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3)화 (3/164)

#003

바로 플로리아를 지독하게 무시하던 벨리타 영애의 죽음.

모든 의혹이 플로리아를 향해 있었고 황후의 해명은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더해서 밑도 끝도 없는 스캔들과 추문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사람들은 플로리아가 배움이 부족한 멍청한 황후면서 악독하기까지 하다고 떠들어 댔다.

플로리아는 더 이상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매일같이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그녀는 궁에 들어와 황후가 된 걸 죽는 순간까지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드엘을 만날 수 있었기에.

플로리아는 잔인할 정도로 무관심한 황제를 그녀의 생이 끝나가는 순간까지 홀로 사랑했다.

매일같이 뒤에서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고 마음에 담았지만 결국 자신의 마음조차 알리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랑이었다.

반면 소설 속 하드엘이 플로리아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녀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플로리아를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지닌 감정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었다는 걸.

황제보다 높은 곳에 에스타란토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에스타란토의 힘을 지닌 황후가 언제 그 힘을 깨울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로부터 비롯된 황제 하드엘의 감정은 뻔했다.

미움과 증오. 그것이겠지.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드엘이 플로리아를 죽이고야 마는 이유가 된다. 에스타란토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죽어 가는 그녀를 방치한 것이다.

장로의 그 어떤 절규도 권력욕에 사로잡힌 황제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는 탄생한 그 순간부터 가장 높은 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했으니까.

장로는 그의 명을 어기고서라도 방법을 찾고자 했으나 황제에 의해 투옥되고 만다.

그 후, 계속해서 시름시름 앓아 가던 플로리아는 결국 아끼던 시녀 루안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황제를 그리워하며 허무하게.

에스타란토의 힘은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그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플로리아의 죽음은 깊은 병환으로 인한 사망으로 알려진다.

애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소문 속 악독한 황후가 벌을 받은 것이라며 그녀의 죽음을 환호했다.

오로지 루안을 비롯한 황후궁 시녀들만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고, 장로만이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결할 뿐이었다.

그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대다수의 백성들과 귀족들이 원하는 대로 레이샤 공녀를 황후로 맞이하게 된다. 사랑은 없었지만 대신 이익이 있는 재혼이었다.

그 후의 이야기는 나와 있지 않으니 그들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데 생각할수록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하드엘. 그는 왜 더 일찍 플로리아를 해치지 않았던 걸까.

플로리아를 죽이고 싶었다면 기회는 많았다. 오히려 미리 죽였다면 플로리아는 더 쉽게, 조용히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플로리아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계속해 지켜만 봤다.

플로리아의 고통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그걸 즐기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플로리아가 에스타란토의 힘을 깨우려 해서 갑자기 감정이 격해진 건가?

근데 플로리아가 힘을 깨우는 건 이미 예견된 일인데.

게다가 그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플로리아를 살려 두려 했을 리 없다. 그러니까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 것 같고.

아니다. 뭔 상관이야. 나는 쓸데없는 상념에서 벗어나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어차피 그는 플로리아를 죽게 내버려 뒀다. 그것만큼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러니 하드엘 그에 관해선 더 따지고 들 것도 없었다.

난 우선 내 처지부터 걱정하기로 했다. 당장은 이 비련의 여주인공이 하필 나라는 그 잔혹한 현실부터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누군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그것도 죽을 게 뻔한 사람의 운명을?

나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다리 위에 가만히 올려놓은 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돌아갈 방법, 그러니까 운명을 바꾸는 것 외에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간이 지나도 더 이상 떠오르는 건 없었다. 오히려 깊이 생각하려 들수록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난 주먹을 쥐고 고개를 바로 들었다.

체념하지 않으려면 인정해야 했다.

수호자의 말을 떠올려봤을 때 소설을 읽은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이 세계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플로리아의 운명을 바꾸는 것, 그 하나뿐이라는 걸. 애초에 선택지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수호자와 나눴던 대화에서 그나마 얻은 깨달음이 있어서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까마득한 어둠 속을 홀로 헤매는 기분에 절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지만 그래도 난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좌절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운명을 바꾸면 원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그 단순한 공식은 나의 추측일 뿐이다.

이렇게 어림짐작한 것들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그 근거가 너무나 부족했고 나도 이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다.

되돌아가기 위해서라면 확실하지 않은 것에라도 기대를 거는 수밖에. 그까짓 운명, 바꿔 보지 뭐. 그까짓…….

이럴 줄 알았으면 인문학 서적이 아니라 판타지 소설을 많이 읽어둘 걸 그랬다.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심각한 상황에 찾아든 엉뚱한 후회가 어지러운 마음을 그나마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보다 현실적으로 더 큰 위로가 되어 주는 것은 악조건뿐인 세계 안에서 다행히 내가 이 세계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계세요?”

루안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빗겨 주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조금 혼란스러워서요.”

앞에 있는 거울 속에서 루안과 눈을 마주치며 난 싱긋 웃었다. 그동안 내 걱정만 하느라 수척해진 그녀에게 더 이상의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머릿속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으니…….

그나저나 방금까지 내 머리는 내가 빗겠다고 그렇게 손사래를 쳤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의 나는 돌아가고 싶은 사람치고는 민망할 정도로 적응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기억이 온전치 못하시니 혼란스러우실 수 있으세요. 좀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기억은 차차 돌아올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아, 참! 그리고 화원의 다리는 당분간만이라도 가지 마세요!”

당분간?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잠시 잊은 듯싶었다.

나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화원의 다리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굳이 루안의 말에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분간이라고 말할 정도면 플로리아가 자주 갔던 곳이긴 한 모양이네.

루안은 삼 일 내내 그래왔듯 이후로도 걱정 어린 말들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그녀는 매일같이 진심으로 나를 아니, 플로리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상냥했고, 진솔했고, 무엇보다 플로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루안은 항상 그랬다. 어떠한 일이 있던지 플로리아의 편이었다. 귀족들이 플로리아를 힐난할 때도, 플로리아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나는 뒤를 돌아 루안을 마주 봤다. 수심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을 보자 괜히 울컥해졌다.

다른 황후궁 시녀들도 플로리아를 위했지만 유독 그녀와 함께 있는 일이 잦았다. 그만큼 많은 도움을 받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루안, 고마워요.”

이 세계에서 눈을 뜬 뒤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았다. 그러자 루안의 얼굴은 금세 해사해졌다.

“루안이요? 황후 폐하! 지금 제 이름을 불러 주신 거예요?”

“네? 네.”

“평소엔 루안이라고 부르시던 폐하께서 제게 ‘저기요, 여기요’ 이러시니 너무 속상했었는데. 저 정말 기뻐요!”

그 정도야?

루안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것에 큰 감동을 받은 듯 보였다. 휴정기에 괌으로 놀러 간다며 좋아하던 사무장님도 저런 표정은 아니었지.

나는 과한 루안의 반응에 민망해져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며 다시금 자세를 바로 했다.

루안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나의 붉은 머리를 계속해서 빗겨 주었다.

언제까지 이 이상한 세계에 머물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루안만큼은 믿고 지내고 싶었다. 플로리아의 운명을 바꾸는 데에 있어 루안은 오히려 도움이 되는 사람일 테니 굳이 거리를 둘 필요도 없고.

거울 속 들뜬 루안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 정면을 응시했다. 앞에 있는 타원 모양의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빤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데, 스무 살 초반쯤 되려나? 삼 일 내내 아니, 오늘까지 나흘 내내 봤지만 아직도 낯설기만 한 모습이었다.

‘하긴 하루아침에 얼굴이 바뀌었는데 쉽게 적응하는 게 더 이상하지.’

첫날 깨어날 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느낀 거지만 정말 소설 속 여주인공다운 외모였다.

현실성 없는 상황만큼이나 현실성 없는 미모. 심지어 비련의 여주인공답게 어딘가 아련한 분위기까지.

도대체 어떤 눈동자를 지녀야 밤하늘을 닮은 검은 눈동자라 하는지 궁금했는데 이곳에 와서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나는 얼마쯤은 신기함에, 또 얼마쯤은 놀라움에 두 눈을 깜빡여 보았다.

“와 진짜 눈에 별이 박힌 것 같아.”

“네?”

속으로 하려던 말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어리둥절한 루안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황후가 거울을 보며 자기 외모에 감탄하는 상황이라니. 주변에 있던 시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아니, 그게 아니라…….”

민망한 마음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일순 정적이 찾아들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하지? 이러다 괜히 이상한 쪽으로 운명이 바뀌는 건 아닌지 걱정까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염려가 무색할 정도로 이후 반응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빗질을 멈춘 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루안을 필두로 자리에 있던 모든 시녀들이 제 머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덕분에 변명을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실제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해도 재수 없지 않을 정도로 플로리아는 아름다웠고 난 그런 그녀의 외모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들의 끄덕임에 힘입어 어쭙잖은 변명을 하는 대신 차라리 뻔뻔하게 나가기로 작정했다.

“세상에, 이런 예쁜 눈은 처음 봤지 뭐예요.”

이 미모에 이 정도 뻔뻔함은 합법이잖아?

* * *

“폐하, 황후 폐하께서 깨어나신 지 오늘로 나흘이 되었습니다.”

황제의 비서 중 한 명인 넬슨 백작이 말했다. 하드엘은 그에 미동 없이 집무를 보았다.

“폐하.”

“안다.”

재촉하는 듯한 백작의 말에 하드엘은 그제야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낮게 읊조렸다.

그런 황제의 시선을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넬슨 백작은 개의치 않고 또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가 보셔야 합니다. 장로님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드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백금발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에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역설적이게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귀찮게 됐군.”

하드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창밖에 눈길을 두었다.

그 너머엔 하얀 에스트라 꽃이 절정으로 피어난 황실의 화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으나 하드엘의 시선이 머문 곳은 꽃이 핀 화원이 아니었다.

화원의 한가운데에 놓인 고풍스러운 다리.

하드엘은 한참 동안 그 화원의 다리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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