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직접적으로 부딪힌 적은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적긴 했지만, 세상이 바뀌고 몇 년간 지겹도록 부딪혔던 인물이었다.
지독한 손속과 일 처리에 몇 번이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삼켜야만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손속에 제 부모의 생명도 한 줌 모래알처럼 손쉽게 날아가기도 했고.
신류하의 손이 당장이라도 공격을 하려는 듯 움찔 떨렸지만, 그 충동적인 반응은 레이첼의 제지로 이뤄지지 못했다. 분노로 차갑게 십은 손 위로 따듯한 온기가 느껴졌다. 신류하는 몇 번이고 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다잡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여기로 온 걸 보니 시작점은 여기였군.”
레이첼이 그런 신류하를 위로하듯 손을 한번 꽉 쥐었다 피곤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는 들어 본 적도 없는 아주 차가운 목소리였다.
“뭐, 대답을 바라고 물어본 건 아닐 테고. 참 오랜만이야.”
빈정대는 듯 누가 봐도 나 여유롭다고 하는 느린 목소리가 레이첼의 심기를 건드렸다. 하지만 그러고 잠시 레이첼은 그 말의 속뜻을 알아채곤 피식 미소를 지었다.
“까칠하네? 뭐가 마음대로 잘 안되나 봐.”
저 멀리에선 몬스터들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고 제 뒤에는 헌터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온통 침묵뿐이었다.
서로 인지되지 않는 상위존재의 힘을 쓰고 있었고 그 힘의 종류가 비슷했지만 그렇다고 서로가 사용하는 힘의 원리를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량차오샤가 뭘 하려고 저러나 완전히 확신할 순 없었지만, 레이첼은 알았다. 진짜로 여유가 있었다면 이렇게 먼저 제 앞에 서서 입을 털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시간을 벌어 보거나 이곳에서 해야만 하는 게 있는 거겠지.
“…떠볼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나는 단지 이곳을 정리하려는 것뿐이거든.”
“여전하네. 이름도 없던 시궁창 쥐새끼가 남의 인생 뒤집어쓰곤 뭐라도 있는 듯 구는 거.”
“하하. 이미 죽어 뼈도 남지 않은 부모와 함께 너도 사라져 버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사이로 살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레이첼과 량차오샤의 뒤섞인 시선이 뚝 끊어졌을 때. 마치 짜 맞춘 듯 헌터들의 스킬이 미친 듯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몸 위로 빛이 스며들고 땅 위로 수십 개의 문양이 생겼다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레이첼이 한 발짝 물러서고 량차오샤가 흐릿한 잔상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 이후는 신류하의 차례였다. 광범위 마법이 펼쳐질 기미가 보였다. 대기가 흔들리고 마나가 요동쳤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신류하가 둥둥 떠서 하늘에서부터 무언가를 불러들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었지만 눈을 괴롭히지 않았다. 헌터들은 포근함을 느끼며 저 거대한 빛이 메테오처럼 몬스터들의 파도 한가운데로 떨어지길 기다렸다. 저게 신호탄이 될 것이다.
쿠우우우-
얼핏 보면 태양이 떨어져 내린다고 생각할 만했다. 거대한 빛 덩어리는 신류하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그러나 차근하게 중력을 받으며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간격이 50km, 20km, 그리고 10km가 됐을 때. 드디어 추락의 범위에 들어간 몬스터들이 퇴마당하듯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비행 몬스터들이 쓸려가고 그다음엔 거대 몬스터들이었다.
결과는 조용했다. 피가 튀는 것도 아니고 살점들이 날아다니는 것도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섬뜩했다. 하지만 일행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지는 몬스터들을 보며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전투감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다음!”
빛이 반쯤 땅으로 사라졌다. 일몰하는 해처럼 거대한 빛의 구가 절반만이 남았을 때 신류하의 입에서 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 비서가 하듯 따로 스킬 마크를 사용한 것이 아님에도 목소리는 빛을 타고 전장 구석으로 빠짐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동시에 마치 무언가로 쥐어짜는 듯한 바람 빠지는 소리와 물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거대한 불꽃의 뜨거움, 오감을 어지럽히는 커다란 소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 다른 광범위 마법들의 공격이었다.
사방으로 불꽃이 몰아치고 번개가 내리치며 몬스터들을 바싹하게 구워 버렸고 수백 개의 철 조각으로 만들어진 폭풍은 이리저리 행진하며 앞에 있는 몬스터의 무리를 철저하게 갈아 버리고 있었다.
아비규환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셀 수도 없는 목숨이 사라졌다. 아직 거리가 있었기에 코앞에서 그 모든 광경을 보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평범한 인간들보다 기본 능력치가 좋은 헌터들에겐 거리낄 것 없이 선명하게 눈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저 광범위 마법이 휩쓸고 난 자리는 이제 근거리 딜러들이 투입될 시간이었다. 그걸 보고 있는 헌터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제 차례를 기다렸다. 신류하는 그런 그들을 위로하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버텨야만 했으니까.
“겁먹지 마라.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한다.”
몬스터들의 러시는 끊임이 없었다. 헌터들의 거대한 공격이 처음의 승기를 잡은 것은 맞으나 저렇게 끝도 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끝까지 상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신류하의 등 뒤로 식은땀이 버티지 못하고 주룩 흘러내렸다.
‘분명 지금의 상황을 그 사람은 눈치를 챘을 거야.’
하지만 신류하는 죽을 각오를 했을지언정 그냥 싸우다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 아직은 방법이 있었다. 이 알파 공간이 이상 현상을 대놓고 내보이며 변화를 예고했다. 그냥 번개 수준도 아니고 공간이 찢어지며 공허를 조금씩 내보이고 있으니 아마 이것을 직접 경험한 시현이라면, 그리고 그들이 알기 힘든 흐름을 읽는 연태운이라면 분명 눈치챌 것이다.
량차오샤의 도망은 저급한 유인책이었고 종착지, 또는 시작점이 이곳이라는 걸.
신류하는 도망치진 않았지만,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잔뜩 긴장하고 있는 이들을 훑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제기랄.”
광범위 마법이 다 끝나 가고 있었다. 힘을 잃은 스킬들과 마법들이 사그라들고 텅 비어 버린 자리를 또 다른 몬스터들이 메꾸기 시작했다. 속도는 매우 더뎠지만 어쨌든 그들은 저들의 회복력을 감당하지 못할 테다.
그래도 반나절이라면…
그때 신류하의 기대를 박살 내며 적진에서 노란빛이 사악 하고 터져 나왔다.
그리고 신류하의 품 안에 있던 탐지기가 펑 터져 망가졌다. 여명회와의 끝없이 이어진 전투를 하며 만들어 낸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웬만한 공격에도 버틸 만큼 튼튼한 물건이었단 말이었다. 하나 저 기운이 터져 나오자마자 부서지다니 그 말은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 단번에 풀려서 무언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아직도 좆같이 여유로운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련하게 흘러들어 왔다.
[대신 수고를 해 주어 고맙군.]
“젠장!”
신류하는 그제야 얼굴을 와작 일그러트리며 떠 있던 허공에서 뚝 떨어져 땅을 딛고는 거치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레이첼과 시선을 나누고는 무어라 의논을 나눌 새도 없이 주머니를 건네고 레이첼이 불러낸 인형들과 함께 서서 물샐틈없이 가드를 서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포메이션이었는지 헌터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잔뜩 당황해하고만 있었다.
레이첼의 손이 급히 움직여 주머니를 열고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시현이 가진 진한 초록빛보다는 조금은 옅은 빛을 띤 응집석이였다.
계획했던 기간이 길어지고 여유가 생기면서 부랴부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위기를 생각하며 무리해서 완성한 결과물이었다.
혹시 모를 위기를 위해 만든 것이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지라 레이첼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이걸로는 오래 버틸 순 없어.’
레이첼은 이것에 완전한 보호의 의지를 주입할 생각이었다. 단순히 하나의 명제라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끝은 있었다. 상황이 이제는 온통 뒤섞여 이제 한 치 앞의 상황도 예측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작은 정보의 부재들과 급박하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나온 혼란이었다.
사실 량차오샤가 공장같이 뽑아내는 응집석에는 인간의 생명력만을 사용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시현과 일행들은 죄다 인간을 잡아 오거나 죽인 흔적들만 봤기에 착각을 한 것이었다.
이곳에서 힘을 쓰려면 이곳의 기운이 가득 들어가 있는 게 순도도 놓고 좋은 건 분명했다. 하지만 간단한 행위를 할 때는 몬스터들의 생기를 뽑아 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자잘한 것들은 혼탁한 생명력으로 생산이 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였을 뿐. 혼탁한 힘으로 이 세상의 인간들로부터 뽑아낸 생명력만큼의 힘을 만들어 내려면 한 장소에서 열 배 이상의 희생이 있어야 했다. 초반에 힘을 쌓아 간 이후엔 너무나 가성비가 극악인 방법이었기에 잘 사용하지 않았다.
몬스터들을 한 장소에 모으는 것부터 일이었고 그걸 빠른 시간에 내 처치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기에 량차오샤는 지금 이 순간이 오길 기다려 왔다.
“레이첼 님! 발동을!”
노란빛이 점점 퍼지더니 하늘까지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빛이 아니라 먼지, 혹은 황사처럼 보이고 있었다. 저것이 이쪽까지 퍼져 오면 정말 그대로 목을 틀어막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기운은 옆으로 퍼지지 않고 점점 둥둥 떠오르더니 하늘을 막기 시작했다. 마치 노란빛의 구름 같았다.
그와 함께 레이첼의 조치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곧이어 온통 노란빛 사이에서 초록빛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씨앗을 내린 그 힘은 점점 기지개를 켜고 헌터들을 감싸며 퍼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간을 제때 맞춘 듯했다.
콰직.
그러나 노란 구름에서부터 검은 번개가 내려치자 가장 뒤에 있던 어린 헌터 하나가 너무나 쉽게 소멸되어 사라졌다. 순간 희망으로 가득하던 헌터들, 그리고 레이첼과 신류하의 표정이 한없이 처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고개를 들어 바닥으로 내려쳐지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번개, 아니 공간의 갈라짐을 바라보며 어금니를 강하게 즈려물었다.
하늘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