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무너져 내린다. 말 그대로 하늘 위에 있던 것이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러나 그 순간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뚫고 무언가가 하늘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커먼 색을 띠어 처음엔 눈에 띄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크게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는 공허의 틈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허공의 중간쯤에 올라서자 그 큰 존재감을 잡아먹고 빛을 내기 시작했다.
남은 이들의 어리둥절한 탄성이 남은 이들로부터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가 뒤이어 터져 나왔다.
“어! 저거! 형이다. 형이 왔나 봐요!”
유준은 당장이라도 터질 전투를 위해 양손에 무기를 구현화해 쥐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규민은 그런 유준을 진정시키면서도 제게도 느껴지는 익숙한 형상에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것은 아직도 제 뇌리에 아주 생생하게 자리하고 있는 기술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발동되는지도 몰랐지만 그 위력만은 잘 알았다.
고작 1초 만에 자신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를 구했던 기술.
긴장을 풀면 안 된다는 걸 알았음에도 절로 안도감이 들었다.
‘정말 태운 님은 아군으로서 너무나 든든한 존재야.’
이제 힘의 균형이 맞추어졌다. 조금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런 뿌듯함과 기쁨으로 넘실대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검은색의 얇은 줄기가 목표로 한 위치까지 다다라 가는지 점점 안개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구름을 점점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그래, 저건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닿는 부분부터 천천히 노란빛의 구름이 깎여 나갔다. 속도 또한 빨랐다.
그걸 보자 이제는 좋은 기억으로만 남았던 그때의 장면이 다시금 규민의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와 닿는 예전과 비슷한 기운에 그때의 기억이 완전히 생생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서 잠시 잊고 있었으나, 그것은 정말 광포한 기운을 펼치고 싶어 안달이라는 듯 주변인들을 압박했다.
물론 태운이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자칫하면 아군도 쓸어 버릴 정도였단 말이다.
‘몇 달 지났다고 그걸 잊었네.’
규민은 저처럼 슬슬 표정이 굳어 가는 헌터들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였다. 이 이상 더 공포감이 든다면 아군임에도 경계를 살 거다. 인간이 가진 생존 본능이란 늘 그랬다. 그리고 규민은 시현과 태운이 한 고생을 알기에 그들을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저희도 움직이죠?”
그리고 그건 신류하와 레이첼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어지는 규민의 말에 군말 없이 손을 뒤집었다.
그러자 손에서 빛이 나면서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곧 움직일 거니까 스킬이 남은 자는 앞으로, 사용한 자는 뒤로 움직여 대열을 맞추라는 신호였다. 헌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상황에서 저들을 살릴 수 있는 건 이 빛으로 만들어진 신호뿐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헌터들의 몸 위로 응집석이 띠고 있던 옅은 초록빛이 은은하게 흘렀다. 그리고 그만큼 레이첼은 꽤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 좋은 파트너예요. 시현 씨와 태운 씨는.”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요. 세웠던 계획대로 가야죠. 우리는 저 둘이 해결하는 동안 주변을 가드하고 시간을 벌 겁니다.”
“…알겠습니다.”
신류하는 평소와 달리 조금 느껴지는 괴리감에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저 때의 레이첼은 제가 아는 레이첼이 아니었으므로.
***
“헉, 허억.”
시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제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내가… 어떻게.
“잘하셨어요. 스승님.”
“진짜, 허억. 내가 진짜 성공했네….”
“할 수 있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태운은 제게 이상하리만치 단단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줄어드는 법이 없었다. 태운이 내뱉은 칭찬과 신뢰 가득한 목소리는 시현을 저도 모르게 들뜨게 했고 심지어 조금은 우쭐해질 정도였다.
그렇기에 처음 이 방법을 제안했을 때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스승님은 정말 끝에서도 가장 끝에 도달해 있다. 조금의 깨달음만이 남았을 뿐이다, 라며 시현을 뒤흔들었다. 그 말은 무인이었던 시현의 호승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게다가 더 강해진다면 둘의 생존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테니 그것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비록 기운이 쪽 빨린 무인이 숨을 헐떡이고 있긴 했지만,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경지에 혀가 내둘러졌다. 사실 태운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해낸 거지 앞으로 조금 더 받아들이고 체득해 나아가야만 했다.
한마디로 완전히 제힘으로 펼친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단 말이었다.
‘그래도 조금의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지.’
시현은 반쯤 사라져 가는 노란 구름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정말 불길하고도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던 것이었다. 잘하면 남아 있을 이들이 살아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제 그것도 과거가 되었다.
“태운아, 미안하지만 조금만 잡아 줄래.”
“그럼요.”
“고마워.”
“별말씀을. 당연한 겁니다.”
시현은 당장 주저앉아 운기 조직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단전의 공허감을 애써 억누르며 태운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는 걸 택했다. 비록 구름에 조치를 취했다곤 하나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본진엔 무엇보다 태운의 힘이 가장 크게 필요할 것이다.
혼자 먼저 가라면 절대 안 움직일 놈이니.
“엇!”
그러나 이런 것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
태운은 늘어져 있는 시현을 슬쩍 보더니 신묘하게 몸을 움직여 시현을 등 뒤에 업고 양손을 앞으로 내어 바짝 밀착시킨 뒤 뭐라고 말할 틈도 내지 못하게 곧바로 경공을 시전했다.
정말 꽤 오랜 기간을 지냈지만 이렇게 무기력하게 온몸을 기대어 업힌 것은 처음이었다. 새삼 저보다 커진 태운이 느껴졌다. 물론 키가 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기대어도 등이 남는다는 걸 직접적으로 깨닫자 기분이 묘해진 것이다.
‘에휴, 좋은 게 좋은 거지.’
오죽하면 눈치 보다가 그랬겠어. 분명 평소의 저라면 절대 업히지 않겠다 고집을 부렸겠지만, 지금은 조금 기대고 싶었다. 머리가 자꾸 멍해지려고 했다. 계속 빠그라지는 계획과 새로게 비집고 들어오는 일들. 그리고 속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있는 한편 길을 잃은 일 등. 그 모든 게 시현을 괴롭혔다.
힘까지 왕창 뽑혀 나간 마당에 잠시만이라도.
시현은 결국 바짝 들고 있던 고개를 돌려 목덜미에 푹 기대었다. 그러자 아주 미세하게 움찔 튀는 근육이 느껴졌다. 푸스스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와중에 이렇게 간지럽고 웃음이 나와도 될까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뭐 어쩌랴.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일을 해 나가고 있으니 이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세상은 가혹했다. 늘 시현에게 시련만 주던 세상이었다. 시현이 조금이나마 느낀 안도감, 혹은 여유가 괘씸했는지 그에 대한 벌을 주고 싶다는 듯 좆같은 일을 눈앞에 던져 주고 있었다.
분명 가장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던 것은 없앴다. 그렇기에 제가 이리 빌빌대고 있지 않나. 그러나 막사가 있어야 할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보인 것은 이리저리 미친 듯이 파인 크레이터와 조각난 살점들이었다.
한마디로 반쯤 패배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는 무명이었다.
“형님! 쿨럭!”
“규민 씨!”
말문이 막혔다. 회심의 일격을 저지했고, 제가 이곳에 가까워져 오면서 몬스터를 소환하는 체계도 망가졌을 테다. 그런 가정을 하라면 절대 무명이 한순간에 이리될 수 없었다.
시현은 저 앞에서 저 많은 몬스터들을 상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절반의 헌터들과 신류하, 그리고 유준이 쏘아 대는 빛의 광선을 보다가 다시금 시선을 돌려 후방을 훑었다. 온통 상처를 입은 사람들과 소수의 의지마저 잃은 사람들. 속이 쓰렸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러나 그때 그런 의문에 대답을 해 줄 만한 이가 천천히 막사로 쓰고 있던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레이첼!”
“시현 씨 오셨군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레이첼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 사살하듯 레이첼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이 또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량차오샤가 숨기고 있던 수단이…. 많았더군요….”
시현은 더 깊이 생각해야만 했다.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었다. 그리고 량차오샤는 아주아주 조심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 계획이 망가졌을 것에 대비한 다른 수단을 몇 개씩이나 만들어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혹여나 잃어버릴까. 제 몸에 이식해서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것까지 차마 생각하지 못한 피해가 이렇게 돌아온 것이었다. 시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횟수로 치면 벌써 네 번째였다.
눈앞에 태운이 있자 곧바로 다 버리고 몬스터 소환지로 온 것, 그곳도 제게 파훼당했으나 또 곧바로 저를 유인하며 함정에 처넣은 것, 그리고 상관없는 장소에 들려 혼란을 주고 사실은 이곳에 먼저 와 일행들의 뒤통수를 친 것, 또한 제일 최후에 보루처럼 보이는 기술을 없앴는데도 쉬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한 것.
아주 지긋지긋했다. 왜 레이첼이 그동안 이자들을 잡아내지 못했는지 이제는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살아 있는지는 몰랐는데. 하, 이것 참.”
그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수십 미터의 공간이 쾅 소리를 내며 길게 뒤엎어졌다.
하나 그 공격에 걸려서 목숨을 잃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또 소리만을 이동시킨 것일 테다. 태운은 반사적으로 공격을 내질러 거칠게 뒤엎어진 땅거죽에 시선도 주지 않고 그가 있을 법한 몬스터들의 벽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대체 너는 뭐지? 공허에 진입하면 절대 살아나오지 못했을 텐데.”
그러나 그를 조롱하듯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운은 이번엔 섣부르게 손을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신의 광산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솔직하게 알려 줘야 할 필요 또한 없었다.
“거짓말이로군. 네가 들어간 걸 확인했다.”
“직접 본 것도 아니면서 확신해?”
순간 말소리가 멎었다. 시현은 티 나지 않게 한쪽 입꼬리를 꿈틀댔다. 걸려들었다. 저 말은 최소한 신의 광산에 관해서는 기운이나 움직임을 체크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완전히 백 프로 장담하진 못한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 머리가 팽팽 돌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 자신과 태운이 자기가 파 놓은 함정으로 가지 않았단 뜻이고 다른 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했는지.
시현은 그게 필요했다. 본인을 향한 믿음의 붕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