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결과적으로 후에 일행들과 의논하고 움직이겠다는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끈적이는 살기와 짐승 특유의 노린내가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다. 시현은 휙휙 지나가는 풍경에 시선을 두지도 않고 반투명한 지도를 보며 쉬지 않고 달렸다.
‘빨리 량차오샤를 잡아다가 멈추게 해야 해.’
알파 구역에 이상이 생겼다. 처음은 작게 내려치는 천둥과 번개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것이 점점 두꺼워지고 강해지더니 기어코 공간을 갈라 버렸을 땐 시현마저 멍청하게 그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땅과 땅 사이, 하늘과 하늘 사이에 이상한 검은 줄이 군데군데 만들어졌다. 그리고 시현은 그것을 만져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틈새였다.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두 번이나 겪어 본 사람으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틈새는 계속해서 세상에 새겨지고 있었다. 시현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세 줄기가 새겨지며 시커먼 속내를 벌려 댔다.
그때 태평하리만치 느긋한 진동음이 시현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단 하나였다.
각자도생.
레이첼이 의도한 의미는 각자 할 일 하자는 뜻일 테다. 시현은 제 핸드폰 안의 내용을 빤히 바라보는 태운의 등을 탁 치곤 말없이 땅을 박찼다. 태운 또한 별다른 의문 없이 발을 움직였다.
풍경이 휙휙 지나가며 잔상을 남겼다. 그 와중에도 시현의 눈은 빠르게 움직이며 눈앞의 지도를 계속 확인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량차오샤는 지금 제가 살아 있다는 걸 모른다. 그리고 이 반지가 제 손에 들어와 있는지도 말이다. 량차오샤의 움직임을 확인하던 시현은 한쪽 입꼬리를 씩 밀어 올렸다.
곧, 눈앞이 고지였다. 이쪽으로 움직일 것도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지도가 없어도 찾을 수 있을 만큼 량차오샤의 행방은 그림처럼 훤했다.
이곳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신의 광산. 어떤 방식으로 이동을 이렇게 빠르게 해 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위험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했기에 원래 강원도 신의 광산이 있던 곳에서 사라졌을 땐 제일 먼저 향하려고 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런 씨발.”
그러나 곧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정신이 조금 풀어진 것일까. 지도에서 량차오샤의 흔적이 사라지고 제가 떠나왔던 곳에 다시 나타났을 땐 시현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
“…량차오샤가 강원도 신의 광산으로 이동했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시현은 이제 선택해야 했다. 그가 혹시나 그곳에 무언가 중요한 걸 남기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빨리 가서 회수하거나 없애야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공간이 이렇게 깨져 나가는 상황에라면 일행들이 빠르게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
시현은 우두커니 서서 입술을 세게 물어뜯었다. 초조해졌다.
“스승님, 돌아가요.”
“어?”
그러나 그 고민은 태운의 단호한 음성에 금방 기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시현은 태운의 결정에 의아하단 얼굴로 반문했다. 온통 낯선 상황의 연속이었다.
“가요.”
그러나 뭐가 이상한지 따져 보기도 전에 태운에게 손이 잡히고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엇갈리듯 움직이던 발이 금세 제 패턴을 찾고 보법을 밟았다. 몸이 죽죽 늘어나면서 거리가 빠르게 좁혀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사실은 누군가 일행부터 챙기라고 떠밀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시현에게, 적어도 유준과 규민은 죽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무턱대고 뛰쳐나가지 않겠다. 약속까지 했었다. 그리고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다. 아무리 상황 때문이라지만 무엇하나 지켜 주지도 못했기에 시현은 주먹을 꽉 쥐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마음이 하나로 합쳐지자 이리저리 꼬여서 퍼져 있던 집중력이 급격하게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가 다른 곳에 뭘 숨겨 두었든 내가 먼저 저 새끼를 잡아 족친다면 그것도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 모든 일의 주동자는 량차오샤였다. 해결해야 할 일들이 세세하게 나누어져 있었기에 본질이 흐릿해져 있었지만, 다시금 하나의 깨달음뿐이었다.
하나하나 닥치는 일만 앞에서 부랴부랴 막을 게 아니라 애초에 주동자부터 뿌리 뽑으면 된다.
시현은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누린내의 원인을 보며 거칠게 검을 뽑아 들었다.
“지체할 시간 따위 없다.”
살기가 주변을 잠식하다가 검이 향하는 곳을 향해 쏟아졌다. 보통의 몬스터라면 지레 겁을 먹고 사렸겠지만 지금 저를 향해 달려오는 저 덩어리들은 이미 누가 봐도 눈이 회까닥 돌아 있는 상태였다. 무언가 조처를 한 것일 테다.
물론 그 정도야 충분히 예상 범위 내였다. 인간들도 같은 인간에게 약을 먹여 전쟁터에 내보내는데 몬스터에게 하지 않았을 리가.
쿠오오오!
그 순간 철 몽둥이처럼 생긴 양팔을 우악스럽게 휘두르며 다가오던 가장 선두의 몬스터가 포효를 질러 댔다. 포효는 전염되듯 퍼지며 이 분위기를 더욱 고치시키고 있었다. 그냥 눈만 돌아가 있던 몬스터들의 표피 위로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반면에 살덩어리 위로 눈코입이 있을 자리에 난 구멍들이 오물오물하며 쪼그라들었다.
“하여튼 이것들은 왜 다 하나같이 역겨운 모양새인 건지! 천세파형!”
시현의 몸이 번쩍 떠오르고 검붉은 내기가 파도처럼 앞을 향해 번져 나갔다. 말 그대로 번지듯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번짐에 닿은 것들은 마치 분쇄기에 그 부위를 들이댄 것처럼 갈아져 뭉개졌다.
종류는 얼굴로 보이는 부위, 팔다리, 몸통, 가릴 것 없었다. 비록 단번에 목숨을 끊어 내는 기술은 아니었지만, 범위가 넓고 아주 큰 고통을 남기는 기술이었기에 시현의 검로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물결 뒤로 이제는 거대한 벽이 밀려들어 갔다. 자세히 보면 다 떨어져 있는 작은 점들의 집합이었지만 몬스터들의 눈에는 그저 벽으로 보일 테다.
벽은 거침없었다. 시현의 공격으로 괴성을 지르며 꿈틀대고만 있던 몬스터들의 목줄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추에라도 맞아 터져 나가듯, 유압 프레스에 눌려 사라지듯 몬스터들은 의기양양하게 덤벼들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허무하게 스러져 갔다.
수많은 핏물이 흘렀다. 그러나 시현의 표정은 말할 것도 없이 차가웠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의 동요가 있었건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진 것 같았다.
사실 사라진 게 아니라 다시 돌아간 것일지도 몰랐다.
시현의 표정은 무림에서의 얼굴과 점점 비슷해지고 있었다. 태운과 말랑한 추억도 많았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전투를 치르며 살아가던 삶이었다. 정말 지치는 하루하루였다. 그 사이에서 태운은 한 줄기 빛이었다.
시현은 이제 거의 다 처리가 되어 가는 몬스터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언제 또 저를 보고 있었는지 동그란 눈동자와 정통으로 마주쳤다.
오롯이 저를 바라보는 눈.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안광과 맑은 붉은빛. 시현은 그제야 숨을 들이마시고 숨을 내뱉었다. 몰랐었는데 제 목을 콱 틀어막던 무언가가 한숨과 함께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스승님, 가실까요.”
“어, 가자.”
시현은 그런 저를 보며 빙긋 미소 지어 주는 태운에게 마주 웃으며 다시금 속도를 내어 막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도착까진 대략 10분만의 시간이 남았을 뿐이었다.
***
“당장 대형 맞춰!”
이 비서는 제 쇄골쯤에 있는 무늬를 발동시키며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전장 구석까지 선명히 들릴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헌터들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는 듯 급히 정했던 대열을 맞추며 빠릿빠릿하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곳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였다. 번개가 내려치고 그 후엔 공간이 찢어지기 시작하고. 물론 그때까진 괜찮았다. 이 구역 안에서는 환경이 변화무쌍하게 바뀔 거다 예상했었기에 그러나 공간이 찢어지면서 몬스터까지 몰려드는 건 아무리 예상했었다고는 해도 지금 이 인원으로는 무척이나 벅찬 것이었다.
하지만 레이첼은 시현에게 량차오샤를 잡으러 가라 전달했다. 결국 지금의 상황은 맨 처음의 계획과 유사했다. 자신들이 몬스터들이든 적이든 붙잡고 있는 동안 시현과 태운이 적진의 중심을 꿰뚫는 것. 결국 지금과 별다른 것도 없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후유증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이곳의 누구보다 제가 제일 편하게 지내고 있었어요. 그걸 부인하는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그래요. 제가 주변을 가드하겠습니다. 중앙부터 파고 들어가세요.”
레이첼은 안타깝다는 얼굴을 한 신류하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선 이내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문이 구체적일수록, 길수록 설정들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그리고 제 인형들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줄 새 모델들이 있었다.
레이첼은 시현과 태운을 떠올리며 최대한 많은 정보를 겹치지 않도록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주문이 끝났을 때, 레이첼의 주변 흙바닥이 꿈틀대더니 점점 솟아 나와 무언가를 형성했다.
그것은 인간이었다. 형태 자체는 조금 뭉툭해 딱 봐도 인간은 아니구나 싶긴 했지만 그래도 꽤나 정교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들은 알게 모르게 익숙한 사람과 닮아 있었다.
“출발하죠.”
그 말과 함께 레이첼의 양옆으로 솟아났던 두 개의 인형이 천천히 허리에 달린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평소라면 저 옆에 있는 것은 마력을 쓰는, 저를 닮은 인형이었을 테다. 신류하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인형들의 앞에 섰다. 지금은 잡다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귓구멍을 찌르는 듯한 괴성이 퍼지기 시작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언가가 뭉쳐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할 일은 저것들을 분쇄하고 시현과 태운이 움직일 시간을 벌어 주는 것. 그리고 살아남는 것. 그것이었다.
그리고 자신 있었다. 저딴 몬스터들의 러시쯤이야 힘을 분배해서 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이군요.”
그러나 익숙한, 그리고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울리듯 들려오자 몸이 쩡 하고 굳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