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우리가 이제껏 아예 헛짓거리만 하고 저자가 펼친 계책에 당하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만큼 저자의 계획이 몇 번이나 깨부숴졌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저자가 처음 준비했던 알파 구역 안으로 신의 광산을 다 이동시킨다는 계획은 다 완료되기 전에 광산 하나를 부수면서 저지시켰고 그다음으로 준비했던 몬스터 웨이브도 저지했다.
하지만 여태까지는 그저 따라가기만 했던 것일 뿐이었다. 이제는 앞질러 나가야 했다.
량차오샤의 행동을 떠올렸다. 자신과 태운에 의해 계획이 몇 번이고 파훼되었지만 그때마다 계속해서 반격을 해 왔고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그러한 태도는 신의 광산에 어떠한 조처로 인하여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나서 가장 도드라졌다.
그런 그가 멈칫하고 제가 했던 것을 더듬고 있었다.
“네가 뭐라고 말하듯 상관없다. 어차피 계획은 실행될 것이니.”
그러나 그 짧은 침묵의 힘을 그도 안다는 듯 재빨리 대답이 돌아왔다. 시현은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
저자는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인물들의 움직임이나 상태를 대략적이나만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눈으로 보는 건 아니다.
방금의 대화로 절반의 의심이 확신이 됐다. 그는 이제 제가 보던 걸 완전히 믿지 못하겠지. 그로 인해 생각에는 딜레이가 걸릴 테고 그 찰나로 인하여 수많은 찬스가 생길 거다.
“하, 뭐가 됐든 네 맘대로는 안될 거다.”
시현은 분노에 가득 차 화가 난 듯 감정을 꾸며 내며 말을 짓씹어 뱉고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그 틈을 타서 오히려 인원을 나누고 움직여 혼란을 준 뒤 대가리를 딸 것이다.
량차오샤는 우리를 한곳에 모아 다인 대 다인의 전투로 유도했다. 저쪽에서 들이미는 인원이 많으면 당연히 이쪽에서도 대응해야 하는 인원이 많아야 했으니까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잘 잘 생각해 보면 저 대량의 적은 사실 실체가 없었다. 그저 생각할 줄 모르는 몬스터들이 대량으로 몰려오기만 할 뿐이었다. 게다가 일이 안 풀린다고 세상 자체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도 아닐 터. 그러니 저 거대한 몸뚱이를 움직이고 있는 머리만 자르면 될 일이었다.
가장 염려했던 신의 광산의 융합은 멈췄고, 그다음으로 문제였던 공간의 갈라짐은 누가 봐도 량차오샤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목표는 신의 광산에서 량차오샤로 바뀌었을 뿐 달라지는 건 없어.’
시현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굴면서 레이첼과 규민, 그리고 태운에게도 전음을 보냈다.
[어차피 량차오샤는 이 근처에서 멀리 도망가지 못합니다. 말한 대로 이곳이 저자가 원하는 장소일 확률이 크니까요. 그럼 일단 원하는 대로 어울려 줍니다. 그리고 틈이 났을 때 따로 빠져나와 태운이와 제가 양옆으로 침투하겠습니다.]
일행들의 고개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에 맞춰 내기가 폭발하듯 흘러나왔다.
태운의 공격이 마지막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
량차오샤의 말소리는 몇 번 더 이어졌지만 태운의 뿜어내는 강한 내기 폭풍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뭉그러졌다.
비록 벌써부터 많은 이의 목숨이 스러졌지만 바닥을 치던 사기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시현 자신도 태운의 힘을 보면 저절로 긴장이 풀릴 정도였는데 저들 눈에는 더 엄청나 보일 테니 오죽하랴.
태운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갈라졌다. 그 아래로 몬스터들이 우르르 쏟아져 떨어졌고 그 위를 덮는 내기 폭풍에 희생이 두 배가 됐다. 검은색 내기 폭풍이 몰아치고 나선 흰색의 유성비가 화려하게 쏟아져 내렸다.
신류하의 작품이었다. 멋 같은 건 내던지고 온몸에 그 비싼 물약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신류하는 그새 눈밑에 자리 잡은 다크서클 때문에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표정만큼은 환해 보였다.
투두두두두-
그리고 지상에서의 싸움도 다시금 힘을 받았다. 땅이 쩍쩍 갈라지며 대인원의 공격 이점이 사라진 틈을 유준의 총탄과 레이저가 널뛰었다. 그 옆을 레이첼이 만들어 낸 인형들이 줄 이었다.
시현은 그런 그들의 활약에 질 수 없다는 듯 물약을 입에 털어 넣고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물약은 지금 당장이야 힘을 회복해 줄 수 있지만 그만큼 전투 이후의 후유증이 매우 큰 아이템이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시현 또한 육체는 여전히 피곤한데도 내공이 억지로 끌어당겨 채워지는 껄끄러운 느낌을 삼키며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몬스터들은 재소환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조금씩이나마 상대해야 하는 숫자가 줄어들고는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딱히 좋은 소식만은 아니었다.
몬스터의 숫자가 줄 거라는 건 시현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예상하던 것이었다. 만약 소환 방법에 다른 조치를 취한 게 아니라면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테니까. 그 추측은 다행히 맞아떨어졌으나 하지만 시현은 그 몬스터들이 다 처리되기 전까지 량차오샤의 행방을 찾아야만 했다.
‘분명 아직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왜지?’
시현의 신경은 여느 때보다도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제가 알고 있는 기운을 가진 자를 찾지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란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투하는 척 주변을 누벼도 알 수가 없었다. 그건 틈틈히 정보를 교환하고 있는 태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태운이 둘 다 알 수 없다? 그렇다는 건 정말 아주 멀리 있을 확률이 크다는 것이었다.
설마 우리의 예상이 또 빗겨나간 건가? 이곳이 마지막이냐는 레이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 건 정말 기만책이었던 건가.
시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공허를 피하며 다시 땅에 발을 붙인 뒤 유준의 뒤에서 달려드는 몬스터를 두 동강 내고 다시 뛰어올랐다. 뒷통수가 뜨거워질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꽂혔다.
고개를 돌리자 양손을 붕방붕방 흔드는 유준이 보였다. 주변에 둥둥 떠서 몬스터를 갈아 버리는 광경만 없다면 꽤나 귀여워 보일 법한 행동이었다.
시현은 손을 한 번 휙 저어 반응해 주고는 신류하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물약을 하나 떼어 냈다.
“작작 드십시오 그러다 나중에 후유증으로 죽습니다.”
“그건 신류하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전 이번이 겨우 세 번쨉니다.”
시현은 주변을 나뒹굴고 있는 크리스탈 병의 수를 슬쩍 확인하다가 조금 더 짙어진 신류하의 다크서클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할 말이 없군요.”
하하 하고 웃어 보인 신류하가 다시금 거대한 범위 공격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양손을 눈높이로 끌어 올렸다.
시현은 바들 떨리는 손끝을 보다가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고는 다시금 주변을 탐색했다.
씨발, 대체 어디 있는 건데.
그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이 알파 공간은 제가 살던 원래 지구 차원과는 다른 환경을 만든다고 했다. 세네아즈, 그러니까 외부인의 힘을 더 쉽게 끌어오기 위해 그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려고 이 알파 공간을 만든 것이라고.
신의 광산을 모으려면 거대한 의지가 필요하고 그 힘을 쓰려면 또다시 그에 맞는 환경이 필요했다. 그 말은 이곳도 외부 차원만큼은 아니지만 그 중간쯤은 된다는 말이었다.
제가 겪었던 외부 차원이 있었다. 무림과 s급 게이트에서 겪은 것 두 가지. 아니 세 가지인가. 며칠 전에 겪었던 곳도 타 차원이라면.
‘숨겨진 공간이 있다?’
그제야 머리가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보진 못하더라도 이 안에 있는 것들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아무리 응집석을 쓴다지만 그렇게 순식간에 공간을 몇 번이나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 자신과 태운이 존재감을 알 수 없이 숨기면서도 쉽게 목소리를 전달할 순 있는 것. 또 신의 광산을 공허로 연결시키는 것 등.
그 모든 게 이 공간과 겹치는 타 공간이 있다면, 그리고 그자가 이곳에서나마 한정적으로 차원을 연결하고 끊을 수 있다면 말이 되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량은 지금 제 계획의 어그러짐을 파악하는 중일 테다. 자연히 가장 안전한 곳에 처박혀 있겠지.
시현은 눈앞에서 음속으로 날아드는 비행 몬스터를 두 동강 내며 태운에게 전음을 날렸다.
그러자 사방으로 내기를 조각내 만든 비도를 비 내리듯 뿌리던 태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확인해 보죠.]
심장이 쿵쾅거렸다. 절반은 긴장, 그리고 절반은 기대감이었다. 다른 공간의 유무를 제가 직접 확인할 수 없었기에 태운에게 부탁해야 했지만 거의 확신했다. 숨겨진 공간이 있을 거다.
이따가 그 공간이 드러난다면 그 안으로 진입해 량을 잡으면 된다.
이 모든 것의 끝이 눈앞으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태운의 동의로 인해 더욱 증폭되고 있었다.
시발, 드디어 끝이다.
몬스터들은 이제 지금 있는 헌터들로도 감당이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물론 다 살아남지 않을 거란 건 안다. 하지만 이길 순 있을 거다. 그러니 공간만 잡히면 바로 진입할 것이다.
눈앞에 보이면 못 잡을 이윤 없었다. 그리고 진짜 그자가 다른 공간을 통해 움직이고 도망치며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거라면 더더욱.
[공간을 찢어 줘. 바로 진입한다. 엄호 부탁해.]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는 태운에게 전음을 날리며 주머니에 쑤셔 넣어 놨던 물약을 다시금 목구멍 안으로 들이부었다. 이젠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 끌어올려지는 내기의 기분은 영 익숙해지지 못해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그러나 태운은 시현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공격을 뿌리던 것도 멈추고 그저 시현을 계속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왜?
시현은 단전이 있는 곳을 문지르다가 반문했다. 이상했다. 그때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이첼이었다.
“가세요. 부탁합니다.”
“어?”
어리둥절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그러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태운이 그제야 등을 돌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