야?
“변상은 안 해 줘도 모자는 돌려주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