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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4)화 (1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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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

“아… 승인.”

황실의 물건이니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저번부터 뭐만 하려 하면 하드엘, 그 이름이 날 가로막았다. 하여튼 도움이 안 돼.

“황후 폐하, 그럼 우선 안내를 먼저 해 드릴까요? 승인에 관해서는 차후에 문서를 올리시면 됩니다.”

“아니요.”

안 그래도 봄의 무도회까지 시간이 촉박한데 문서를 올려 느긋하게 승인이 떨어지길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하드엘이 사용을 금한다 하면 그때 가서 나는 또 계획을 새로 짜야 하는 것이니.

이런 건 얼굴을 보고 그 자리에서 직접 된다 안 된다 이야기를 듣는 것이 빨랐다.

“그 전에 폐하를 먼저 뵈어야겠어요.”

* * *

‘…이게 뭐지?’

달콤한 초코 케이크부터 사과 케이크, 치즈 케이크까지. 그 종류도 참 다양했다.

폭신한 크림 위 앙증맞게 올라간 체리가 케이크 위에서 사랑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얼씨구? 하트 모양으로 썰어 낸 과일까지?

“하.”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가지런히 놓인 포크와 찻잔을 황망히 바라봤다.

하드엘을 만나야겠다는 말을 했을 때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게 어쩐지 이상하다 싶긴 했다.

특히 편지를 부치고 돌아온 루안이 묘하게 들뜬 얼굴로 돌아다니는 게 제일 수상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하드엘을 만나는지 알고 있던 백작 부인도 황당한 듯 시녀들을 바라봤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가리키며 그녀들을 향해 물었다.

“이게 다 무엇인가요?”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차려 보았습니다.”

그녀들은 굉장히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맑은 그녀들을 보며 나는 내가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그래, 분명 이야기를 나누다 목이 탈 수 있으니 간단한 음료나 차를 준비해 달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절대 저런 걸 준비해 달라 한 적은 없었다. 특히 저 하트 모양 과일!

어딘가에서 꽃까지 흩날려 오는 이런 아름다운 분위기에서 단둘이 앉아 다과를 즐길 정도로 하드엘과 내 사이는 가깝지 않았다.

그저 업무상, 아주 잠깐 후원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인데.

나는 반짝이는 시녀들의 두 눈을 마주 봤다. 테이블 위에 모든 것을 치워 달라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를 써서 준비해 준 것일 텐데……. 그래 저 하트 모양 과일만 치워 달라 하자. 인간적으로 저건 좀 아니잖아.

“저기, 이거…….”

“이게 다 뭐지?”

뒤에서 들려오는 하드엘의 목소리가 오늘만큼 달갑지 않은 날은 없었다. 그는 시녀들의 인사를 받으며 테이블 위에 차려진 다과들을 훑었다.

“황후가 준비한 것이오?”

“아니요?”

“그럼 저절로 차려졌다 이 말인가?”

그는 하트 모양으로 썰어 낸 과일을 흘끗 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당신이 하필 지금 나타나는 바람에 저걸 치우지 못했다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꾹 참아 냈다.

“넬슨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소. 연례행사 때에 쓰인 물품들을 가져다 쓰고 싶다 했다고.”

하드엘은 의자 팔걸이에 오른팔을 걸치고 비스듬히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일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회색 눈동자가 내 얼굴에 닿았다.

“문서로 보내도 될 일이었을 텐데.”

“네. 알고 있습니다만, 빨리 승인을 받고자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혹시나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리폼보다 더 좋은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무조건 사용 허락을 받아 내야 했다.

“승인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그의 답을 기다리며 긴장감에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황후 폐하! 그건 뜨거운 차……!”

컥!

루안이 급하게 주의를 주었지만 이미 혀가 데인 뒤였다.

“황후 폐하! 괜찮으세요?”

내가 찻잔을 내려놓자 루안이 달려와 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넸다.

손수건으로 물기가 묻은 입가를 꾹꾹 눌러 닦고 있자니 그제야 앞에 앉아 있던 하드엘이 벌떡 일어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폐하? 왜 서 계세요?”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답도 없이 자리에 털썩 앉았다.

설마 놀란 건가? 데인 건 난데 왜 자기가 더 놀라는 거야.

“전 아무렇지 않습니다.”

“…….”

그는 어떠한 답도 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 걱정해 줄 리가 없지. 차라리 벌레 때문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는 것이 그에겐 더 자연스러웠다.

나는 입가를 닦은 손수건을 다시 루안에게 건네며 하드엘을 보았다.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시지요.”

“승인해 주겠소.”

“아, 승인. 네? 승인?”

이렇게나 빨리?

하드엘은 더 이상의 말을 잇지 않고 제 몸을 일으켰다. 나야 잘된 일이었다. 여기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눌 처지는 못 되지, 우리가.

난 손도 대지 않은 케이크와 하드엘의 찻잔 안 조금도 줄지 않은 연녹색 찻물을 보며 예의상 그를 한 번 붙잡았다.

“좀 드시지 않으시고요?”

“되었소.”

-피융

“?”

이게 무슨 소리지?

“꺅!”

시녀들이 괴성을 질렀다. 그녀들 앞에 화살 하나가 툭 떨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모두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또다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날아온 화살은 하드엘을 향하고 있었다.

“폐하!”

나는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어떻게 된 거지? 주변이 조용했다. 적막에 싸인 분위기 속에 가슴만 세차게 뛰었다. 너무 놀라면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했던가. 내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몸을 던지다니. 나 미쳤구나?

왜 아무런 생각도, 계산도 하지 못했는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단 사실을 몸소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픈 곳도 없는 걸 보면 다치지도 않은 것 같고.

근데 내가 왜 그랬지? 위험한 것을 보면 피하는 것이 본능인데. 난 왜 하드엘을 구하기 위해 나를…….

고개를 들자 부연 안개가 걷히듯 시야가 점차 뚜렷해졌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이 하드엘의 상의 단추였다.

분명 내가 몸을 던져 그를 구했는데 눈을 떠보니 내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가 황급히 그를 밀어 냈다.

발밑에는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모를 화살 하나 떨어져 있었다. 화살촉이 뭉툭한 것이 애초에 헤칠 의도는 없었던 듯싶었다.

“황후!”

내가 일어나려 하자 하드엘은 거칠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 때문에 의도치 않게 방금 전 벗어났던 그의 품과 다시 가까워졌다.

숨결도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난 하드엘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의 눈가 주위가 어느 때보다도 붉었다. 슬픔이 아닌 분노로 붉어진 눈가는 왠지 두려움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 하는 것이오? 죽을 수도 있었소!”

그가 내게 소리치며 화를 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언제나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며 칼같이 거리를 두던 남자였다.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야?

나도 구할 의도는 없었다. 그냥 몸이 먼저 나갔을 뿐. 그런데 하드엘이 화를 내는 걸 보니 어이가 없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나는 그를 구하려 했던 것인데.

“폐, 폐하!”

때마침 풀숲을 헤치고 기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보고 아연실색하여 흙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주, 죽여 주십시오, 폐하! 수, 수련 중에 화살이 엇나가는 바람에……!”

하드엘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나를 먼저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도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듯싶더니 곧이어 뒤에 있던 기사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칼 하나를 빼 들었다.

칼집을 스치는 쇠붙이의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웠다.

“죽여 달라더니 변명은 잘도 하는구나.”

기사는 번뜩이는 칼날을 흘끗 보더니 미친 듯이 몸을 떨며 눈을 꽉 감았다.

겁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하드엘이라면 진짜 눈앞의 기사를 죽일 수도 있었다. 실수 한 번에 사람의 목이 날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칼자루를 쥐고 있는 하드엘의 손을 꽉 잡았다. 언젠가 나를 죽이더라도 그게 지금은 아닐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가세요.”

“네?”

기사는 여전히 두려움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흐르는 눈물이 그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황후, 이거 놓으시오.”

“싫습니다.”

“싫다?”

“저자는 그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실수를 누구에게 했느냐가 문제이지.”

황제에게 화살을 쏜 것은 분명 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한 할 일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황제의 몸에 해를 가할 수 있었던 상황이니까.

하지만 화살촉이 뭉툭한 걸로 보아 분명한 실수인데 여기에서 목이 날아간다면…….

나는 차분히 호흡을 고른 뒤 하드엘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래. 설마 구해 주려던 사람을 죽이진 않겠지.

“폐하께서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한 번의 실수는 너그러이 품어 주십시오. 제가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 어딘가쯤에서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아주 잠시, 하드엘의 눈이 초점을 잃고 풀어졌다.

“저도, 시녀들도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활 때문이 아니라 폐하께서 정말로 저 기사의 목을 베실까 봐요.”

-팅

칼날이 바닥과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굉음을 내었다. 그가 칼을 버렸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순순히.

“가라.”

“네?”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 하였다. 지금 당장.”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기사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일어나 머리가 무릎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혹시나 하드엘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행동이 재빨랐다.

기사가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고, 한동안 이어진 숨 막히는 적막 속에서 하드엘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황후.”

새하얀 겨울보다도 시린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나는 답 없이 그의 뒷말을 기다렸고, 하드엘은 이런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바닥에 버려진 화살의 살대가 그의 발아래에 밟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셔졌다.

“앞으로 날 위해 몸을 던지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시오. 난 그대를 구할 생각이 없으니까.”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그의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구해 주려 했던 사람에게 이게 할 말이야? 난 이상할 정도로 쓰라린 마음을 감추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제 할 말만 남긴 채로 돌아서려는 그를 붙잡았다.

“뭐 하는 것이오?”

“폐하.”

하드엘은 내게 잡힌 팔목을 바라보더니 눈썹을 찡그리며 시선을 올렸다.

가슴이 먹먹했다. 답답했고 억울했다.

그렇게 목에서부터 울컥 치솟는 감정들을 모두 짓누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이럴 때는 고맙단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 * *

“폐하, 괜찮으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목을 죄는 타이를 풀었다. 집무실에 들어선 하드엘은 쌓인 서류는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잔뜩 흐트러진 모습으로 이마를 짚고 의자에 앉았다.

넬슨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되돌아오는 답도 없었다. 그는 후원에서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다쳤겠지.

내 쪽으로 뛰어들며 테이블에 부딪쳤으니 어디든 다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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