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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4)화 (4/164)

#004

“폐하! 폐하!”

내 머리를 다 빗겨 준 루안이 오늘 나의 상태를 의원에게 보고해야 한다며 나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헐레벌떡 되돌아왔다.

나를 단장시켜 주던 마샤티아 백작 부인은 그런 루안을 다그쳤다.

“루안!”

하지만 백작 부인의 다그침도 그녀를 쉽게 진정시키지 못하는 듯 보였다.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나저나 저 ‘폐하’ 소리,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연극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가끔은 혼자 멋쩍어지기도 했다.

“황후 폐하, 기뻐하세요!”

감격에 젖은 루안의 눈동자가 오늘 봄볕보다 밝게 빛났다. 플로리아에게 희소식이 될 만한 이야기를 전해 주려는 게 틀림없었다.

잔뜩 들떠 있는 그녀를 보니 괜히 나까지 들뜨게 되었다.

플로리아에게 희소식인 거면 나에게도 희소식이지. 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대하며 두 귀를 쫑긋 세웠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궁으로 걸음하고 계시다 합니다!”

“잠, 잠시만, 뭐라고요, 루안? 누, 누가 온다고요?”

“황제 폐하요!”

쿵.

심장이 저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화, 황제 폐하?’

난 단장을 위해 양팔을 벌린 그 상태 그대로 몸이 얼어 버렸다.

하드엘.

왜 그와의 만남을 상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을까.

제 허울뿐인 아내가 관 속으로 끌려가는 상황을 그저 무심히 관망하던 남자. 그러나 동시에 플로리아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은 존재.

내 운명을 바꿀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준비 없이 만날 순 없었다.

지금 당장 하드엘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느라 새하얘진 머릿속을 채우려는데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드셨습니다.”

나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도착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했다.

루안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플로리아가 진심으로 황제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거겠지.

그런데 플로리아였다면 이 상황에 미소가 번졌을지 몰라도 난 아니었다.

나는 루안의 양어깨를 잡으며 급박하게 입을 열었다.

“루안, 저는 깨어나지 않은 거예요. 아직 자고 있는 겁니다.”

이런 위기일발의 순간에 상황을 모면할 최고의 방법이란 없었다. 그래서 난 가장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

백작 부인과 루안을 비롯한 시녀들이 당혹스러워하며 나를 보았지만 그들의 시선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저 웅장한 방문이 열리기 전에 필사적으로 침대에 달려가야 했다.

나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침대에 누워 재빨리 이불을 당겼고 조금의 시간 차도 두지 않고 곧바로 하드엘이 들어왔다.

설마 본 거 아니겠지?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가빠진 호흡을 감추려 숨을 최대한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황후 폐하께서 방금, 아! 아니 아직 주, 주무시고 계셔서.”

“황후의 안색이 좋진 않군.”

하드엘의 음성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혔다. 눈을 감고 들어 본 그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아무 감정 없이 차가웠다.

안색이 좋지 않아서 기쁘다는 것인지 마음이 아프다는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분명 후자는 아니겠지.

아벨리움의 젊은 황제, 하드엘 바크로 아벨리움.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자 훗날 플로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역.

플로리아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된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하드엘도 제국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만큼은 가장 완벽한 성군이었다.

수십 년간 골머리를 썩인 조세 제도를 즉위한 지 단 반년 만에 개혁하고 효율적인 무역 체제를 구축해 건국 이래 최대의 흑자를 내었으니 말이다.

백성들이 그를 성군이라 칭송하며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그만큼 강력한 황권을 구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이러한 힘을 얻기 위해 그는 아벨리움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가차 없이 처리해 왔다.

애초에 하드엘은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인자한 성군이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었다.

어려서부터 가장 완벽한 황제가 되기 위한 교육만 죽도록 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인간성이 제로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아벨리움의 이익을 추구하던 그가 정작 제국의 가장 큰 축복인 플로리아를 살리지 말라 하다니……. 권력욕이 무섭긴 무섭구나.

내 앞에 바로 그 하드엘이 서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드엘을 실제로 마주하면 무섭다거나 두렵다는 감정이 제일 먼저 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런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도 신기했다.

눈앞이 깜깜해 보이는 게 없어서 그런가. 아니,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주무시니 다음에 다시 걸음 하심이 좋겠습니다.”

하드엘과 함께 온 남자가 그에게 정중히 말했다. 나는 가슴 한구석이 아리는 이 묘한 느낌을 지우려 애쓰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래, 어서 돌아가, 하드엘. 지금 너에 대해 생각할 게 아주 많아. 어떻게 하면 널 이용해서 플로리아의 운명을 바꿔 줄 수 있을지 밤새 고민해 봐야 하거든.

재촉하는 이 없이 모두가 침묵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자는 척 연기를 해야 하는 내겐 마치 하루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바로 그때, 그가 움직였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내 귓가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드엘의 숨결이 가까이 와 닿는 느낌이 너무나 선명했다.

느닷없는 그의 행동에 난 숨도 못 쉴 정도로 경직되었다. 뒤이어 차디찬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황후, 내 궁에서 장로와 오찬을 할 예정이니 그대도 채비하시오.”

“!”

미쳤어.

귓가에 들려온 하드엘의 말은 내게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잠시 뒤 내가 밥을 먹으러 황제궁에 가야 한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충격이었고, 두 번째 충격은 내가 깨어 있다는 걸 그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넬슨, 이만 가도록 하지.”

하드엘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지금 이 순간 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깨달았다. 하드엘 그는 정말 남의 수치심 따위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 에둘러서라도 말을 해 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창피하고도 분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리고 그가 황후궁을 완전히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 전까지 꼭 감은 두 눈을 절대 뜨지 않았다.

* * *

시익사? 식사를 같이해?

원래 너희 밥도 같이 먹고 그런 사이였니? 눈길 한번 안 주는 그런 냉랭한 사이 아니었어?

나의 이런 심각한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안은 꺅꺅거리며 나를 한껏 치장해 주고 있었다.

본래 백작 부인이 단장을 해 주면서 걸어 주려던 목걸이보다 몇 배로 빛나는 목걸이가 지금 내 목에 걸려 있었다.

들판의 풀꽃을 꺾어 만든 목걸이를 걸어 놔도 아름다울 플로리아였지만 이렇게 꾸며 놓으니 더 빛이 났다. 하얀 쇄골에 걸쳐진 반짝이는 물빛 보석의 목걸이는 정말이지 그녀의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자는 척을 하다가 들킨 마당에 이런 치장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가 나를 보면 그저 우스울 텐데.

“황후 폐하, 정말 아름다우세요! 진짜!”

들뜬 루안의 목소리에 나는 거울을 보았다. 내가 봐도 아름다운 여자가 거울 속에 비쳤다.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봐도 부족할 미모였지만 하드엘을 만난 후 내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운명……. 플로리아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까.’

기억은 없지만 난 아주 어렸을 적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곳이 집이라 생각하고 자라 왔고 원장님을 부모님이라 생각하며 자라왔다.

때로 누군가는 이런 나를 가엾게 여겼다. 호의를 가장해 날 동정하는 것 따위를 즐기는, 그런 악취미를 가진 인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 내 주위엔 진심으로 날 아껴 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넌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다고 말해 준 원장님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변호사가 되기까지 필요한 것은 펜과 책, 내 머리와 의지뿐이었다. 내 과거는 어찌하지 못해도 앞날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그 생각 하나로 죽도록 공부했다. 난 그렇게 내 운명을 바꿨다.

그러나 죽는다는 결말을 정해 놓고 운명을 개척하라 하는 것은 이와는 얘기가 달랐다. 신이 와도 힘든 일이었다, 이건.

게다가 운명을 바꾼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웠지만 책 속의 줄거리만 알뿐 내겐 그 외 아벨리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그러니까 뭐부터 해야 할지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상태로 하드엘을 만나러 가야 하다니. 애써 무시하려 했던 절망감이 또다시 마음에 찾아들었다.

몇 분 뒤, 황제궁 소속의 시녀 한 명이 황후궁에 도착했다.

난 웃음을 가득 머금고 있는 루안을 뒤로하고 예만 갖추고는 줄곧 무표정인 그 시녀를 따라 길을 나섰다.

황제궁은 황후궁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로 누가 봐도 제국의 황제가 살 법한 그런 곳이었다.

햇빛이 내리쬐는 탓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황제궁을 바라보았다. 황후궁에서 처음 나와 보는 것이 저런 건물이라니.

물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정말이지 입을 벌리고 바라볼 정도로 놀라웠다.

한동안 경탄을 금치 못하며 나는 느리게 좌우를 살폈다.

때론 낮고, 때론 높게 솟은 궁은 보는 것만으로도 장관이었다. 여유로운 오후의 햇살을 잔뜩 머금은, 지상낙원과도 같은 풍경은 훌륭하고도 장대했다.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가장 오랫동안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황제궁 바로 앞에 펼쳐진 드넓은 화원이었다.

이름 모를 하얀 꽃이 만개한 화원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황홀한 광경에 난 잠시 멈춰 서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하드엘 혼자 이런 아름다운 화원을 보고 살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너무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플로리아가 사는 황후궁의 창문 너머에는 화원이라 불릴만한 곳도 없는데. 좋은 구경은 황제만 하겠다 이건가?

내심 투덜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무언가 시야에 잡혔다.

하얀 물결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 한가운데 있는 다리가 주변 풍경을 해치지 않고 화원과 어우러져 있었다.

저 다리… 설마 저 다리가 화원의 다리인가?

화원의 다리라면 내가 발을 헛디뎌서 기억을 잃은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 플로리였지만.

그런데 저기서 발을 헛디뎠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한눈을 팔지 않고서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구조였다.

책 속에 화원의 다리와 얽힌 이야기는 나오지 않기에 내 의문은 더욱 커져 갔다.

‘혹시?’

나는 화원의 다리와 마주 보고 있는 황제궁의 어딘가를 번갈아 봤다.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 플로리아는……. 저 시녀에게 저곳이 어디인지 물어봐야겠어.

황후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은 현재 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공공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는 소설에 나오지 않은 세세한 부분을 묻기에 좋은 무기가 되어 주었다.

“잠시만요. 저기가 어디죠?”

나는 황제궁의 한곳을 가리키며 앞에 서 있던 시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내가 가리킨 곳을 흘끗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의 집무실입니다.”

하드엘의 집무실? 화원의 다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이 황제의 집무실이라…….

역시. 예상대로 플로리아는 집무실에 있는 하드엘 보려다가 발을 헛디딘 게 분명했다.

‘플로리아, 바보같이.’

“황후 폐하, 어서 걸음 하시죠?”

우뚝 서서 화원의 다리를 보고 있는 내게 시녀는 왠지 모를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그동안 겪어 온 황후궁 시녀들과는 달리 그녀의 태도는 은근히 쌀쌀맞았다.

황후궁 시녀들에게만 둘러싸여 있다 보니 플로리아가 도대체 어떤 무시를 어떻게 받았다는 건지 몰랐는데 이제야 그것이 조금씩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도 황실 소속 시녀는 껍데기뿐이지만 황후라는 이유로 마지못해 예의는 차려 주는 듯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플로리아를 은근히 무시하는 이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인간들도 있겠지.

난 그들에 맞서 플로리아의 운명을 바꿔야 했다. 뭐부터 해야 할지는 몰라도 뭐가 필요할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다.

아벨리움의 황후로서 그에 걸맞은 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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