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벨리타의 얼굴에 가늘게 미소가 떠올랐다. 내 의견이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님은 확실했다. 나를 곤란에 빠뜨리려는 것이겠지.
“벨리타 영애, 그것은 황후 폐하께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실 겁니다.”
역시 플로리아가 난감할 때 나서주는 건 레이샤뿐이네.
데보니안 가문은 칸제로스 가문 다음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는 가문이었다.
그런 데보니안가에 손해를 입힌 판결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그 가문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과 같은 일이고 아무리 황후라 해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예민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 곤란한 질문은 분명…….
‘소설과 똑같아.’
그렇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뻔했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기 전에 재빨리 벨리타의 행동을 먼저 살폈다.
벨리타는 눈을 요리조리 굴리더니 눈치를 보며 찻잔의 밑을 왼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벨리타 양, 이유 없는 악행에 두 번은 안 당해.’
벨리타의 왼손이 기울어졌다. 약간 식어 미지근한 찻물이 내 쪽으로 흘러넘치려 할 때, 나는 실수를 가장해 그녀의 왼손을 쳐 냈다.
“악!”
벨리타의 붉은 드레스 위로 찻물이 쏟아졌다. 자신의 긴 머리칼을 타고 흐른 찻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원래라면 시녀들이 성심껏 골라 준 내 드레스 위로 쏟아졌겠지. 곤란한 질문에 버벅거리며 찻물까지 뒤집어쓴 내 꼴을 그렇게나 보고 싶었을까?
“어머! 어쩜 좋아.”
나는 원래의 소설 속에서 벨리타가 플로리아에게 했던 대사를 그대로 내뱉었다.
그녀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치받는 화를 삭이느라 애를 쓰는 모습이 참 우스웠다.
“벨리타, 혹시 애써 고른 드레스가 더러워져 화가 난 건 아니죠?”
“…….”
“이걸로 닦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디와 부인들이 부산스럽게 다가와 나와 벨리타 주위를 에워쌌다.
나는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싱긋 미소 지었다. 이제 답을 해 줄 차롄가?
“아! 벨리타 영애, 그리고 아까 내게 한 질문 말인데요.”
“네?”
“모두에게 공평한 판결이 있을까요? 이런 사건 같은 경우엔 한 명이 공평하다고 말하면 분명 다른 한 명은 불공평하다고 할 것이고, 반대로 한 명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은 공평하다고 할 테니까요. 그러니 기준이 되는 ‘보수적인’ 제국법을 따르는 수밖에요.”
* * *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그렇게 보이나요?”
“네. 어제 티 파티에 다녀오신 후로 계속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루안이 눈치챌 정도로 내가 티를 냈던가? 하기야. 통쾌하긴 했다. 대신 벨리타는 아주 불행해 보였고.
그런 악녀 같은 행동이 내 취향은 아니지만 적어도 벨리타 앞에선 예외를 둘 생각이었다.
애초에 너그러워질 필요가 없었다. 자비나 인정은 벨리타의 앞에서 쓸모없기나 마찬가지니.
“아으! 통쾌해!”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통쾌하다고 들려오는 말소리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이 커졌다.
나는 루안과 황후궁 복도를 걷다가 멈춰 서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서재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샤넌 말이야. 오늘 갑자기 황제궁 시녀 자리에서 쫓겨났대!”
“정말? 갑자기 왜?”
“글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시녀장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대.”
“그동안 황제 폐하를 모신다며 의기양양해서 다른 곳에 배정된 시녀들을 무시하더니 어우, 고소하다 고소해!”
서고에 있는 책을 정리 중인 시녀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들의 대화 속에서 나는 익숙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샤넌. 내 명대로 시녀장이 샤넌에게 벌을 준 모양이었다. 열흘이 지나지 않았으니 정해진 기한을 넘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잠깐. 파면? 하드엘이 그걸 허락했다고?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도대체.
“루안, 가요.”
루안은 대화 중인 시녀들에게 헛기침 소리를 내어 나의 존재를 알리려 하다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뒤따랐다.
환한 빛을 품은 출구로 나아갈수록 내 눈가는 찌푸려졌다. 하드엘에게 딴 속셈이 있는 게 아닐까 가장 먼저 그게 의심되었다. 갑자기 날 불러낸 것도 수상하던 차였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왜 하필 화원으로 부르신 걸까요?”
“글쎄요.”
루안은 내키지 않는다는 어투로 툴툴거렸다.
그렇다. 난 지금 만사 제쳐 두고 황제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하드엘이 플로리아를 찾을 때마다 기뻐했던 루안도 지금 표정을 보건대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차이가 있다면 난 그냥 하드엘을 만나러 가는 자체가 불편한 거고, 루안은 하필 날 화원으로 부른 것을 불쾌해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녀의 불쾌감은 화원의 다리에서 플로리아가 다친, 단지 그 사실 하나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조심하셔야 해요. 또 다치시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루안, 걱정 말아요. 지금 내 발목은 아주 튼튼하니까.”
그나저나 하드엘은 진짜 날 왜 부른 걸까. 어제도 보고 오늘도 보고. 이 정도면 매일 만난다 말해도 무방할 듯했다.
눈 밑이 거뭇하니 어쩌니 어제 그런 이상한 말을 늘어놓은 게 오늘에 와 더욱 후회스러웠다. 그때 차라리 조용히 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아, 모르겠다!
괜스레 찾아든 찜찜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나는 약속 장소를 향해 갔다.
만개한 꽃들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화원의 가장자리에 심어진 나무에서 피어난 꽃잎들도 공중에 흩날리고 있었다.
첫눈이 내리듯 세상이 온통 하얬다.
화원 한가운데에 위치한 다리 위에는 하얀 제복을 갖춰 입은 하드엘이 서 있었다.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하드엘의 곁에 있던 넬슨 백작이 나를 먼저 발견했다. 뒤이어 하드엘도 백작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가만히 나의 눈을 응시하더니 백작과 루안을 포함해 주위에 있던 모두에게 명했다.
“다들 물러나 있거라. 황후와 긴밀히 할 얘기가 있으니.”
긴밀히, 그와 나 사이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더불어 그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며 나눌 이야기도 없었다.
이 상황을 이상하게 여긴 난 모두가 물러나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요?”
“황제궁 시녀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했다 들었소. 어젯밤에 시녀장이 그러더군. 일을 조용히 처리해 달라 했다고.”
설마 지금 황제궁 시녀에게 벌을 내린 일로 나한테 한마디 따지려는 건가? 아니면 자기 시녀에게 벌을 주는 걸 허락해 줬다고 생색이라도 내려고?
어쩐지. 순순히 내 뜻을 따라 주는 게 영 미심쩍었다. 오늘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던 거지.
“아 그건…….”
“괜찮소?”
“네?”
잘못 들었나, 그도 아니면 내 귀가 이상한 건가 싶어 그를 향해 되물었다.
“괜찮은 것인지 물었소.”
아까와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시녀가 함부로 입을 놀린 것을 직접 들었다 하기에.”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다정한 말투는 아니었지만 분명 그가 묻고 있었다.
괜찮냐고.
하드엘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드엘이 그럼 됐다는 듯 무심하게 화제를 돌렸다.
“봄의 무도회에 관해 황후와 의논하고 싶은 게 있소.”
“봄의 무도회요?”
아, 그 욕만 먹는 무도회를 말하는구나. 마침 어제 루안에게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곧 봄의 무도회가 열리니 내가 바빠질 거라고.
시녀의 일 때문이 아니라 봄의 무도회 때문에 주변을 물리쳤다는 걸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봄의 무도회는 매년 봄마다 열리는 사교계 행사였다. 신년회 이후 봄의 시작을 알리는 첫 행사인 만큼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봄의 무도회는 오롯하게 황후의 소관으로 개최되는데 황후의 재량과 기품을 뽐내고 권력을 보여 줄 수 있는 행사로 여겨진다.
하지만 플로리아에게는 예외였다. 소설 속 플로리아에게 봄의 무도회는 권력을 보여 주기는커녕 잘하든 못하든 욕만 먹는 고통스러운 연례 행사였다.
“이번 봄의 무도회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제국민들도 함께 즐겼으면 하는데.”
“제국민들이요?”
“궁 안에서는 원래대로 귀족들을 위한 행사를 열고 궁 밖에서는 제국민들을 위한 행사를 여는 게 어떨까 싶소.”
나와 의논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담담하게 전하는 그의 말은 명령이었다. 그리고 황제의 명을 거절할 수 있는 이는 이 아벨리움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역에 힘써 주는 제국민들 덕분에 아벨리움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는데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필요하다 생각되오.”
“함께 즐기면 좋지요.”
그래, 좋지. 제국민들과 함께 즐기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난 지금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다리 위에서 떨어져서 한동안 앓아누워 있었다는 걸 그는 잊어버린 걸까?
게다가 봄의 무도회가 얼마 안 남았으니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도 어제 루안이 말해 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일거리를 더해 주다니. 이거야말로 황제의 갑질이고 횡포였다.
‘가만 보니 벨리타보다 더 악독하네.’
나는 은근히 하드엘을 노려보다 그의 눈썹의 까딱 올라가는 것을 보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눈을 피했다.
-콜록
“?”
“갑자기 기침이……. 최대한 준비해 보겠습니다.”
낯빛까지 바꿔 가며 아파 보이게 기침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준비해 보겠다는 말끝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조금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이란 말을 덧붙였다. 그가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 근데 하드엘 어깨에 저게 뭐지? 뭐가 묻었는데.
“폐하, 잠시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하드엘의 얼굴 근육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내가 민망해질 정도로.
“아, 꽃잎이네요.”
플로리아와 살짝 닿는 거조차 싫어하는구나.
황실 도서관에서의 일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이리 대놓고 싫은 티를 내니 썩 달갑진 않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팔을 뻗어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꽃잎을 털어 주었다.
내가 물러나자 하드엘은 자신의 표정만큼이나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국민을 위한 무도회 준비도 잘 부탁하오.”
재고의 여지도 없는 단호한 말투였다. 난 억지로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기억 상실인 거 벌써 잊은 거야?, 아픈 황후한테 일 더 시킬 거야? 등의 말을 표정에 담았지만 애석하게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난 뒤돌아선 그의 뒤통수를 보며 속으로 욕을 했다.
‘하, 제국민들을 위한 행사면 불가피하게 궁 밖을 나가야 할 텐데.’
아무리 관련자들에게 실태 조사를 부탁한다 해도 실정을 알기 위해서 직접 한 번은 나가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 이제 귀족들 행사도 준비해야 하고, 하드엘이 추가시킨 일거리 때문에 궁 밖에 나가서 실태 조사도 해야 하고, 궁 밖에 나가려면 잠행 준비도…….
“아, 황후.”
잘 가고 있던 하드엘이 얼마 안 가서 나를 부르며 도로 다가왔다. 또 무슨 일을 더 시키려고 하는지 이젠 겁이 났다.
할 일을 손으로 꼽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접었던 손가락을 폈다.
“제게 더 할 말이 있으신가요?”
“내가 생각이 짧았군. 후에 실정을 파악할 때 동행하도록 하지.”
“네?”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 혼자 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아니오. 몸도 좋지 않을 테고. 그러니 함께 돕도록 하겠소.”
갑자기 엉뚱하게 같이 궁 밖에 나가자니? 엄청난 친절을 베푼 그 남자가 온기가 깃들지 않은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함께요?”
나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하드엘과 하루 종일 궁 밖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닥치지도 않은 일에 벌써부터 정신적으로 힘들어졌다. 어색하지라도 않던가.
그런데 잠깐, 하루 종일? 생각해 보니 이거…….
험난한 앞날을 상상하다 침울해지려 할 때였다. 순간 내게 기회가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하드엘의 제안을 이용해 플로리아의 운명을 바꿔 줄 아주 좋은 기회가.
“좋습니다. 저야 폐하께 감사할 따름이죠.”
“때가 되면 백작을 통해 기별을 보내 주시오.”
“네. 그리하겠습니다.”
아까와 달리 긍정적인 쪽으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꽤 재밌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하드엘. 그 남자는 그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벨리타가 내 소문을 퍼뜨릴 때 이용한 사람들이 누구였더라?’
그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 즈음 멀리 떨어져 있던 루안이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폐하!”
“루안,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요? 뭐든 말씀하세요!”
“사람을 찾아 줘야겠어요. 비밀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