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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146화 (본편 완) (146/146)

#146

온통 하얗기만 한 공간이었다. 끝도 보이지 않았고 분명 땅에 발을 딛고 있었으나 멀게 느껴질 정도였다. 시현은 아린 눈을 몇 번이나 북북 쓸어내리고는 다시금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자세히 보니 마냥 하얀 것만은 아니었다. 공간은 무언가 꿈틀거리고 휘어지며 유사처럼 흐르고 있었다.

뭐지, 저번처럼 어디 이상한 틈새로 낑겨 들어온 건가.

물론 진짜 그런 상황이라면 굉장한 위기의 순간이었겠지만 이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제게 주어진 일은 끝났으니까.

-후회하세요?

“어.”

어디선가 노랫소리 같기도 속삭임 같기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가만히 서서 대답했다.

-지금 이 공간은 시간 위에 서 있어요. 그리고 세상은 시간을 돌려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죠.

-정말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어요. 마지막까지 잘 행해 주어 감사를 표합니다.

-저는 곧 남은 의식마저 투입해 세상을 복구할 겁니다. 그럼 더욱더 단단히 잠길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게 다 평안해지겠죠.

시현은 반쯤은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멍하니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무력했다.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순간 어딘가로 의식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시현은 무언가 익숙한 듯한 느낌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반짝이는 햇살이 얇은 눈꺼풀을 뚫고 의식을 일깨웠다. 시현은 아려 오는 눈 위로 손을 올려 빛을 차단하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가 자리한 방의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빛과 바람이 살랑이고 도시의 소음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시현은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갈색의 장판 하얀 벽지, 사용감 있는 가구들. 시현의 발이 거실을 향했다. 여전했다.

이곳은 그 모든 일의 발단이 되었던 지겨운 전셋집이었다.

꿈이었던 건가? 그게 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때 마침 멍하니 걷던 시현의 눈앞에 검은색의 컴퓨터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급히 전원을 켜고 천천히 로딩되고 있는 화면을 바라봤다.

이제 생각이 났다. 그 게임 이름. ‘개벽’ 맞아. 그거였다. 세상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이 붙였던 그 이름이었다. 시현은 입술을 콱 깨물며 하나씩 떠오르는 아이콘을 유심히 살폈다.

“있다!”

시현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게임을 두 번 클릭하자 초록빛의 막대가 나타나 채워지기 시작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류! 퀘스트가 다 완료되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게임은 곧 폐기됩니다.]

“어?”

갑자기 컴퓨터가 몇 번 깜빡였다. 그러더니 네 번째쯤 깜빡이자 분명히 있어야 할 게임의 아이콘이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시현의 눈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방울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흐으…윽.”

꿈이 아니었다. 세상은 모든 일이 끝나자 정말로 되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자신만은 그 애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제는 게이트고 세네아즈고, 누군가가 목숨을 바쳐 이 세상을 구해 냈다는 걸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사실이 사무치도록 서러웠다. 이제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빙긋 웃으면서 자신도 그러하다 말해 줄 사람이 없었다.

또 소중한 이를 잃었다.

얼마간은 정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 와중에 평범해진 몸뚱이는 에너지원을 투입하라며 미친 듯이 배를 울려 왔지만, 지금은 그럴 힘이 나지 않았다.

그때 하정이 찾아왔다. 빨간 머리가 아닌 검은색의 긴 머리와 통이 넓은 바지. 그리고 널널한 티셔츠를 입은 채로 말이다.

쾅!

“야! 정시현!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미쳤, 어? 야, 너 왜 그래!”

시현은 혼비백산한 채 제게로 다가오는 하정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하정을 필두로 회사에서 친했던 직원과 친구들이 찾아왔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죽은 듯 숨을 낮추고 터져 나오는 눈물에 잠겨 지냈다. 그러나 시현도 결국 사람이라 시간의 흐름에 점점 동화되어 갔다. 그간의 기억이 뼛속 깊이 각인 되어 지울 수 없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해 냈다.

“야, 이게 나아, 아니면 이게 낫냐.”

“둘 다 비슷한데.”

“파란색이랑 하얀색이 같냐 이 새끼야? 하, 얘 이렇게 됐지?”

시현은 하정의 손에 끌려 백화점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눈앞에서 흔들어 대는 티셔츠와 바지를 보며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돌아오는 건 하정의 핀잔이었다.

파란색이면 태운이가 꽤 좋아하던 색이었다. 순간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제가 생각해도 좀 병신 같았다.

“아, 미안. 배고파서 그런가 봐. 뭐 좀 먹자.”

“어엉? 그럴까?”

휴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바글바글댔다. 아무 능력도 없는 이들이 평범하게 웃으며 지나다니는 게 아직도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시현은 하정의 손을 꼭 잡고 앞장섰다.

***

오늘은 웬일인지 태운의 생각을 하지 않은 채 하루가 지나갔다.

‘아, 이것도 그 애 생각이지….’

시현은 오늘도 실패한 연태운 생각 하지 않기 목표가 새삼 우스워 실소를 내뱉었다. 세상엔 아직도 태운이가 너무 많았다. 하다못해 같이 지내 본 적도 없는 전셋집마저 고통이었다.

생각해 보면 단 한 번도 집다운 집에서 지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무림에 있었을 때부터도 그랬다. 그래서 이곳에서 그 애를 만났을 때 집부터 데려가고 싶었던 거였다.

지금에 와서는 결국 그것이 아쉬움이 되었고 진득하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올 건데 이 배은망덕한 자식아, 찾아올 거라며….”

시현은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이슬 맺힌 맥주캔을 보다가 뺨을 기대며 엎드렸다. 도로로 몇 명의 사람이 지나갔지만 어느 하나 눈길 주는 이가 없었다. 외로웠다.

그렇게 다시 한번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시현은 완전히 해가 길어져 밤에도 뜨거워 잠이 오지 않을 때쯤엔 바다로 놀러 가곤 했다. 가을엔 낙엽을 밟으며 멍하니 걷기도 했고 겨울엔 따뜻한 핫초코를 마셨다. 이렇게까지 단 건 취향이 아니었지만 고집스럽게 핫초코를 들이켰다.

그리고 중간중간에는 가끔 파주에 들르기도 했다. 맨 처음 태운과 만난 게이트가 발생한 곳이었다. 지금은 풀이 무성한 미개발 지역이었지만 곧 개발이 될 거라나 어쩐다나. 이젠 이곳에 올 일은 없겠다 싶어 미련을 끊어 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그다음엔 예전에 인연이 있었던 규민과 유준을 찾아보았다. 규민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이득을 노리고 달라붙는 이들에게 동정심 어린 눈으로 돈을 펑펑 써 대는 것처럼 보였다. 유준은 활기찼다. 이제는 말을 더듬지도 않고 축구를 좋아하는지 학교가 끝나면 맨날 운동장에 남아 공을 차곤 했다.

그 외에 다른 이들도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다. 신류하를 잡지 안에서 제일 먼저 보게 된 것이 의외였지만 그 얼굴이면 뭐 이해가 갔다. 그 외에도 모두가 평범한, 또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다들 원래는 이렇게 살아갈 사람들이었던 거겠지.’

그렇게 시간이 끝도 없이 흘렀다. 시현은 세 번의 23살을 겪고 이제 두 번째의 27살을 앞두고 있었다.

***

새벽 3시.

잠이 여전히 잘 오지 않았다. 맥주라도 좀 할까 싶어 편의점을 가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시현은 회색 후드를 뒤집어쓰곤 슬리퍼를 직직 끌었다.

“야, 네가 말했냐? 이 미친 새끼가.”

“….”

그때 조금 오래된 건물로 차 있던 동네인 만큼 빽빽하게 자리한 골목길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제가 뭘 할 수 있나. 이제는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한데. 그렇게 두어 걸음을 옮기던 시현은 무언가 퍽하고 맞는 소리가 들리자 결국 몸을 다시 돌렸다.

“그만들 하고 집에 들어가지?”

교복을 입은 무리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남학생 하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뭐야 이 새끼는. 저희 친구들끼리 대화 나누고 있었는데요. 끼어들지 말고 가시죠. 네?”

덩치도 큰 것들이 위협하듯 몸을 부풀리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러나 기껏 일반인들의 호기였을 뿐이었다.

시현은 순식간에 그들 앞으로 달려가 주먹을 내질렀다. 훙 소리가 나며 가장 앞에서 입을 나불거린 놈의 옆으로 주먹이 스쳐 지나갔다. 고작 한 걸음밖에 남지 않은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의기양양하게 떠들어 대던 고등학생은 움찔하더니 급히 뒷걸음을 쳤다.

시현이 내공을 잃고 평범해졌다곤 하나 저딴 것들로 쫄 만큼 정신도 약해진 건 아니었다. 10년을 넘게 죽이고 또 죽여 온 삶이었다. 편하게 살아온 학생들이 그 살기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시현은 급히 도망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조금 흘러내린 후드를 다시 푹 눌러쓰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학생 괜찮아요?”

밤하늘처럼 새까만 머리를 가지고 있던 학생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분명 붉은 눈이 아닌 밤색의 전형적인 눈동자였음에도 숨이 턱 막히고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는 말랐을 거로 생각한 눈물이 다시 한 방울 흘러내렸다.

학생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랐는지 벌떡 일어나서는 시현을 내려다보다가 머뭇거리며 흥건하게 젖은 시현의 눈가를 살짝 쓸어내렸다.

“너,”

“울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마치 제 일인 것처럼 눈썹 끝을 축 내리고 울상을 짓는 표정이 한 치도 다름없이 똑같아서 시현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 참. 저는 연태운이라고 해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어떻게 사례라도….”

“…아니,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뇨! 제가 안 괜찮아요. 핸드폰 번호 알려 주세요. 꼭 보답할게요!”

“네, 네?”

시현이 어쩌지 못하고 허둥대자 연태운은 빙긋 웃으며 후드 앞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쏙 빼 간 뒤 아주 자연스럽게 시현을 독촉해 잠금을 풀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현의 핸드폰에 제 번호를 남기고 전화까지 걸어 제 핸드폰에도 번호를 남겼다.

시현은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이 되질 않아 눈물도 멈춘 채 어버버하며 그가 하는 일련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그때 아주 익숙한 형태의 손이 제 손에 감겨 왔다.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그런 저는 가 볼게요!”

그러나 정신이 돌아오고 한 짓이 이거라니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 애의 교복 재킷 끝을 잡아챈 것이었다. 시현은 제 추태를 깨닫고 재빠르게 손을 놓았다. 태운은 그런 시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네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연락드릴게요. 형.”

목소리가 여전했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는 태운의 뒷모습을 보며 바닥에 털썩 쭈그려 앉았다. 다짜고짜 눈물을 줄줄 흘려 댄 게 너무 쪽팔렸다. 그래서 저를 흘긋 보고 떠난 태운의 목덜미 부근이 빛났다 사라진 걸 발견하지 못했다.

끝이라고 생각하고 두려움에 빠진 순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시작이 다가와 있었다. 그 특별한 순간은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그리고 어떤 것보다 질긴 그 인연이 다시금 빛을 발할 채비를 끝내고 있었다.

누군가의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어차피 관계라는 게 서로의 노력과 인내가 결합한 게 아니었던가. 앞으로도 이 관계는 계속 서로 노력하고 인내하며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 본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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