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유자 10년 만에 돌아왔더니 헌터란다-145화 (145/146)
  • #145

    태운의 품 안에서 노란빛을 띤 응집 석 수십 개가 우르르 떨어졌다. 신의 광산이 이동해 올 때마다 연구원들을 습격하고 남몰래 모아 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동시에 빛을 내더니 시현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벽과 지붕을 만들었다.

    보호막이라는 이름을 단 족쇄가 시현을 감쌌다. 시현은 가차 없는 태운의 행동에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가 입술을 콱 깨물었다. 눈빛이 사나워지고 양 손안으로 내기가 빠르게 모여들었다.

    쾅!

    하늘에선 흩어진 조각들이 모여들듯이 조각조각 직육면체 모양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전투로 인해 멀리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지금만큼은 이것을 깨겠다, 그리고 나가면 연태운을 기절시켜서라도 멈추게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연태운! 너 미쳤어?! 네가 혼자 가서 뭘 할 건데!”

    시현이 반투명한 막을 쿵쿵 내려쳤다. 붉은 내기가 넘실거리는 주먹이 닿을 때마다 여지없이 흔들리긴 했지만 막은 건재했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시현은 성안으로 막의 상태를 확인하면 내기를 온통 쏟아부었다.

    꽤나 빨리 닳아 가는 내구성, 겉으로 티는 아직 안 나지만 흐려지는 것 같은 막에 시현은 말도 잊고 계속 주먹질을 해 댔다.

    그러나 흐려지던 막은 레이첼의 손짓에 초록빛이 섞이며 그전보다 단단해져 시현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여태 물약으로 버텨 온 상태였다. 몸은 축 처지고 내공은 이미 절반쯤 날아간 상태다. 시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레이첼을 바라봤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없어 길게 설명해 드릴 순 없지만 태운 씨가 응집석의 힘과 내기를 폭발시켜 공간을 띄우면 당신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니 정신 차리세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신의 광산이 융합하기 시작하면 힘들어져요. 그 전에 공간을 분리하고 끊어 낼 겁니다.”

    “제기랄! 그게 무슨 말이냐고! 태운이가 뭐 어쨌다고?”

    그러나 태운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작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시현의 고개가 휙 돌아가 다시 태운의 얼굴을 마주했다.

    “저는 결국 스승님의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정의를 위해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건!”

    그건 천마가 된 태운이 마교에 속하더라도 흔한 소설의 악인처럼 되지 않길 바라 한 말이었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과거의 저 자신이 내뱉은 거란 말이다. 그렇지만 그 말에 목숨까지 내던지라는 의미는 담지 않았었다.

    “사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이제는 제 눈앞에서 스승님이 사라지는 걸 볼 자신이 없거든요. 뭐… 마지막 기억이 이 정도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점점 태운의 몸에서 검은빛이 흘러나왔다. 착각인가 싶은 정도로 흐릿했던 것은 점점 강해져서 주변을 메꾸기 시작했다.

    몸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레이첼과 태운이 작당한 것이 뭔지 이제야 이해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속인 건지 아니면 중간에 계획이 바뀐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모든 것의 결과는 태운의 희생이었다.

    이럴 거면, 이럴 거면 다른 방법을 찾아봤을 것이다. 애초에 세상을 구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 이 등신 같은 놈아! 누가 죽어서까지 희생하래! 그런 말은 한 적 없었잖아….”

    “잘못했어요, 그러니 울지 말아요.”

    태운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시현과 레이첼의 주변은 이제 검은색 안개로 가득 차 사방이 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현의 눈에는 태운의 얼굴이 선명했다. 울지 말라며 곤란하단 듯 웃는 모습이 평소와 같아서 더욱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실패였다. 결국엔 안될 걸 가지고 구차하게 붙잡고 있었던 거였다. 검은 안개가 자꾸 짙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혼자 덜렁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태운도 레이첼도 보이지 않았다. 내기로 인한 건지 존재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귀속으로 삐이- 하는 소리가 지나갔다.

    시현은 어둠 속에서 옅을 빛을 내고 있는 보호막에 손바닥을 붙이며 멍하니 태운이 있었을 방향을 쳐다봤다.

    [끝까지 멋있고 싶었는데 안 되겠네요. 울지 말고 기다려요. 이번에도 꼭 찾아갈 테니]

    삐익거리는 소음에 전음이 섞여 들어왔다. 정말로 마지막이었다. 시현은 결국 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

    “세상은 이제 열릴 거야.”

    량차오샤는 비틀대며 네모난 공간의 한가운데에 서서 실실 웃음을 흘려 댔다.

    이 방법까진 쓰고 싶지 않았지만 비어 버린 하나의 문을 대신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비상용으로 이걸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몸이 붕괴하겠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어차피 죄악만 가득하던 세상 차라리 다 죽어 버리든가.’

    처음 힘을 얻고 해야 할 일을 깨닫고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세상의 흐름이 한곳으로 모이는 자를 직접 보니 자괴감이 들었다. 게다가 본인은 모르고 있지 않나.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이란 말인가. 량차오샤는 제가 가지지 못할 바에 부수는 것을 선택했다.

    제가 불러온 공간은 알파 공간과 원래의 차원 중간에 머무는 완충재 같은 것이었다. 알파 공간이 완전히 타 차원과 겹쳐도 곧바로 영향을 미쳐 차원이 망가지지 않게 하는.

    하지만 이제 아니게 될 것이다. 5개의 문이 융합하고 외부 존재들이 손을 뻗으면 알파 공간과 바로 이어진 이 차원은 조금씩 붕괴할 거고 그 영향력은 뻗어 나갈 거다.

    빨대만 꽂으려고 했던 저 상위존재들 입장으로선 탐탁지 않겠지만 알 게 뭐냐. 량차오샤는 박장대소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네모난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완전히 이 차원에 불러낸 상태가 아닌데도 외부의 충격이 먹혀들었다. 량차오샤의 표정이 굳어 들어갔다.

    팔에만 머물러 있던 검은 줄기가 이제 목까지 올라와 기괴한 모양이었건만 표정까지 일그러지자 더 이상 봐 주기가 힘들 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아직 저쪽 차원의 힘이 닿지도 않을 텐데.”

    점점 흔들림이 강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새어 들어왔는지 모를 검은 안개가 바닥에 드라이아이스처럼 깔리기 시작했다.

    “이건… 이런 씨발!”

    량차오샤는 기겁하고 급히 발을 움직였다. 빨리 조처해야만 했다.

    ***

    모든 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것은 얼마 남지 않은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르릉거리는 소음과 휘몰아치던 대기가 마치 진공상태에 들어선 것처럼 멈추었다. 그것은 이 검은 안개가 나타나며 생긴 변화였다. 그러나 그것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섬뜩했다.

    검은 안개는 모든 이의 시야를 빼앗고 그저 머물러 있었다. 당연히 그 안에 머물게 된 사람들도 경계를 유지하며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주 강렬한 초록빛이 어디 한군데에서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수백 수천 개의 갈래로 나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검은 안개가 그 초록빛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초록빛이 더욱더 빛을 내기 시작했다.

    모든 이의 시야를 다른 의미로 뺏어가기 시작했다. 모두 본인의 눈을 괴롭다는 듯 틀어막았다.

    그것은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빛 따위 시현에게 영향을 줄 수 없건만 이것은 달랐다. 시현은 멍청히 주저 앉아있다가 눈을 가렸다. 그리고 천천히 빛이 잦아듦에도 손을 내리지 못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면 대기에 가득 찬 이 익숙하고도 익숙한 내기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씨발….”

    허망했다. 대체 뭘 한 거지? 이제, 태운이가 없다고? 진짜? 모든 것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새도 없이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 씨,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검을 드세요.”

    분노가 치솟았다. 맘 같아선 모든 이를 다 죽이고 싶었다. 살의가 들끓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결국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속하려면 어차피 새로운 시작이 필요합니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어요. 그의 희생을 저버리지 마세요. 이 세상은 이제 그가 살아야 할 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당장 함께한다는 건 정말 제 욕심이었나. 그래, 욕심이었구나. 이 안에서 살 수 있다는 걸 그저 기뻐해야만 하는구나.

    시현은 자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흙과 피에 더럽혀져 엉망이었지만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첼의 손짓에 흘러내리는 막을 보다가 한 번 더 자조했다.

    응집석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도 배워 둘걸.

    시현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이 씨바알… 대체 너넨 뭐야! 뭐냐고!”

    그러나 멀리서 들려오는 악에 찬 목소리에 시현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바닥을 보던 텅 빈 시선이 천천히 올라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점점 초점이 맞춰지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이제는 사람의 형태만 겨우 붙잡고 있는 무언가였지만 얼굴만은 아직 알아볼 수 있었다.

    량, 모든 일의 원인.

    사실은 모든 일의 원인이라 하긴 힘들었지만, 시현은 지금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리고 저 정도면 모든 것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원인쯤은 되지 않나.

    시현은 삼 분지 이 정도 허공에서 뻗어 나온 상태로 덜렁이는 정육면체 일부를 보다가 다시 량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급히 탈출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분노도 잠시 그냥 허무함이 몰아쳤다.

    당장이라도 죽어 나자빠질 것 같은 몰골을 한 량도, 모든 힘을 쏟아 내고 지쳐서 바닥에 붙어 있는 일행들도 헌터들도, 그리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저를 바라보며 무언의 압박을 해 대는 레이첼도 그냥 다 허망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할 수 있습니다. 제 모든 것은 스승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요.

    노란 구름을 향해 기술을 사용할 때 태운이 다정하게 건넸던 말이었다. 그게 왜 지금 떠오르는지 모르겠으나. 순간적으로 태운이 옆에 버려두듯 놓고 간 천마검이 눈에 들어왔다.

    시현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마치 제 검인 마냥 온통 흑색을 한 검이 안정감 있게 손아귀에 잡혀 왔다. 일세의 명검이라는 천마검이 반항도 없이, 튀지도 않고 안온하게 잡혀 있는 것이 마치 태운 그 자체를 보는 것 같았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렸다.

    후우우웅

    무언가가 공명하는 듯한 소리가 검을 중심으로, 그리고 점점 뻗어 나가 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안 돼!”

    악에 받친, 그러면서도 간절한 외침이 시현을 막아서려 했지만, 그것은 레이첼에 의해 막혔다.

    “큭, 쿨럭.”

    불러냈던 인형들은 이미 전장에서 거의 다 부서지고 남은 두 개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레이첼은 망설임 없이 제 몸을 내던졌다. 주먹만 한 구멍이 복부 위에 새겨졌다.

    ‘당신은 멸망을 만들어 낸 자. 부디 부탁합니다.’

    레이첼의 몸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량차오샤가 그런 몸뚱이를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시현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면서 제 손 위에 있는 검을 들어 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독하게 느린 행동이었지만 그 주변의 모든 것이 일그러져 보일 정도로 강력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점점 시현의 검은색 눈동자가 빨갛게 바뀌어 갔다. 본인은 알 수 없는 변화였다.

    “이만 끝내자.”

    검이 인식할 수도 없는 수많은 의념과 의지, 그리고 흐름을 담고 떨어져 내렸다. 방향은 량이 아닌 허공, 육안으로 보면 그저 비어 있는 곳에 칼질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현의 눈에는 이제 그 흐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 안개와 초록빛이 뒤섞여 모여들고 있는 곳. 그곳에 검결이 닿았다.

    쨍!

    어디선가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시현은 그 틈으로 터져 나오는 빛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좀 쉴까….’

    이제 내일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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