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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7)화 (7/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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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걸음을 옮겨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또각대는 구두 굽 소리가 도서관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샤넌! 봐봐 이 소리! 우리 말고 분명 누가 있… 화, 황후 폐하!”

모퉁이를 돌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옆의 다른 시녀가 칭한 그녀의 이름을 내 입으로 직접 불렀다.

“샤넌.”

부드러운 목소리에 샤넌의 고개는 뻣뻣하게 돌아갔다. 나를 마주한 두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

“당사자 진술은 직접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시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우리 또 보네요.”

나를 황제궁까지 안내했던 여자가 조금 불안한 낯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황궁 내의 시녀들은 모두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도 자긍심도 대단했다.

샤넌이 내게 쌀쌀맞은 태도를 보였던 것도 모두 몰락 귀족 출신인 황후를 은근히 자신의 아래로 생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플로리아가 만만하다 한들 어떠한 귀족도 황후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황실 내에 있는 건물 안에서 황후궁 시녀들을 욕보이고 플로리아에 대한 악랄한 소문까지 사실처럼 억측하다니.

모른 척 지나치기에는 정도가 심하잖아.

“내가 황후가 되기 위해 흑마법사의 힘을 빌렸다. 소문이 그렇게 났던가요?”

“그런 것이 아니오라……!”

엘리라고 불린 시녀가 손을 덜덜 떨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말을 중간에 잘라 낸 것은 샤넌이었다.

“단지 저번처럼 들려오는 소, 소문을 이야기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다른 시녀들에게도 입조심을 시키려고요. 어쩌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났는지. 황후 폐하께서 알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저번처럼? 그렇다면 플로리아와 이런 식으로 마주친 적이 한 번 더 있었다는 거네.

“폐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소문과 관계없이 황후 폐하를 믿습니다.”

내 표정을 살피던 샤넌이 뻔뻔하게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뒷말을 하다 들켰는데도 끝까지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니.

나는 차갑게 표정을 굳혔다.

“뭘 신경 쓰지 말라는 거죠? 그대가 이 황실 안에서 진위도 불확실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며 날 능욕하는 걸 신경 쓰지 말라는 건가요?”

샤년의 두 눈이 커졌다.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건지 그녀가 난처해하며 말을 우물거렸다.

“그것이 아니라 저는……!”

“그게 아니면 나의 시녀들을 욕보인 일을 신경 쓰지 말라는 건가?”

“…….”

“시녀장에게 오늘 일을 알리겠어요. 나와 나의 시녀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황실의 시녀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그대는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억울합니다! 너무하세요, 황후 폐하! 저는 단지 황후 폐하가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것인데!”

뒷목이라도 잡아야 하나. 누가 누구에게 억울하다 하소연을 하는 건지.

“억울하다라……. 귀족 영애가 그리 입이 가벼워서야.”

“!”

넌지시 중얼거린 말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설마 온화하게 웃으며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플로리아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아니야.

“내게 더 할 말이 남았나요?”

“…….”

“없는 것 같으니 난 이만 가 보죠.”

샤넌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여기서 할 말이 있다고 나오면 제정신이 아니지.

나는 눈을 내리깔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고개는 빳빳하게 들고 있는 샤넌을 잠시 바라보다가 굳은 얼굴로 걸음을 돌렸다.

* * *

“저희에게 말씀해 주셨으면 원하시는 책들을 찾아왔을 텐데요.”

“괜찮아요. 안 그래도 들지 못한 책들은 기사들에게 가져다 달라 부탁했어요.”

“네? 들지 못한 책이요? 설마 책이 더 있단 말씀이세요?!”

“기억을 잃었으니 채워야죠.”

쿵!

책상 위에 책을 내려놓자 묵직한 책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건 기록을 쌓아 두고 봐서 그런지 내게는 그렇게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루안은 다르게 생각하는 듯했다.

“폐하.”

루안이 감탄하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마샤티아 백작 부인이 살며시 다가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죠?”

“황후 폐하 앞으로 도착한 편지들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지금 보시겠습니까?”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나의 앞으로 금색 쟁반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여러 장의 편지들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었다.

“벨리타?”

나는 백작 부인에게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맨 앞에 놓인 편지를 덥석 집어 들었다.

봉투의 하단에 분명하게 벨리타 엔느 데보니안,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레이디 벨리타의 죽음. 그것은 황후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건이었다.

의혹만 있을 뿐 증거가 없어 재판은 열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플로리아를 범인으로 낙인찍었다.

그렇게 플로리아는 그들이 떠드는 소문 속에서 무고한 범인이 되었고, 결백한 살인자가 되었다. 이는 모든 귀족들과 백성들이 플로리아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적어도 벨리타가 아직 살아 있는 거라면 플로리아의 운명을 바꾸는 일은 훨씬 수월해진다.

‘운이 좋은걸.’

굳이 내 소문에 대해 내 입으로 직접 캐물을 필요도 없겠어.

“부인, 지금 편지를 읽을 테니 탁자 위에 놔 주시겠어요?”

“예, 황후 폐하.”

나는 하얀 편지봉투를 뜯었다. 고급지에 쓰인 편지 내용은 의외로 간단했다.

황후를 향한 형식적인 인사말로 시작해서 일주일 뒤 후궁의 정원을 빌려 티 파티를 여는데 그곳에 참석해 달라는 이야기로 끝이 나는 그런 내용의 편지였다.

평범한 초대장에 불과한 편지를 끝까지 읽고 나자 불현듯 소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벨리타의 티 파티 초대장, 아무래도 낯설지가 않았다. 소설에서 짧은 에피소드로 지나갔던 그 장면이 시작되려는 듯했다.

벨리타가 실수인 척 쏟은 찻물에 플로리아의 드레스가 흠뻑 젖은 바로 그 부분.

이런 초대장 하나에 그런 처량한 장면을 떠올리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뭐든 잊는 것이 내겐 어려운 일이었으니.

나는 편지에서 눈을 떼며 마샤티아 백작 부인을 향해 말했다.

“부인, 펜과 함께 답장을 위한 편지지를 가져다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루안. 내일 날이 밝는 즉시 시녀장을 불러와 줘요.”

* * *

“황후 폐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고? 나만 몰랐어?”

“응. 너만 몰랐어.”

“아까 그래서 황실 도서관을 보고 어디냐고 물으신 거구나.”

“황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미 다 아는데. 귀 좀 열고 다녀라, 너.”

“아 몰라, 그나저나 무거워 죽겠다.”

“교대시간이라 이제야 좀 쉬나 했더니.”

황실 도서관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 두 명은 투덜대며 황후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두 손 위로는 엄청난 양의 책들이 쌓여 있었다. 줄줄 흐르는 땀을 닦아 낼 손조차 없었다.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 이 많은 책을 다 읽으려고 하시는 걸까? 생전 도서관 근처에 걸음 하시는 걸 못 봤는데.”

“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이라도 되셨나 보지.”

“그런데 아까 도서관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무슨 일?”

“황제궁 시녀들이 나오는데 표정이 안 좋더라고.”

“아, 그래? 그럼 혹시 황후 폐하와 관련이 있나?”

“황후 폐하? 왜?”

“도서관에서 나오실 때 말이야. 들어가실 때와는 달리 굉장히 차가워 보이시던데.”

“차가웠다고?”

“응. 뭔가 눈빛이.”

“푸하하! 황후 폐하께서 눈빛이 차가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그냥 네가 착각한 거겠지.”

“아니, 진짜라니……!”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한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진 길목에선 말소리를 대신해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황제 하드엘을 향한 것이었다.

하드엘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런 두 명의 기사들을 지나치는 듯싶더니 돌연 우뚝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사들은 자신들 앞에 머물러 있는 하드엘의 발을 보고 잔뜩 긴장한 채 허리를 더욱 굽혔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담긴 행동이기도 했다.

“이 책들을 어디로 옮기는 거지?”

하지만 이런 기사들의 바람은 하드엘의 한마디로 무참히 짓밟혔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물음에 몹시 당황한 기사 중 한 명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황후 폐하의 명으로 채, 책을 옮기는 중이었습니다.”

“황후의 명?”

“예. 오늘 황실 도서관에 오셔서 필요한 책들을 고르셨는데 직접 챙겨 가신 책들 외의 나머지 책들을 저희가 옮겨 드리는 중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기사는 또다시 질문을 받을까 봐 이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필요한 책이라……. 그래. 이만 가 보거라.”

기사들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내려놓았던 책을 챙겨 황후궁 쪽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하드엘은 바닥에 있던 수많은 책 중 다수의 마법서를 떠올리며 멀어져 가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해가 기울었는지 권태롭게 뜨고 있던 눈가 주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마법서라……. 갑자기 왜.

황후는 평소 마법서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기억을 잃자마자 마법서를 찾는다? 황후에게 붙여 놓은 감시가 제 역할을 못 하는 게 분명했다. 혹은 그들이 눈치챌 수 없는 변화가 있었거나.

황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변화라면 에스타란토의 힘, 그뿐인데.

“넬슨.”

“예, 황제 폐하.”

“오늘부로 황후의 동향을 살피라는 명을 거둔다.”

“네?”

“당분간 내가 직접 황후를 지켜봐야겠다.”

* * *

내 앞에 처음 보는 중년의 여인이 서 있었다. 루안에게 시녀장을 데려와 달라 한 게 나이긴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알 리가 없으니 처음 보는 얼굴인 게 당연했다.

서재에서 법률서를 보고 있던 난 이만 책에서 눈길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황후 폐하를 뵈옵니다.”

적당히 공손한 태도였다. 시녀장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내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그나마 말이 통하겠어.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어요.”

“말씀하시지요.”

“황제궁 소속 시녀인 샤넌을 아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내 뒷말을 하고 다니더군요?”

시녀장의 눈은 살짝 커졌다가 두어 번의 깜박임에 도로 원래의 크기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며 아까보다 더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제 불찰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느긋하게 웃어 보이며 시녀장을 바라봤다. 그녀는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만 뱉고서는 내내 조용했다.

“그대가 용서를 빌 일이 아닙니다. 물론 용서를 할 생각도 없고요. 샤넌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시녀장은 잘못 듣기라도 한 듯 반문했다. 이번에 그녀는 눈썹이 따라 올라갈 정도로 눈을 번쩍 떴다.

“황제궁 소속 시녀의 자리에서 샤넌을 파면시키세요. 또한 샤넌은 네 달간 입을 열어서도, 누구와 대화를 주고받아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 한동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시녀장이 돌연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 그것은…….”

“왜요? 문제라도 있나요?”

“샤넌은 황제궁 소속의 시녀이기에 황제 폐하의 명이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합니다.”

하드엘의 명이라. 그렇다는 건 내 명을 따르기 위해선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이거네. 과연 하드엘이 샤넌을 내 뜻대로 처분하게 둘까? 그동안 플로리아에 대한 황당한 소문을 듣고도 잠자코 있던 그인데.

시녀장은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며 내 입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내 차분하던 그녀가 황제의 명이 필요하다고 말한 그 시점부터 몹시 불안해 보였다.

이유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일로 하드엘을 찾는 게 싫은 거겠지. 괜한 불똥이 튈지도 모르니 최대한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시녀장을 위하자고 내가 한 말을 무를 수는 없었다. 플로리아와 황후궁 시녀들을 욕보인 일이니 어물쩍 넘길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그럼 폐하의 명을 받아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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