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폐하, 어쩜 이렇게 아름다우세요.”
“루안, 폐하께는 이 귀걸이와 목걸이도 괜찮지 않아요?”
‘이제 그, 그만!’
티 파티로 인해 황후궁 시녀들은 굉장히 들떠 있었다. 그녀들은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내가 단연 돋보여야 한다며 모두 합심해 나를 치장했다.
고맙긴 했지만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나도 조금씩 지쳐 갔다.
“황후 폐하께서는 둘 중 뭐가 더 마음에 드세요?”
루안이 오른손에는 에메랄드빛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왼손에는 자줏빛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들고서 물었다. 이러다간 단장이 끝날 때쯤 해가 저물어 있을지도 모른다.
“난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아주 마음에 쏙 들어요.”
혹시나 이것도 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는 말이 또다시 시녀들 입에서 나올까 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소매가 벌어진 연하늘색의 풀 드레스와 과하지 않은 액세서리.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차림이었다.
“황후 폐하, 레이디 벨리타와 초대받은 영애들이 모두 모였다 합니다.”
마침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해 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짓는 시녀들을 뒤로하고 나는 루안이 건네주는 꽃으로 장식된 모자를 살짝 눌러 썼다.
“다녀올게요.”
챙이 넓은 모자는 오늘따라 유독 센 햇빛을 가려 주는 데에 제격이었다. 덕분에 눈가를 찌푸리지 않고 주변을 살필 수가 있었다.
봄이 깊어진 건지 눈앞에 펼쳐진 들판이 저번보다 푸르렀다. 땅 위로 돋아난 새싹들도 어느새 성큼 자라나 있었다.
절로 나른해지는 기분 좋은 날씨에 가만히 손을 뻗자 따스하고 보드라운 바람이 스쳤다.
꽃향기가 실린 바람에 오늘의 하늘과 꼭 닮은 드레스 자락이 나울거렸다.
내 주변을 맴돌던 바람은 곧 방향을 바꾸어 길에 늘어선 나무들을 흔들었고 그에 가지 끝에 달려 있던 새하얀 꽃잎이 하늘거리며 공중으로 나부꼈다.
나는 손등에 살포시 내려앉은 꽃잎 한 장을 바라보았다.
내 상황이 어떻든 간에 아벨리움의 봄날은 포근하고 고요했다. 새들의 지저귐 소리도 그 평온한 분위기에 스며들어 있었다.
플로리아의 앞날도 이런 봄날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은 막연한 기대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살아 있기만 해도 다행인 상황이니까. 죽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고통스러울까?
사실 아직 믿기지 않았다. 이 몸 안에 에스타란토의 힘이 잠들어 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죽게 된다는 것도. 앞으로 플로리아에게 벌어질 끔찍한 일들도 전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은 이렇게나 잠잠한데. 죽음. 죽음이라…….
너무 현실감이 없어 오히려 그 단어가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나는 플로리아처럼 죽지 않을 것이다. 괴롭힘에 가만히 당해 주지도 않을 거고.
나는 손등에 놓인 꽃잎을 후 불어 날려 보냈다. 꽃잎 한 장은 나풀대다 바닥에 떨어지는 듯싶더니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난 잠시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뗐다. 에스타란토, 하드엘 그리고 플로리아의 죽음. 그들 사이에 얽힌 타래를 풀어야 했다.
그런데 마법서에 따르면 에스타란토의 불의 힘은 수백 년간 기록으로만 내려와 이젠 전설이 되어 버린 마법이라고 했는데.
운명을 바꿔 죽지 않게 되었는데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래서 만약 그런 힘을 깨우고 나서도 계속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거라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황후.”
이제 막 황후궁을 벗어나려던 차에 갑작스럽게 귀에 익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없이 차고 시린 음색.
게다가 날 황후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하드엘.
나는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후궁의 정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그가 서 있었다.
또 그 ‘우연’인가.
그는 요즘 우연을 가장해 나를 찾아왔다. 황실 도서관에서 만났던 걸 포함하면 일주일 사이 그를 만난 날이 벌써 네 번.
그때마다 그는 내게 먼저 다가왔고 그러면서도 선을 긋고 내게 궁금한 것만 물은 채 냉정히 돌아섰다.
에스타란토의 힘에 관한 애매한 물음에 애매한 답을 내어 주는 것. 최근 들어 그것이 나의 일이었다.
소설 속에서 플로리아는 하드엘이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종종 숨어서 하드엘을 지켜보곤 했는데 지금의 나로선 그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많이 마주치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나를 호위하던 기사들과 하드엘을 호위하던 기사들 모두는 이미 그를 향해 그리고 나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나저나 하드엘도 참 끈질긴 사람이었다. 고작 마법서 몇 권 본 걸로 이렇게나 사람을 달달 볶다니. 어찌 되었건 황실 도서관에서 넘어질 뻔한 걸 부축해 준 건 사실이니까 뭐라 욕도 못 하겠고.
근데 저렇게 ‘황후’하고 부르면 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부르세요? 이건 너무 뜬금없었다. 듣고 있습니다? 이것도 좀…….
“황후.”
그는 내가 대답이 없자 재차 나를 불렀다.
“예, 폐하. 말씀하시지요.”
결국 고민하던 시간이 무색하게 생각나는 대로 무작정 대답해 버렸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었기에.
그래도 나름 괜찮게 답한 것 같은데?
하드엘은 당당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찬란한 햇빛 아래에서 그의 회색빛 눈이 차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떠한 말이라도 꺼내기를 기다리며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하드엘이 나를 바라보듯 나 또한 그를 보며 그렇게.
의미 없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동안 하드엘도 나도 마주 본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또다시 실바람이 불어왔다. 하드엘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그의 체취가 실려 있었다.
아주 잠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맡았던 달달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빨리 그의 물음에 답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에 문득 의문 하나가 더해졌다.
이건 무슨 향일까? 익숙한 향기 같은데 어디에서 맡아 본 향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분명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맡아 본 향인데.
“후궁에 가는 길이오?”
드디어 하드엘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몸에서 배어나는 향기가 무엇인가에 집중해 있던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그를 보았다.
“네. 오늘 벨리타 영애의 티 파티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렇군.”
“폐하, 죄송하지만 먼저 가 보아도 될까요? 예상보다 늦어져서요.”
이렇게 붙잡고 있는 누구 덕에 아주 많이 늦어진 것이었지만 굳이 그 말을 덧붙이진 않기로 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에스타란토에 관한 질문을 안 꺼내지? 항상 빙빙 돌려서 묻더니.
뭐, 나야 좋았다.
나는 그의 침묵을 긍정의 답으로 받아들이고 떠나기에 앞서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잠깐.”
“?”
그런데 하드엘의 한마디가 이런 내 행동을 저지했다.
난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후궁으로 가는 길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도 그쪽으로 가던 길이오.”
내가 어쩌다 하드엘과 나란히 걷게 된 걸까.
후궁까지 가는 길은 참 멀고도 멀었다. 혼자 갔다면 풍경이라도 즐기면서 걸었겠지만……. 나는 옆에 선 하드엘을 힐끔 바라봤다.
별궁에 간다더니 도대체 어디까지 같이 갈 생각인지. 묻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듣기로는 어제 황실 도서관을 다시 찾았다지?”
“네. 아무래도 기억을 잃었으니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서요.”
“…….”
일주일 사이 네 번의 만남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함께 있었던 적은 없었다.
하드엘과 나의 대화는 맥락 없이 시작되어 짧게 끝나기 일쑤였다. 그의 물음으로 시작해 나의 대답으로 마무리되는 그런 식이었다. 그 후엔 이렇게 또다시 침묵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 순간만큼은 에스타란토에 관한 질문이라도 대놓고 해 주길 바랐다. 어색한 공기에 숨이 막힐 지경인지라.
그냥 이번엔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볼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그런 적당한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아 맞다!
“저기 폐하, 불면증으로 잠을 못 주무실 땐 따뜻한 라벤더 차를 드셔 보세요. 꽤 도움이 되거든요.”
소설 속 하드엘이 불면에 시달렸던 게 고맙게도 지금 딱 생각이 났다.
그는 항상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밤을 새워 업무를 보는 게 그의 일과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지독한 불면의 주원인은 아마 플로리아였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위에 설까 봐 무척이나 불안했을 테니.
이유가 어찌 되었든 당장은 대화 주제가 생겼다는 게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좀 뜬금없는 흐름이긴 했지만.
아니지. 애초에 대화의 흐름이랄 게 없긴 했다. 근데 표정이 왜 저래?
하드엘은 달갑지 않은 이야기라도 들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내 쪽으로 몸을 숙이더니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내가 불면에 시달린다는 걸 황후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오?”
나는 흠칫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실수한 건가?
아무리 황제의 건강이 비밀에 부쳐진다고 하지만 설마 이런 불면증까지 비밀일 줄은 몰랐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의 대답을 재촉했다. 책에서 봤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도 없으니 곤혹스러웠다.
“그게… 다크서클!”
“다크서클?”
“네! 다크서클! 항상 눈 아래가 거뭇하신 게 영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아서요.”
“눈 아래가 거뭇…….”
나름은 최선의 대답이었으나 하드엘은 꽤나 충격받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맥락 없는 말조차도 이어지지 않아서 우린 말 없이 후궁까지 함께 걸었다. 정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황후 폐……! 황제 폐하!”
후궁 정원에 모여 있던 영애들은 내 옆에 하드엘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하드엘이 그녀들의 인사를 받고서 별궁으로 발길을 옮기고 나서야 나는 그와 떨어질 수 있었다.
별궁이 후궁 뒤편에 있다고는 하나 적당히 자기 할 말만 하고 먼저 갈 줄 알았지 이렇게 후궁까지 사이좋게 올 줄은 정말 상상치도 못했다.
“황후 폐하와 황제 폐하께서 나란히 후궁까지 오셨어.”
“황제 폐하께서 여기까지 황후 폐하를 모셔다드린 걸까?”
“꺅! 어쩜 좋아. 소문과 달리 너무 자상하시다.”
“에이 설마. 동선이 겹치신 거겠지.”
뒤에서 귓속말로 은밀히 숙덕거리는 영애들 사이를 비집고 한 영애가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그녀는 목소리마저 차분하고 단아했다. 그녀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라면 청록빛의 잔디밭이 꽃밭으로 변한 데도 믿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플로리아의 얼굴을 처음 마주했을 때와 버금가는 충격을 받았다.
플로리아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 그녀는 하얀 꽃잎 위에 맺혀 있는 반짝이는 꽃 이슬을 닮아 있었다.
레이샤. 칸제로스 가문의 레이샤 공녀가 확실했다. 플로리아가 죽고 황후의 자리에 오르는 그 공녀.
레이샤 공녀는 아벨리움 내 고귀한 가문의 영애임에도 신분의 높낮음을 구별하지 않는 고운 성품과 지혜로움으로 백성들과 귀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레이디였다. 제국민들이 바라던 황후의 재목이기도 하였고.
어느새 레이샤가 내 앞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치마 아랫단을 살짝 잡아 사뿐히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레이샤의 긴 속눈썹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또 다른 영애가 붉은 드레스를 뽐내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눈 아래 점, 드레스만큼이나 붉은 입술, 교활하게 올라간 입꼬리.
“황후 폐하께서 이렇게 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너구나, 벨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