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하드엘을 만났을 때 샤넌 얘기를 했어야 했나?’
아차, 싶었지만 나는 얼마 안 가 방금의 깨달음을 정정했다.
샤넌의 일은 시녀장에게 맡긴 일이니 난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샤넌에게 벌을 주려면 시녀장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황실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만약 그럼에도 하드엘이 샤넌을 처벌하지 못하겠다 하면 직접 찾아가 모욕죄로 그녀를 재판정에 넘기겠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항이… 형법 제311조 아니지, 이건 대한민국 형법이고. 아벨리움에서 황실 모욕죄가 형법 제1-81조. 이거였던가? 일단 그 일은 소식이 들려오면 그때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자.
또다시 황실 도서관을 찾는 길. 나는 여러 생각을 떨치며 두 손으로 볼을 두드렸다.
가뜩이나 생각할 게 많은지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곧 벨리타의 티 파티가 열리기도 하고.
“폐하,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왜 뺨을…….”
뒤따라오던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근심을 가득 담아 물었다.
나는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스르르 내렸다. 내가 괜히 볼을 쳐서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멀쩡함을 보여 주기 위해 명랑하게 답했지만 부인의 표정을 보건대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필요한 서적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올 테니 폐하께서는 황후궁에 돌아가셔서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
역시. 소용없는 게 맞았어.
“직접 가서 좀 더 둘러보고 싶어요. 저번에는 조금 정신이 없었거든요.”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겉으로는 쉽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황실 도서관을 지키는 기사들의 인사를 받고 내가 홀로 도서관 안에 들어갈 때까지 염려스러운 눈빛을 숨기지는 못했다.
앞으로는 사소한 행동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습관이라 바로 고치긴 힘들겠지만.
책으로 가득 찬 황실 도서관은 아주 조용했다.
아무도 없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인가 싶었지만 당연한 정도를 넘어서 이 고요함은 꼭 물속 같았다.
작은 소음도 허락되지 않는 이곳에서 내 존재가 선명해졌다.
마법과 관련된 서적이 있던 책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발자국 소리뿐만이 아니라 바닥에 드레스가 끌리는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혼자 왔을 때 더 오래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 창가를 지나며 난 괜히 하얀 커튼을 툭 건드려 보았다.
빛이 통과할 정도로 얇은 커튼은 작은 움직임에도 하늘거렸다. 곧 비껴든 햇살 속에서 먼지가 부유했다.
“여긴 먼지도 예쁘게 날리네. 그나저나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천천히 가라앉는 먼지들을 보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몇 걸음을 더 가니 무수한 마법서가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분 탓인지 서적의 양이 저번보다 많아진 느낌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책을 한 권씩 훑어 가며 제목을 읽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마법서가 많았다. 하지만 대체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 표지가 화려한 것들은 대부분 에스타란토에 관한 서적이었다.
『에스타란토의 신성과 마력』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것 같은 마법서를 빼내 펼쳤다. 아직 낯선 글씨가 자연스럽게 읽혔다.
새삼 신기했다. 난 어떻게 아벨리움의 언어를 습득한 걸까? 당연하게 이곳의 말을 하고, 당연하게 이곳의 글자를 써 내려가고.
참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내가 이 세계에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못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지만.
선 자리에서 마법서의 내용을 대충 훑은 나는 그만 책을 덮고 왼손으로 그것을 들었다.
여기서 계속 읽을 수 없으니 황후궁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이 한 권으로는 부족했다.
저번에 가져다 놓은 마법서가 서재에 높게 쌓여 있긴 했지만 그것들은 샤넌의 일로 급히 나가는 바람에 무작위로 고른 것들이었다.
오늘은 책의 내용을 살펴 기초를 다룬 책들 위주로만 챙겨 가겠다 다짐까지 하고 나왔다. 애초에 황실 도서관에 다시 온 목적이 그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샅샅이 살폈다. 마침 책장의 맨 위 칸에 딱 내가 찾는 마법서가 있었다.
대놓고 『마법의 기초』라 쓰여 있는 저 책. 그래, 저 책을 가져가야겠다! 근데 손이 닿으려나?
손을 뻗어 보았지만 역시. 절대 손으로는 닿지 않을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책장 한편에 기대어 있는 나무 사다리가 보였다. 그 사다리를 앞에 두고 나는 잠시 고민했다. 보통 황후는 이럴 때 사람을 부르나?
하지만 고작 저 책을 꺼내 달라는 이유 하나로 사람을 부르려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직접 올라가도 충분한 높이였다.
난 결국 들고 있던 마법서를 내려놓고 책장 앞에 사다리를 고정시킨 후 한 단씩 발을 디뎠다.
낡은 사다리도 아니었고 삐걱거리는 법도 없이 아주 튼튼했다.
닿았다!
그렇게 무사히 책을 꺼내고 빼낸 책을 옆구리에 낀 채 사다리를 내려오고 있었을 때였다.
내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이곳에 다른 이의 걸음 소리가 더해졌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인가?
“부인?”
불러도 답이 없는 이는 나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쿵. 쿵.
다가오는 이의 걸음 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누구지?’
샤넌의 일이 있었던지라 도서관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해 놓은 상태였다. 기사들이나 부인이었다면 진작 답을 했을 것이고. 설마… 괴한?
난 곧바로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밖을 지키고 있는데 괴한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다.
아무리 허울뿐인 황후일지라도 플로리아는 제국의 황후이다. 그러니까 플로리아의 명을 어기고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괴한이 아니라면 궁내에 단 한 명뿐이었다.
대제국 아벨리움의 황제. 하드엘.
“황후.”
생각을 마치자마자 상상 속에 있던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다가온 하드엘은 사다리 위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어쩐 일이세요?”
사다리의 끝에서 끝을 느리게 훑던 그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소.”
“아, 우연히 들리신 건가요?”
지나가는 길이면 그냥 계속 지나가지 왜 도서관까지 들어온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당장 죽기는 싫기에.
“우연이라, 맞아. 우연이지.”
“그러시군요.”
그는 내 옆구리에 끼워진 마법서와 바닥에 놓인 마법서를 차례로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어제 연무장에서 봤을 때는 한마디 말만 툭 던지고 지나가더니 오늘은 대화가 꽤 이어지고 있었다. 가지 않고 머무는 걸 보면 할 말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잠시만요. 내려가려던 참이니…….”
그때, 툭 하고 옆구리에 끼워 둔 책이 떨어졌다.
하드엘은 주워 줄 생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듯 그저 빤히 나를 응시하며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드엘. 네가 주워 줄 리가 없지.
나는 찡그린 눈으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책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까보다 서둘러 사다리에서 내려오기 위해 급히 발을 뗐다.
그런데 그 순간. 사다리의 나뭇단을 밟아야 하는 발이 허공을 밟았다.
이후에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내 몸은 기울었고, 허공에 떴고 그렇게 난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눈앞에 하드엘이 보였다.
거친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불안정한 호흡은 나의 것인 듯 또 그의 것인 듯 뒤엉켜 있었다.
하드엘에게 안긴 채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있던 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몸도, 머리도 그대로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싸고 있다는 그 느낌만큼은 선명했다.
겨울을 닮은 회색빛 눈이 미동도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느슨하게 풀린 그의 타이를, 흐트러진 금빛 머리칼을 그리고 다시 그의 눈을 보았다.
차차 지금 상황이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자신의 품에서 허둥대자 그는 곧바로 나를 내려놓았다.
바닥에 발을 딛고 서도 여전히 정신은 멍했다. 그래도 살려 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는 해야 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플로리아를 죽일 사람에게 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다니. 벌써 두 번이나.
어색한 공기에 숨소리도 죽인 채 나는 바닥에 떨어진 책을 줍기 위해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그도 반사적으로 몸이 나간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 구할 리가 없으니까. 두 권의 책을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하드엘은 더러운 것이라도 묻었다 생각하는 건지 인상을 쓰며 날 안았던 자신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도대체 플로리아는 저런 사람을 왜 좋아한 거야? 성격은 안 보고 얼굴만 봤나?
“폐하,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는 대답 없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질 때마다 그의 목 근처에서 배어나던 향기가 흐릿해져 갔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의 품에 안겼던 기억만큼은 더욱 생생해졌다.
창피해.
“멈추시오.”
입술을 잘근 깨물며 걷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하드엘이 명했다. 조용한 도서관 안에 묵직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붙잡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아무 감정이 서리지 않은 목소리는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의아함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자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하드엘이 보였다.
멀어졌던 만큼, 딱 그만큼 그와 다시 가까워졌다.
“취미가 바뀐 것이오?”
“네?”
“손에 든 책.”
그는 눈짓으로 내가 든 책을 가리켰다. 그리고 나를 보는 대신 마법서를 쳐다보며 물음을 던졌다.
“요즘 책에 관심이 많은 것 같기에.”
“아…….”
이 마법서 때문이었구나? 내게 다가온 이유.
어쩐 일로 말을 거는 건가 했더니. 그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러자 하드엘은 내린 눈을 천천히 들었다.
책에서 내 입가로 그리고 눈으로 그의 시선이 옮겨졌다. 나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그리고 친절히 답했다.
“네. 관심이 생겼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많이 읽어 보려고요. 예전엔 몰랐는데 황실 도서관에 흥미로운 서적들이 참 많더라고요.”
* * *
“이걸 다 읽으셨다고요? 아, 아니, 다 외우셨다고요?”
“루안, 누가 들으면 여기 쌓인 책들을 다 외웠다고 생각하겠어요. 아직 봐야 할 책들이 산더미인걸요.”
황실 도서관에서 하드엘과 만난 이후 며칠 동안 밤낮없이 책만 파고들었다.
밤에 졸음이 쏟아지면 하드엘을 떠올렸다. 고작 마법서 몇 권에 나를 경계하던 그의 눈빛과 말투 전부를.
그 결과 난 아벨리움이라는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 여겼던 마법 역시 머리로 이해하려 애쓰니 마법의 공식 같은 것이나 원리 정도는 깨우칠 수 있었다.
“당장 읽으신 책들만 해도 여러 권이시잖아요. 한 권을 외운다 해도 말이 안 되는데 몇 권을 외우시다니요!”
계속 보다 보니까 어느 정도 외워진 것뿐이다. 그러니 저렇게까지 신기해할 만할 일은 아니었다.
“반복해 읽으면 외워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전혀 당연하지 않아요. 폐하께서는 원래 천재이셨던 게 확실합니다! 그동안은 폐하의 명석함이 그저 드러나지 않았던 것뿐이지요! 헙…….”
그동안 명석함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을 달리 해석해 보면 이전의 플로리아는 명석함과 거리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던 건지 나의 주위를 정신없이 맴돌며 흥분하여 말하던 루안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녀는 꾹 다문 입을 자신의 손으로 가볍게 때리더니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장난스럽게 흘겨보았다.
“루안.”
“아아, 내 정신 좀 봐. 황후 폐하께서 오늘 티 파티에 입고 가실 드레스를 골라 드려야지. 바쁘다, 바빠.”
그녀는 내 부름에도 딴청을 피우더니 한마디 말만 남긴 채 어디론가 총총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