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바직.
눈을 뜨기도 전에 무언가 조금씩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왔다.
시현은 미간을 잠시 꿈틀거린 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거칠게 비비며 천천히 앞을 바라봤다. 흐리게 잡혔던 모습이 점점 형태를 갖춰 가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굴…?
온통 회색빛으로만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이리저리 불규칙적으로 깎인 돌들이 이 공간을 조성하고 있었다. 순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제가 왜 여기 있는 건지 뭘 하고 있던 건지.
그러나 정수리 위로 아주 작은 물방울 이 톡 떨어지자 마치 기억이 되살아나듯 방금까지 있던 일들이 되새겨지기 시작했다.
“아.”
량차오샤의 행방이 예상됐기에 그를 쫓던 중 신의 광산부터 박살 내려고 움직였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현상을 겪었고 어찌어찌 고난이 있었지만 빠져나왔었지.
생각이 정리되자 지금 제가 자리한 이곳도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절벽에 박혀 있던 신의 광산 입구 앞, 통로처럼 생긴 곳이었다. 걸으면 5분여밖에 안 될 정도로 짧은 곳이었지만 이상하게 빛이 차단되어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깨진 유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든 밝은 외부의 빛이 이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들어가기 전과 변화가 느껴지자 시현의 고개가 저절로 돌아가 신의 광산 입구가 있었을 곳으로 움직였다.
반쯤 뭉개진 듯한 문, 그리고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시꺼멓기만 한 공간. 하지만 그 공간들도 조금씩 줄어들고 조각 나 원래라면 그 자리에 있었을 원래의 돌과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현상은 지금도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한마디로 사람이 지나가기는 힘들 거 같은 모습이란 말이었다. 솔직히 제가 무엇을 해서 이렇게 된 건지는 몰랐다. 하지만 제 예상과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응집석이 저절로 힘을 표출하면서 제힘을 끼워 넣었을 테고 그렇게 영향이 가면서 균형이 깨진 거겠지.
“그래, 외부의 사람 하나도 제대로 살지 못할 정돈데 이렇게 큰 영향을 줄 신의 광산이 이제까지 버티고 있는 게 용한 거지.”
시현은 그래도 한숨 돌렸다는 듯 깊은숨을 후 내쉬고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이제 일행들에게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 쿠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구 일부분이 부서져 내리더니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감각이 급격하게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순간 뚝 끊기고 사라졌다. 마치 꿈이라도 꾼 듯 얼떨떨했지만 박살 나 속을 내보이고 있는 벽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시현은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광경에 침을 꿀꺽 삼켰다.
‘시발… 이거 나 제대로 돌아온 거 맞지?’
풀어 헤쳐진 머리칼이 피에 반쯤 젖어 푹 늘어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머리카락만큼 옷도 이미 군데군데 피에 물들어 원래의 색을 반쯤 잃은 채였다.
그렇게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앞에 나타난 인물을 살피는 동안 자박 하고 발자국이 한 발 떨어져 나와 내딛어졌다.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갑자기 깬 변화에 시현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아주 조금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스승님?”
아 좆 됐다.
제가 신의 광산 안에 꽤 오랜 시간 들어갔다 온 것이었던 걸까. 그래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돌벽을 부수고 들어온 남자는 제가 알던 그 태운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정말 검지손가락의 두세 마디 정도밖에는 안 되지만 조금 뒷걸음질 치고 만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을 못 알아챌 태운이 아니지 않나.
아니, 근데 방금까지 그런 일을 겪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라는 변명을 입 밖을 내뱉고 싶었지만 앞뒤 사정을 알 리가 없는 태운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한 것이다.
“태운아! 아니, 그게 아니라!”
시현은 멍하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급급하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이미 몸을 적시고 있던 피가 묻든 말든 커다란 몸을 둘러 안고 초조하게 입을 열었다.
“태운아, 이게 진짜 사정이 있거든? 말하자면 긴데, 아니, 그것보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놀라서, 놀라서 그랬어.”
무언가 찔리는 게 있는 사람이 말이 길어진다고 하던가. 시현은 그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줄줄이 내뱉는 말에 급급해 보이는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거짓말….”
“…진짜야.”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꽤나 켕기는 게 많았다. 말도 없이 냅다 일부터 처리하러 신의 광산에 들어간 것도 그렇고 그 이전에 계획부터 제 맘대로 바꿔 버린 데다가 얼굴을 보고 뒷걸음질까지 쳤으니 입이 여러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재회의 인사는 그 정도로 하고 일단 말부터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마나가 잠시 응축하더니 팍 터지며 또 다른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감싸고 있던 태운에게 은근슬쩍 떨어져 나와 말을 건넨 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류하는 그새 연태운처럼 피범벅이 된 시현을 보며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그새 시현이 아닌 저 안쪽에 자리한 망가진 문의 흔적을 향해 있었다.
“일단, 상태를 보니 얼추 성공하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아요. 일단 제가 느끼기엔 그래요.”
저기서 빠져나올 때 느꼈던 감각은 참 이상한 것이었다. 공간이 직접적으로 쪼그라드는 건 아니었지만 점점 압박감이 강해졌고 결국에 내팽개쳐지는 감각이 훅 들더니 이곳에 그대로 서 있게 됐다.
마치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이물질인 자신을 누군가가 급히 쫓아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상당히 좋지 않은 기분을 선사했다.
제가 10년간 무림에 있을 때는 이미 테라포밍으로 파헤쳐진 차원에서 그들의 의지를 따르며 시간을 보냈고 그들의 힘에 의해 이동했기에 이런 더러운 감각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맨몸으로 이런 거대한 거부감을 처음 느껴 본 것이었다. 찰나였기에 이 정도는 빙산의 일각이었겠지만 그 감각이 너무나 잊히지 않았다.
태운이도 이런 걸 느꼈을까.
시현은 잠시 다른 생각이 들었지만 작게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 내고 말을 이었다.
“몇 가지 변수가 있었지만 제 생각이 맞았어요. 안 그래도 이거 때문에 이야기를 해야 하긴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밖은 이미 다 정리가 된 상태입니다. 시현 씨가 사라진 지 대략 6시간 정도 되었거든요.”
시현은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에 괴리가 있을 거란 건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10년간 외부에 있었는데 돌아왔을 땐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으니까.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 동안 태운이 고생을 했을 거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시현은 손을 들어 올려 옆에서 얌전히 따라오고 있는 태운의 등짝을 슬슬 쓸었다. 나름의 위로였다. 물론 태운이 그 몇 번의 터치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또 눈물을 흘릴 것 같아 금세 멈췄지만 말이다.
***
“그러니까 들어갔더니 신의 광산이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이었다는 건가요?”
“확실치는 않아요. 하지만 그런 거로 추정됩니다.”
간이로 만들어진 막사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사이비, 그러니까 지들 말대로는 태양여명회라고 부르는 것들이 남겨 놓은 곳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공간은 넓고 쾌적했지만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심상치가 않았다.
또 계획이 어긋났다.
박살 난 것 정돈 아니었지만 또 변수가 끼어든 것이었다. 그쯤 하자 레이첼은 시현에게 이것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예상한 겁니까?”
“예?”
“들었습니다. 갑자기 방법을 바꾸겠다고 하며 신의 광산 안으로 들어섰다는 거 말입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시현에게로 향했다. 레이첼과 신류하, 그리고 유준과 규민, 그리고 태운의 시선이 모두 모이자 얼굴이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무언의 압박을 받던 시현은 천천히 제가 세운 가설과 신의 광산에서 겪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가 영향을 줬던 그 거대한 마법진과, 여유로운 척하며 신의 광산을 통해 도망간 량차오샤, 그리고 뒤따라가자 제게 닥쳤던 이상 현상들까지.
시현의 말이 길게 이어졌다. 모두 다 예상을 뛰넘는 사건들뿐이었지만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다들 한 사람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분위기를 이렇게 만든 주범은 역시나 태운이었다.
누군가를 죽여 버리겠다는 살기가 뿜어져 나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든 수준은 아니었지만 내내 주인 찾은 강아지마냥 방긋대던 태운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던 것이다.
‘하아… 이래서 말하기 싫었는데.’
그리고 제가 목이 졸렸다는 대목에 도달하자 그의 표정은 피크를 찍었다. 아주 얼음 가루가 주변을 둥실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시현은 웬만하면 그 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함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공간을 찢어서 도와주고 제가 시간과 공간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게 된 경위 자체가 그 안에서 만난 태운으로 인해서였기 때문에 그걸 빼고 말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된 것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공간에 틈이 생기자 응집석이 그제야 반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제 눈에 보이는 건 없었고 온통 캄캄한 어둠이었지만 이게 그 연결에 영향을 줬던 게 분명해요.”
“…제가 봐도 그런 것 같,”
“목 다시 봐 봐요.”
레이첼은 시현의 말이 끝나자 천천히 동조의 뜻을 비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뚝 잘렸지만 말이다.
주변이 다시금 침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시현은 정말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