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그건 이제 괜찮으니까… 일단.”
시현은 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고는 레이첼에게 강렬하게 눈빛을 보냈다. 레이첼은 당장 다른 주제를 꺼내 달라는 간절함을 보며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흠흠. 어쨌든. 마무리 신의 광산이 저 세네아즈들의 힘을 가지고 오랜 시간 정교하게 만들어 낸 시스템이라고는 하나 그렇게 맘대로 차원을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힘들게 차원들을 찾으러 다니고 이런 잔수작질을 부리며 시간을 끌 필요도 없었겠죠.”
맞는 말이었다. 시현은 량차오샤가 무슨 짓을 벌였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이게 량차오샤가 의도했던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뒤집어 보았다.
“시작은 량차오샤가 했을지 몰라도 시현 씨의 특성이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당신은 예상하기 힘든 사람이거든요.”
시현은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는 레이첼에 조금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분명 좋은 말 같았지만 뭔가 모르게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에 마냥 좋아하기도 힘들었다. 시현은 몇 번 헛기침하곤 대답했다.
“어쨌든 좋은 방향이라는 뜻이죠?”
“예. 덕분에 가장 최악의 일은 막은 것 같습니다. 자, 주제 돌리는 건 이쯤하고, 한 가지 변동사항에 대해 말해 보죠.”
“변동사항이요?”
“마지막 신의 광산이 나타났어요.”
다시금 소음이 잦아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었다.
시현은 침착하게 말을 꺼내는 레이첼과 일행들의 표정을 한번 슥 살폈다. 그리고 잔뜩 입술을 내밀고선 부루퉁한 얼굴의 태운을 스치듯 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놀라지 않는군요.”
이미 신의 광산을 여러 군데 털면서 예상했던 일이었다. 신의 광산과 딸려 보낸 연구원들, 자신은 꼭 필요한 존재라고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절규해 대던 내용들. 그리고 멀리서가 아니라 굳이 이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던 량차오샤.
신의 광산을 이 장소에 모으는 것만이 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대충 예상했던 일이었습니다. 길게는 설명해 주지 못했지만 그래서 이미 이동해 온 신의 광산들을 돌면서 주변을 정리했던 거고요.”
주변을 미리 정리하고 있겠다는 정보는 레이첼과 일행들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도 전해 받았던 정보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시현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예상하고 행동으로 옮겼다곤 생각지 못했다.
레이첼은 잠시 눈을 빛내고는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방향이었지만 조금 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제 생각보다 너무 잘해 주셔서 이거 뭐 제가 할 일이 많이 없네요.”
“뭐 제 목숨이 걸린 것과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렇지요.”
“…후우, 그럼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죠?”
시현은 자꾸만 주제를 두고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은 레이첼에 한숨을 푹 쉬고는 먼저 말을 툭 꺼내 놨다.
물론 제가 겪은 일을 아는 것도 중요했고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게 됐는지 과거의 일을 아는 것도 중요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미래의 일이었다.
변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어떻게 마무리를 낼지 말이다.
그때 두 사람의 말이 잠시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그건 이제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계획은 필요 없어.”
시현의 눈은 먼저 말을 꺼냈던 신류하가 아니라 제 뒤에 있는 태운에게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태운의 표정은 아까처럼 불퉁하지 않았다. 단단히 굳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태운의 표정을 읽지 못한다는 건 돌려 말하면 태운이 제게도 표정을 숨기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잠시만요! 지금 량차오샤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아뇨, 알아요.”
“예?”
하지만 시현은 그저 태운의 편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태운은 바보가 아니다.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감정에 휘말릴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 저 말은 충동적으로 나온 게 아니라 충분히 생각하고 뱉은 말일 테다.
“신의 광산을 털다가 입수한 아이템이 있습니다. 그걸로 량차오샤의 위치를 대강이나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자가 만약 일부러 신의 광산으로 저를 유인하고 이상한 곳으로 날아가게 만든 거라면 방심하고 있을 겁니다.”
시현은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신류하에게 조금 미안하단 표정을 짓곤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제는 눈앞에 태운만이 남아 있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 하지만 시현은 천천히 발을 뗐다.
“혀, 형님. 그래도 얘기는 들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맞아요. 형 이제 돌아왔잖아요….”
그러나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뚝 하고 멈췄다. 여태까지 조용히 경청만 하고 있던 규민과 유준이었다. 저를 위해서 부득불 우겨 가며 위험으로 가득 찬 이 알파 구역 안으로까지 들어온 이들.
“얘기를 아예 안 듣겠다는 게 아니야…. 당장 내가 튀어 나갈 거라고 생각했어?”
“아… 네.”
“이 자식들이.”
시현은 불안으로 가득 찬 눈을 하곤 저를 올려다보는 유준과 규민의 어깨를 조금 힘주어 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지만 나는 태운이 얘기를 먼저 들어 보려고 해. 막무가내로 뛰쳐나갈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유준과 규민 덕분일까. 순식간에 칼같이 날카로워졌던 분위기가 조금 흐려졌다. 시현은 후 하고 한숨을 내뱉고는 신류하에게 시선을 돌려 작게 눈인사하곤 태운의 손을 잡았다.
***
저벅저벅.
잘게 다져진 흙바닥을 즈려밟는 소리가 수없이 겹쳤다.
막사 밖은 아직 완전히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남은 물자들을 파악하는 자들, 그사이에 생긴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위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이 비서님까지.
그들의 바쁜 걸음과 시현과 태운의 걸음이 계속해서 겹쳤다. 그러나 둘이 조금씩 속도를 내자 소음은 순식간에 멀어졌다.
풀은 온통 타죽어 사라지고 민둥한 흙만 내보이고 있는 언덕 위에 시현과 태운이 섰다. 내내 이어지던 전투가 꿈이라는 듯 불어오는 바람이 청량했다. 시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선 먼저 입을 뗐다.
“레이첼이랑 무슨 얘길 했구나.”
순간 제 옆에 있던 태운이 순간적으로 제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매만졌다.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처럼 보였지만 시현은 알 수 있었다. 연태운은 흔치 않게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너보고 안 거 아니야. 표정을 아주 귀신같이 숨겼더라고.”
그렇단 말은 레이첼을 보고 눈치를 챘다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눈치챈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화 도중 레이첼의 눈빛이 반짝이면 반짝일수록 이상함을 느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신류하를 말리지도,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고 얌전히 입만 다물고 있는 걸 보자 확신했다.
“저는 스승님을 속이려 했던 것이 아니라.”
“아아. 알아. 그때 그 말을 하겠다는 것까지 의논한 건 아니었겠지.”
흥미롭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던 레이첼의 표정은 바로 앞에서 마주 보고 있던 자신이 아니라면 보기 힘든 것이었다.
“자, 이제 대충 나도 알았으니까. 자세히 좀 말해 줄래? 무슨 얘길 한 거고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대단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저 스승님과 제가 따로 움직여야 하기에 일의 과중함이 치우쳐져 폐기됐던 계획을 해 보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계획은 머리가 여러 개인 만큼 수없이 많이 튀어나왔다 사라졌다. 그중 마지막을 남은 게 어느 정도 다 같이 움직이면서 차근차근 파괴하자는 것이었고 남은 하나는 속전속결로 신류하와 레이첼이 대표로 본진을 지키고 시현과 태운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전자는 일이 길어지는 만큼 중간에 변수가 생길 일이 많다는 게 문제였고 두 번째는 시현과 태운이 대놓고 너희 고생하라는 게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그건 유준과 규민의 강경한 반대로 결국 최종 탈락했고,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 스승님의 능력이 정확히 어디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얼추 윤곽이 나왔고 그렇다면 일을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말을 꺼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이첼의 표정은 가장 그럴 거 같지 않았던 태운이가 나서서 자신과 본인이 고생하겠다고 하니 흥미로워서 그랬던 것이었나.
시현은 턱을 긁적이며 계획을 하나하나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운의 계획이 더욱 타당하다는 의견에 도달했다.
저들은 아직 태운의 힘을 모른다. 자신도 그 끝을 파악하기 힘든데 저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의 말도 안 되는 무력은 정말 계획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태운이가 신의 광산에 들어가서 잡다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시키면 된다. 전투 말이다.
S급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을 기반 삼아 세웠던 계획은 이 과정에서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릴 걸 전제로 한 것이었다. 신의 광산에서 응집석을 터트리고 그것이 주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피해 탈출하고.
하지만 그것이 바뀌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태운이 먼저 고생길을 선택한 것에 조금 의아했지만 그래도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보여 조금은 기특했다.
“그래, 그게 낫겠네. 내가 찬성했다고 하면 크게 반대하진 않을 거야.”
“…예.”
시현은 고개를 태운의 머리를 쓱 쓰다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홀가분하게 땅을 박차고는 다시 일행들이 있을 막사로 움직였다. 태운은 그런 시현의 등을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고는 조금이라도 멀어지지 않도록 빠르게 뒤따라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