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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13)화 (1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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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

“넬슨, 황후에게 기별이 오면 잠행을 준비해라.”

“잠행이요?”

“황후와 함께 궁을 나설 것이다.”

“네?!”

누구와 접촉할지 모르니 혼자 나가게 둘 수 없었다. 함께 나가고자 하는 이유는 그게 전부였다.

놀란 넬슨을 뒤로하고 돌연 그는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았다. 여전히 그 자리엔 황후가 있었다.

자신의 시녀를 향해 환히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쏟아지는 햇살만큼이나 눈이 부셨다.

“폐하?”

그는 건조한 눈으로 플로리아를 바라봤다. 하드엘의 얼굴 위로는 한낮의 짙고 또 짙은 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 사이를 가르는 빛과 어둠은 분명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하드엘은 그 경계를 잘 알고 있었다.

절대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미 버린 마음이다. 그러니 그대는 내게 있어 그 무엇도 돼서는 안 돼.

그는 늘 그랬듯 같은 말을 주문같이 되뇌었다.

잠시 그녀의 손이 닿았던 어깨에 눈길이 닿았지만 하드엘은 곧바로 자신의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넬슨, 가자.”

* * *

“장로님,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에스타란토의 신전 제일 높은 곳에서 장로는 작게 난 창 너머로 화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원에 서 있는 황후와 나무 아래서 그런 황후를 응시하는 황제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말소리를 듣고 뒤에 있던 젊은 마법사는 장로에게 가로막힌 창문 너머를 보기 위해 더욱 안간힘을 썼다.

“어라? 흐뭇해하시기까지? 도대체 보고 있는 게 무엇인데요!”

“예끼! 이럴 시간에 마법 수련이나 더 하거라!”

“혼자만 보시고! 자꾸 치사하게 구시면 저 아델 그놈 안 찾습니다!”

“아! 아델! 그 녀석 행방은 추적이 됐느냐?”

“숨는 데에 도가 텄는지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나마 얼마 전 아벨리움에 들어왔다는 걸 어찌어찌 알아내기는 하였는데…….”

“아벨리움에 들어왔다고? 그게 정말이냐?”

“네. 그건 확실합니다.”

장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앞에 선 젊은 마법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됐어! 당장 광장 주변부터 샅샅이 찾아라. 어떻게든 찾아내야 해.”

* * *

종잇장 넘기는 소리만 들려오던 집무실에 갑작스럽게 시녀장이 찾아온 것은 어젯밤 일이었다.

나이 지긋한 시녀장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황제의 앞에 서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하드엘은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무슨 일이지?”

“황제궁 소속 시녀의 문제에 관해 황제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녀? 그에 대한 문제라면 그대가 뜻대로 처리하면 될 것을.”

“그게… 황제궁 소속의 시녀 한 명이 황실을 욕보이는 언행을 일삼았다고 하여…….”

하드엘은 눈썹을 찌푸리며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여전히 시녀장을 쳐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은 더욱 바쁘게 서류를 훑고 있었다.

“내 알만한 귀족가의 영애인가.”

“베르시트 남작가의 영애입니다.”

“베르시트 남작가? 입이 경망한 건 제 아비를 쏙 빼닮았나 보군. 그래, 그 입을 어떻게 놀려 댔지?”

“함께 있던 시녀를 추궁해 듣기로는 세간에 떠도는 황후 폐하에 관한 소문을 마치 사실처럼 이야기하고 다녔다 하옵니다. 또한 황후 폐하와 관련된 망설을 일삼은 것이 이번뿐만이 아닌 듯합니다.”

“뭐?”

그제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언짢음을 넘어서 그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황제궁 시녀가 그렇게 입을 놀리고 다니는 동안 시녀장인 그대는 도대체 무엇을 했지?”

“죄,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시녀장이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자 마음 한 편에 더욱 거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일개 시녀 따위가 감히 제국의 황후를 욕보이다니.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에스타란토의 힘 때문에 황후가 권력을 얻어 스스로 세력을 키울 수 없도록 경계해 온 건 사실이다.

황후의 위신을 짓밟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황후를 경시해도 된다는 것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황후를 욕보이는 것은 황제인 자신을 포함한 황실 전체를 욕보이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하드엘은 끓어오르는 분노의 정체를 그렇게 짐작하고 싶었다.

자신이 황후를 위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 버리면 그동안 황후를 외면하기 위해 했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테니까.

황실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함이지. 하드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뱉었다.

“목을 베어라.”

“!”

“나가지 않고 무엇 하느냐. 원하는 답이 아닌가?”

“그, 그것이…….”

“황실을 능멸했으니 마땅한 처사라 보는데. 할 말이 더 남았는가?”

“실은 황후 폐하께서 이를 모두 직접 들으셨습니다.”

“황후가 직접?”

하드엘은 며칠 사이 본 황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 해맑더니.’

혼자 앓았으면 앓았지 황후의 성정이라면 분명 듣고도 못 들은 척 넘어갔을 것이 뻔했다. 플로리아 그대는 그런 여인이니까.

하드엘은 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며칠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두통이 더욱 심했다.

“그래, 황후에겐 따로 위로의 말을 전할 테니 이만 나가 보거라. 쉬고 싶으니.”

“그것이… 황후 폐하께서 황제궁 시녀에게 직접 벌을 내리셨습니다. 일을 조용히 처리해 달라 제게 명하셨고요.”

“벌을?”

하드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시녀장을 향해 재차 되물었다.

“예. 황제궁 소속의 시녀는 황제 폐하의 명이 있어야만 벌을 내릴 수 있다고 말씀드렸으나 그렇다면 폐하의 명을 받아오라 하셔서…….”

피곤에 지쳐 보이던 하드엘의 눈이 번득였다. 황후가 벌을 내려? 그리 유하던 사람이?

“황후가 내린 벌이 무엇이더냐?”

“황제궁 소속 시녀의 자리에서 그녀를 파면시키고 네 달간 침묵의 벌을 주라 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떤 망언을 들었기에 황후가 이리 나온단 말이야.

그는 플로리아의 변화를 수상쩍게 여기기는커녕 그녀에 대한 걱정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 탓에 손에 들린 서류가 잔뜩 구겨졌다.

어차피 자신에겐 득도, 실도 없는 일이었다. 어떤 벌을 내려도 그것은 황실을 위한 마땅한 처벌로 비쳐질 것이다. 그는 화기를 억누르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폐하, 어찌할까요?”

어차피 내리려던 벌보다 정도가 약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 정도는… 이 정도는 그대의 뜻을 따라 주어도 괜찮겠지.

“죄의 무게에 비해 형벌이 가벼우나 황후가 내린 형벌치곤 가혹하구나.”

“그럼 폐하께서 처음에 내리신 벌을 따를까요?”

“아니, 내가 내린 벌은 거두마.”

“그렇다면 어찌할까요?”

“명을 받아오라 했으니 벌을 대신해 명을 받아 가야지. 황후의 뜻대로 하라. 그것이 내 명이니라.”

* * *

난 펜을 잡고 몇 시간째 종이 위에 낙서 같은 선만 끄적거렸다. 검은 잉크가 하얀 백지 위에 번져 나갔다.

‘괜찮소?’

그의 목소리가 내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왜 자꾸 감정도 서려 있지 않은 그 목소리를 반복하여 떠올리는지 종일 고심해도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너무 기가 막혀서? 그것도 아니면 너무 의외여서?

수많은 질문을 던져도 확실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예의상 내게 어쩔 수 없이 한 말일 게 뻔했다. 별 뜻 없이 뱉은 말을 되새기는 것 자체가 사실 우스웠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유도 없이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이 느낌이 상당히 거슬려 떨쳐 내고 싶었다. 잊으려 해도 다시금 메아리쳐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도 무시하고 싶었다.

“황후 폐하!”

마침 루안이 신나게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녀는 내 앞에 와서 몸을 낮추더니 나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데도 조용히 속삭이듯 말을 꺼냈다.

“찾았습니다.”

“벌써요?”

루안이 내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그 안에는 돈만 주면 어떤 소문이라도 사실처럼 퍼뜨려 주는 기이한 재주를 지닌 이들의 신상이 적혀 있었다.

사는 곳부터 직업까지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내가 아는 실상은 이와 달랐다.

이들 때문에 플로리아에 대한 악질적인 소문이 아주 발 빠르게 돌았지. 마음 같아선 당장 재판정으로 끌고 오고픈 마음이었다.

하나 내가 노리는 것은 이들이 아니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맨 아래 서랍장에서 두 장의 봉투를 꺼냈다.

“폐하, 그런데 이 사람들은 누구예요?”

“음, 내 동아줄이 되어 줄 사람들?”

나는 자세한 말을 생략했다. 루안이 알면 놀라 소스라칠지도 모를 일이니.

“루안, 내가 한 가지 더 부탁을 해도 될까요?”

“네! 뭐든지요!”

난 그녀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루안은 나의 오른손에 들린 하얀 봉투와 왼손에 들린 상앗빛 봉투를 번갈아 봤다.

“두 봉투를 저들 중 아무에게나 각기 보내면 됩니다. 발신인은 꼭 비워 둬야 하니 그냥 이 상태 그대로 부쳐 줘요.”

루안은 어리둥절해했지만 별다른 것을 묻지는 않았다. 내겐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어도 답을 해 줄 수 없었으니까.

나는 고맙단 말을 잊지 않으며 루안을 향해 미소 지었다.

‘벨리타가 믿고 쓰는 이들이니 일 처리 하나는 확실하겠지.’

그렇게 루안이 내 명을 받아 서재를 나가고 그녀의 빈자리를 백작 부인이 대신 채웠다.

이제 일하자, 일. 나는 낙서투성이인 종이를 구기고 새 종이를 펼쳤다.

봄의 무도회. 어떤 방향으로 준비하는 게 좋을까.

우선 제국민들을 위한 봄의 무도회는 아낌없이 베풀어 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악사부터 시작하여 광장에 장식될 붉은색 커튼 하나까지 허투루 고르지 않을 것이다.

제국민들은 봄의 무도회가 처음이고 그들에게 황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번 무도회는 크고 성대하게 열어 주는 게 맞았다.

오히려 검소한 황후인 척 구는 것이 이쪽엔 더 독이 될 것이다. 잔뜩 기대한 황실 무도회가 조촐하기 짝이 없다면 한바탕 욕만 들을 게 뻔하지 않은가.

그래, 궁 밖에서 열리는 무도회는 그렇게 방향을 잡고 간다고 치고. 귀족들이 참석하는 봄의 무도회는 어떻게 하면 좋지?

궁 안에서 열릴 무도회를 구상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사치스러워도 문제, 너무 초라해도 문제. 여러모로 참 골치 아픈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화려한 무도회를 좋아하면서도 막상 배정된 황실 예산을 전부 사용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 플로리아를 국고만 낭비하는 사치스러운 황후라 손가락질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약하여 검소하게 무도회를 꾸미면 안목이 없다는 둥 별의별 트집을 다 잡겠지.

예산을 아끼면서도 무도회는 화려하게. 이 방법이 가장 좋은데 이를 실현할 수 있을 만한 계획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나는 눈을 굴렸다. 분명 길이 있을 것이다.

“폐하, 차라도 한 잔 내올까요?”

“아! 리폼!”

나는 책상을 쾅 치고 일어섰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황실 연례행사 때마다 쓰인 장식은 버리지도 다시 쓰이지도 못하는지라 애물단지가 된 채로 궁 안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리폼이요? 리폼이란 차가 있나요?”

백작 부인은 당황스러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부인!”

“네, 폐하.”

“혹시 예전 무도회 때 썼던 장식들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요?”

“예전에 썼던 장식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한참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찾을 일이 없었을 테니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별궁 지하 창고에 있지 않을까요? 쓰기도 버리기도 애매한 것들이라 그곳에 다 넣어 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귀중한 것들은 따로 보관을 해 두었을 것이고요.”

“내가 써도 상관없는 것들이죠?”

“그것들을 어디에 쓰시려고요?”

“리폼하려고요.”

“리폼이요? 차 이름이 아니었나요?”

리폼을 모르나? 아, 이 세계에는 없는 개념이구나! 차라리 잘되었다. 그들에게 이 방법이 신박하게 다가갈 테니.

“부인, 날 지금 당장 그 창고로 안내해 줄 수 있나요?”

“네 물론이죠, 폐하.”

신이 나서 당장 몸을 일으키려는 나를 멈춰 세운 것은 백작 부인의 뒷말이었다.

“하지만 송구스럽게도 그것의 사용에 있어서는 황제 폐하께 정식적으로 승인을 받아야 할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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