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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황제는 이미 무릎을 꿇었다 (2)화 (2/164)

#002

[플로리아 님.]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한 줌 빛이 보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고 푸르른 빛이.

‘저 빛은 뭐지…….’

난 눈앞에 보이는 빛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더 이상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다는 것을.

[플로리아 님.]

고요 속에서 또 한 번 낯선 이를 찾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는 젊은 여자이자 남자의 것이었고, 노인이자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내게 닥친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설마 지금 내가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걸까.

“누, 누구세요?”

내가 답을 하자 빛은 순식간에 내 주변을 감싸 왔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온기는 모든 긴장이 풀어질 만큼 너무나 따스하고 포근했다.

[플로리아 님, 이 세계에서의 시간은 이제 다 되었습니다.]

빛 속, 그 어딘가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낯선 이의 이름을 부르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몽롱한 환상 속을 헤매고 있는 기분에 사로잡힌 채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플로리아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설마 제가 죽은 건가요? 이렇게 허무하게? 도대체 왜…….”

[플로리아 리엘 브넬페, 당신은 위대한 에스타란토의 힘을 물려받은 고귀한 자. 이 세계는 어긋난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타인의 육체를 빌려 잠시 머무른 곳일 뿐입니다. 이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잠깐, 플로리아?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 같……!’

순간 내 머릿속에 연분홍 표지의 책이 스쳐 지나간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니었다. 에스타란토와 플로리아, 이들은 전부 그 책에 나오는 설정과 등장인물 이름이었으니까.

[그것은 어긋난 운명을 맞이한 에스타란토의 기억을 담은 책입니다.]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빛 너머의 무언가가 말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연분홍 책이 허공에 떠 있었다.

[플로리아 님,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도 당신의 기억은 지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아벨리움에서의 기억은 에스타란토의 기억과 함께 이 책에 갇혀 있을 테니까요. 그것은 운명을 바로잡기 위함이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책은 반짝이는 빛의 조각으로 변해 사방에 흩뿌려졌다.

내가 누구라고? 플로리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도, 현실과 동떨어진 지금의 상황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계속해서 들려오자 내가 지금 기절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꿈을 꾸고 있는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에스타란토의 수호자로서 플로리아 님을 모시겠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졌다.

아, 다행히 꿈에서 깨려나 보다!

안도하는 순간 나를 둘러싼 빛이 더욱 영롱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금의 어둠도 파고들지 못할 정도의 찬란함이었다.

* * *

“어쩌면 좋아! 황후 폐하!”

“루안, 목소리를 낮추세요!”

으음… 이게 무슨 소리야.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폐하! 괜찮으세요?”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억지로 뜨는 기분이었다. 몸 구석구석이 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했다.

간신히 희미하게 눈을 떴을 때 사방에서 빛이 쏟아졌다.

“으… 눈부셔.”

“눈 뜨셨다!”

뿌옇게만 보이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여기가 어디지? 천장이 하얀 걸 보면 병원인 건가.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가장 먼저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이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에 안심하려던 찰나 화려한 샹들리에가 뒤따라 눈에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게슴츠레 눈을 뜬 채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값비싼 장식품이 벽 곳곳에 걸려 있고 화려한 가구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고급 도자기와 대리석 탁자 위에 보란 듯이 놓인 보라색 빛깔의 세공품까지. 병원이라 치기에는 내부 장식이 너무 과했다.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건가?

“황후 폐하!”

역시 그런가 봐. 황후 폐하라니. 아까도 그렇고 무슨 이런 꿈을.

나는 피식 웃으며 간신히 뜬 눈을 다시 감았다. 그렇게 1시간쯤 지났을까.

“헉!”

아까와 달리 이번에 난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왜 아직도 꿈이야?

눈을 감고 기다리길 무려 한 시간, 꿈에서 깨어나기는커녕 정신만 더욱 맑아져 갔다.

심지어 나를 폐하라고 부르는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도 귓가에 선명하게 내리꽂혔다. 이마 위 물수건의 차가운 감촉마저 왜 이리 생생한지.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현실처럼 느껴지는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벌떡 일어섰다.

“폐하! 그렇게 일어나시면 안 돼요!”

아까부터 옆에서 간호해 주던 외국인 여자가 나를 다그쳤다. 하지만 지금 그런 말이 내게 들릴 리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크게 뚫린 창 앞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제일 먼저 보였다. 사락거리며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흘러든 빛이 넓고 푸른 잔디를 비추고 있었다.

눈을 찔러 오는 빛에 미간을 찌푸리며 더 먼 곳을 살피자 하얀 배꽃 같은 것이 피어난 산책길의 나무들도 보였다.

그 옆으로는 서양식 건축 양식을 설명하는 서적에서나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게 무슨…….”

창 너머에 이제껏 본 적 없는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저, 저기 여긴 어디죠? 당신은 누구세요?”

“!”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나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는 건 그 외국인 여자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더니 눈물을 머금은 채 나를 쳐다보았다.

“루안! 어서 의원을 다시 불러와요!”

중년의 여인이 곧 울 것 같은 그녀를 다급히 재촉했다. 그런데 잠깐, 루안?

어둠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문제의 책이 동시에 뇌리에 스쳤다. 지금 이 상황은 너무나 낯설었지만 저 이름만은 익숙했다.

설마 플로리아가 아끼던 시녀 루안? …하하,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때 방 모서리에 놓여 있는 커다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난 그것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거울에 가까워질수록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미모였다.

나는 거울에 비친 여자를 바라보며 감탄하다 뒤늦게 번뜩 정신을 차리고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거울 앞에 서 있는 건 나인데 아니, 나여야 하는데 풍성한 크림색 드레스 자락을 늘어뜨린 거울 속 여자는 분명 내가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나는 낯선 얼굴을 천천히 더듬거리다 손을 내려 윤기 나는 붉은 머리칼을 훑어 내렸다.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스쳤다.

허리 아래로 굽이치는 그녀의 붉은 머리는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색이었다.플로리아가 두 눈을 깜빡일 때면 밤하늘을 닮은 검은 눈동자가 더욱 또렷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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