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파면까지는 아니더라도 크게 보면 황실을 폄하한 것이니 벌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서 나는 시녀장에게 명했다.
“네, 그럼 폐하께 지금 가서…….”
“아니요. 열흘, 그 안에 모든 정황을 확실하게 파악하세요. 그 후에 폐하를 뵙고 조용히 일을 처리해 주면 됩니다. 아,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엘리라는 시녀를 추궁해 듣도록 하세요. 자리에 함께 있었거든요.”
뭐든 확실히 해 둬야 탈이 없었다. 사정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가면 그냥 돌아가라 할 게 뻔하지 않은가. 가뜩이나 하드엘은 플로리아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을 터인데.
“네. 그럼 열흘 안에 폐하께 황후 폐하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시녀장은 들어올 때와 같이 정중하게 물러났다.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그마해지기는 했지만.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해지네.
“폐하!”
시녀장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나를 불렀다. 그게 누구인지 알아채는 건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루안이구나.
“들어와요.”
“시녀장님이 돌아가시기에 곧바로 문을 두드렸어요.”
“잘했어요.”
흐린 구석이라고는 없이 명랑한 루안을 보자 찝찝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나는 미소를 띠며 그녀를 지켜보다 덮어 두었던 법률서를 다시 펼쳤다.
“폐하!”
그런데 그때 루안이 잽싸게 내 옆으로 다가와 또 한 번 나를 불렀다.
“기분 전환 겸 산책 어떠세요?”
“기분 전환이요? 나 기분 괜찮은데.”
루안은 흠 소리를 내더니 가까이 다가와 내 표정을 요리조리 살폈다. 그리고 단호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아니요. 폐하께서는 지금 무척이나 우울하십니다.”
“내가요?”
루안은 나도 모르는 내 기분을 자신이 알고 있다 자부했다.
“네! 제가 폐하께 필요한 처방을 알고 있습니다.”
시녀장과 하는 얘기를 듣고 이러는 건가?
샤넌의 일로 화가 나긴 했지만 그녀의 말처럼 우울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플로리아가 아니니까. 더군다나 법률서도 빨리 살펴야 하고.
“의원에게 가서 처방까지 받을 필요 없어요.”
루안이 날 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리고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일으켰다.
‘아니 난 저걸 다 읽어야……!’
그녀의 손을 차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싫다고 말하며 매정히 손을 떼면 루안이 속상해할 테니까.
나는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법률서를 애절하게 바라보며 루안이 이끄는 곳으로 어쩔 수 없이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따라 간 곳에서 루안이 말한 처방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나는 경악했다.
“처방이라는 게 이거였어요?”
여전히 해맑은 루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당당하게 답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눈을 감았다. 그래, 플로리아에겐 확실한 처방이었겠네.
다시 스르르 눈을 뜨자 저 멀리 하드엘이 보였다. 연무장에 서서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는 하드엘이.
“어떠세요? 기분이 한결 나아지셨죠?”
루안이 무구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기억을 잃기는 했어도 지금의 나는 플로리아이기에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맞다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나는 어떠한 답도 하지 않고 루안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내비치며 다시 연무장을 바라봤다.
루안과 대화하는 사이 그의 손을 떠난 활은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그늘이 진 나무 아래에서 하드엘은 과녁을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허리춤에 꽂혀 있는 화살을 또다시 꺼냈다.
“실력이 정말 대단하시죠?”
“그러네요.”
방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저 거리에서 과녁을 맞힐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연달아 힘 있게 공중을 가르는 활을 멍하니 보던 나는 문득 땀이 흐르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한결같은 표정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웃는 법이 없었다. 어디선가에서 봄꽃이 흩날려 와도 그늘이 진 그의 얼굴만큼은 차고 시린 겨울 같았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따스한 빛줄기가 때때로 그의 하얀 피부 위에서 어른거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 빛은 하드엘의 회색빛 눈을 더욱 서늘해 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휘잉
등 뒤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나의 손끝을 스쳐 간 보드라운 바람결은 높다랗게 솟은 연무장 나무의 잔가지를 흔들었고 이내 하드엘의 금빛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두 발을 벌리고 곧은 자세로 과녁과 마주 섰던 그는 잠시 당겼던 활시위를 놓고 한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플로리아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저 남자. 잔혹하고 아름다운 아벨리움의 황제.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사소한 손짓을, 웃지 않는 입가를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아내고 있었다. 왜인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이유 없이.
나 뭐 하는 거야? 하드엘을 왜 보고 있어?
난 뒤늦게 고개를 세차게 휘저으며 눈에 담았던 하드엘의 모습을 떨쳐내고 눈길을 돌렸다.
빨리 황후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있다간 저 얼굴에 홀릴지도 모르니.
“루안, 우리 가요.”
“어라?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이쪽을 보시는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나는 하드엘을 다시 바라봤다.
루안의 말대로였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정확하게 내가 서 있는 이곳에 그의 눈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과 눈이, 서로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그의 시야 안에 내가 있었다.
나는 당황해 급히 몸을 낮춰 풀숲에 몸을 숨겼다. 몰래 넋을 놓고 보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제발 그가 이제 막 나를 발견한 것이길 바라며 숨소리를 낮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찾아들었다.
내가 왜 숨지?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따라서 허리를 숙인 루안이 마침 내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폐하, 왜 그러세요?”
“아, 그게……. 갑자기 다리가 아파서요.”
“네?! 그럼 얼른 돌아가서 쉬셔야죠!”
나는 풀숲 사이로 얼굴만 살짝 내밀어 연무장을 살폈다. 방금까지 나와 눈을 맞추던 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안도하는 한편 이상하리만큼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무 놀랐나 봐. 하긴 갑자기 하드엘과 눈이 마주쳤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폐하,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아니요. 괜찮아요, 루안. 방금 다 나았어요.”
“네? 다 나으셨다고요?”
루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둘러대는 말이 너무 허술한 것 같아 민망했지만 지금 그것을 따질 때는 아니었기에 서둘러 몸을 일으키며 구겨진 드레스를 털었다.
그렇게 난 자리를 뜨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흙을 밟고, 풀을 스치며 다가오는 그 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설마 하고 몸을 트니 역시 하드엘이었다. 다리가 길어 보폭이 넓으니 금세 거리가 좁혀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자리만 지키고 있는 사이, 그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뭐 하시오?”
햇빛 탓에 가늘게 눈을 찌푸린 그가 냉랭하게 물어왔다. 듣는 사람을 절로 움츠러들게 하는 목소리였다.
어떡하지.
나는 잠시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다고.
자는 척하다가 들킨 것도 모자라 훔쳐보다 들키기까지. 이게 무슨 망신인지.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게…….”
잠깐. 여기에서 기가 죽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같이 밥까지 먹은 마당에 그를 피할 이유는 더더욱 없고.
“보시다시피 산책 중이었습니다.”
나는 일부로 더욱 태연하게 말하였다. 그러자 하드엘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끄덕이더니 그냥 그대로 날 스쳐 지나갔다.
훔쳐본 걸 따지러 온 게 아니었나? 그럼 왜 여기까지 와서 말을 건 거야?
그의 행동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루안은 돌아선 하드엘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 하드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아까부터 뛰던 가슴이 묘하게 울렁였다.
거슬릴 정도로.
“루안, 우리도 가죠.”
* *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옅어지자 하드엘이 멈춰 섰다.
우연히 마주한 황후는 평소와 같았다. 검은 눈동자도, 엷붉은 입술도. 바람에 보드랍게 흩날리던 붉은 머리카락도.
그녀의 모든 것이 여전했다.
다만, 그 말투.
장로와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을 피하기 급급하던 어제의 황후가 아닌 듯했다. 지금의 말투는 평소와도 확연히 달랐다.
나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그럴 리가. 그럼 어제 나를 피했을 리도 없지.
하드엘은 방금까지 자신이 서 있던 연무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연무장에서 마주 보았던 황후를 떠올렸다.
마법서를 찾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그녀에게 간 것이었다. 다가가 말을 걸고 나서는 변한 태도가 의심스러워서라도 더 대화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여겼다.
하지만 더 이상 다가설 수 없었다. 아무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잠시 마주한 그 검은 눈동자에 시선이 붙들린 자신을 알고 있었기에.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이 꼴인 게 한심했다.
하드엘은 눈을 찔러 오는 햇빛에 미간을 좁혔고 그렇게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까와 달리 걸음은 무거웠다. 쓸모없는 감정이 자신을 짓눌러 오는 딱 그 무게만큼.
언제나처럼 그 무게감은 상당히 불쾌했고 거슬렸다. 옅은 향기처럼 남아 있는 기억을 떠오르게 하니까.
가장 어둡고 동시에 가장 밝았던 그때의 봄날이 그의 기억 속에서 선명해지려 했다. 그에 하드엘은 낮게 조소했다.
‘이제 와 뭘 어쩌자고.’
내 자리를 위해 그녀를 버린 것이 아닌가. 당연한 삶을 지키기 위한 옳은 선택이었다.
그러니 후회는 없다.
없어야 했다.
“폐하! 연무장에 계신 줄 알고 한참 찾았습니다.”
마침 정적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드엘은 천천히 뒤를 돌아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
넬슨 백작이 잘 다져진 길을 두고 언덕 위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그가 숨이 가득 찬 목소리로 황제를 붙잡아 세웠다.
힘이 들긴 했지만 언덕을 오른 덕분에 백작은 더 빠르게 하드엘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폐하, 곧 회의 시간이…….”
“넬슨. 내일 황후의 일정을 내게 보고해.”
에스타란토의 힘에 변화가 생긴 건지,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에 마법서를 읽으려 했던 것인지. 이유가 뭐든 알아내야 했다. 직접 살피기 위해 황후에게 붙여 놓은 감시도 물린 것이 아닌가.
“황후 폐하의 일정을요?”
“그래. 공식적인 일정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황후가 어디를 가는지 그것만 알아내. 내가 직접 찾아가야겠으니.”
오늘처럼 멍청하게 입도 못 여는 일은 없어야겠지.
그에게 있어 자신의 시답잖은 감정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무뎌질 감정이다. 언젠간 사라질 것이고.
황후가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되는 날이 오면 자연스레 그리될 것이었다.
그래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