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태운은 분노와 원망을 가득 담은 얼굴을 한 채 눈가에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평소에 보던 눈물과는 궤를 달리하는 감정이 가득 담긴 물방울이었다. 그것은 감히 환상 따위라고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큰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시현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정신 차려, 이거 진짜 아니야.’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눈앞에 상처로 가득 차 살기를 줄줄 내뿜고 있는 태운을 지우고 제가 할 일만을 되새겨야만 했다.
그래, 빨리 응집석을 꺼내고 이 공간을 부수는 거다, 그러면 지금 이 모든 환상은 사라질 게 분명했다.
그때 한 장소에만 우두커니 서 있던 태운이 지붕 위에서 경계 태세를 하고 있는 시현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 발자국을 떼어 냈다.
콰앙!
순식간에 사라진 인영이 마치 공간이라도 이동한 듯 곧바로 눈앞에 나타나 공격을 해 오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검기 다발이 우르르 쏟아졌다. 시현은 그 공격을 무엇이라 판단할 겨를도 없이 옆으로 몸을 날려야만 했다.
“크윽!”
그러나 반사적으로 움직인 몸에 첫 번째 공격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어지는 장에 복부를 맞고 몇 미터를 날아가 건물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 여파로 건물의 잔해가 머리 위로 툭툭 떨어졌다. 시현은 복부를 움켜쥐곤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돌덩이들을 밀어 내고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통도, 감각도 진짜….’
크게 어딘가 다친 건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가해졌다. 그러나 그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기도 전에 근처에서 거대한 내기가 느껴졌다. 쉬지 않고 저를 따라서 공격해 오는 태운일 게 분명했다.
시현은 입술을 콱 물고는 몸을 튕겨 올린 뒤 날아들어 오는 검강을 튕겨 내고 다시금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순식간에 원래 있던 거리에서 벗어나 마을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쿠르릉. 방금까지 시현이 처박혀 있던 건물이 마치 영화처럼 손쉽게도 무너져 내렸다. 사방이 분진으로 가득 차고 소음이 울려 퍼졌다. 시현은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모른 척하면 급히 주머니를 열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저 태운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 목숨을 위협하는 이 공격은 진짜였다. 자칫하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은 무조건 살아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 약속했으니까.
저 상처에 범벅된 태운의 얼굴과 이상하리만치 진짜 같은 이 상황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지만, 시현은 그 사실들을 애써 무시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하십니까? 이번에는 팔다리 힘줄을 모두 끊어 놔야 하겠습니다.”
악문 잇새로 흘러나온 말에는 진득한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시현의 손이 잠시나마 멈칫할 만큼 말이다.
이건 너무나 상처받은 태운의 감정과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이만큼 망가진 건 아니었지만 이 비슷한 느낌을 겪었던 적이 있었다. S급 게이트에서 저를 속인 환상을 찢고 나와 마주한 태운에게서였다.
심장이 ‘쿵’ 하고 굴러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문득 든 예감이 점점 짙어지며 머릿속을 메우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버렸어?”
“하. 본인이 하신 일도 잊으시다니. 어찌 이리 한결같으신지.”
씨발.
입 안 가득 욕설이 튀어 나가지 못하고 굴러다니다가 겨우 삼켜졌다. 사실 아직도 이 현상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하지만, 제 눈앞에 있는 저 애는 정말 진짜였다.
예전에 한번 그 애를 만나고 대략 7년 째쯤이었을까. 정말 이상한 퀘스트 하나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마치 모든 걸 끝내 줄 테니 태운의 미래를 위해 배신하란 내용이었다.
그러나 끝내 준다는 말이 자신을 제대로 원래 세계로 되돌려주겠단 확언도 아니었고 태운을 냅다 배신하기엔 이미 정이 들 대로 든 상태였기에 차라리 몇 년 더 고생하자 하고 퀘스트를 무시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복성 개고생을 미친 듯이 받아들여야 했지만 말이다.
‘왜 갑자기 그때 기억이….’
그때 갑자기 주머니가 작게 진동을 울려 댔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응집석이 담긴 주머니가 아니라 여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게 도와줬던 핸드폰이 말이다.
그 순간 태운의 주의가 그쪽으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시현은 그 틈을 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제가 딛고 있던 지붕이 박살 나는 걸 보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는 완전히 이 공간이 환상 따위가 아닌 별개의 세계라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른 점들이 더욱더 선명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태운은 약했다. 그러니까 절대적으로 약하단 것이 아니라 저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태운에 비해서 약하단 뜻이었다. 그 말은 아직 시현이 조금이나마 제지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단 말이었다.
량차오샤가 대체 어떤 좆같은 짓을 벌여 놨기에 이런 상황이 주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시현은 한 줄기 빛이라도 붙잡듯 핸드폰에 날아들어 온 문자를 급히 확인했다.
[&%w whㅈㅗ$&(t l간$% 공 ㄱ ᅟᅡᆫ @@!( 찢어 요, ,..220aㅁ ㅣ)ㅇ)]
온통 알아볼 수 없는 문자들의 나열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알아볼 수 있는 단어들을 조합해 내용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찢으라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살수에 몸을 구르고 뛰면서 태운을 견제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시현은 단 한 번도 먼저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현은 절대 태운을 먼저 공격하지 못할 테니까.
“도망가지만 말고 반격하란 말입니다!!”
“내가 널 어떻게 공격해! 이 멍청아!”
하지만 욱하는 건 욱하는 거였다. 시현은 그 와중에도 조금의 답답함을 담아 평소처럼 꽥 소리를 질러 대며 반박했다.
덜컥.
그 순간 저를 죽일 듯 달려들던 태운이 정지버튼이라도 눌린 듯 갑자기 자리에 멈추어 섰다.
“너 스승님이 아니군… 아니, 아니야, 이 기운은 스승님밖에 가질 수 없는데….”
그리고는 이미 다 말라 터진 입술을 다시 잘근잘근 씹으며 시현을 뚫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노려보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마치 혼란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시현은 그제야 생긴 여유에 급히 주머니에서 응집석을 꺼내 들었다.
‘어?’
그러나 응집석은 제가 가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무런 영향도 펼치지 못하고 덩그러니 제 손아귀에 쥐어져 있을 뿐이란 말이었다. 시현은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멍하니 응집석과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봐야 했다.
그때 눈앞에서 커다랗고 하얀 손이 불쑥 나타나 제 목을 노리고 뻗어 왔다. 방심을 한 결과였다.
“큭!”
시현은 본능적으로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응집석과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면서 내기를 몸에 둘렀다. 하지만 그런데도 역부족이었는지 제 목을 조금씩 압박해 오는 손아귀에 급히 남은 한 손으로 하얀 손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잡았다.”
“태, 태운아… 컥.”
“죽이진 않을 겁니다. 암요. 제가 어떻게 스승님을 죽이겠습니까. 그러나 팔다리는 내놓으셔야지요. 아무 데도 못 가게 말입니다. 이런 괴물을 살려 놓으셨으니 당신이 끝까지 책임을 지셔야지요.”
온몸을 타고 검붉은 내기가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용암처럼 보이는 것은 뜨겁기는커녕 서늘하게 몸을 감아 오기 시작했다.
시현은 막혀 오는 호흡과 붕 떠 있는 두 발에 잠시 몸을 비틀다가 포기했단 듯 몸을 축 늘어트렸다.
“나, 는… 그래도 너 안 싫어해…. 버려서, 미안해…크흑.”
제 기억 속에 붉은 눈은 늘 윤기 있게 빛나고 생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생기를 쭉 빨리고 텅 비어 버린 돌멩이 같은 게 아니었단 말이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태운은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욱 심각했다.
그 모습이 버려지고 버려져 한참을 길을 헤매다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이라 마음이 미어졌다.
“미안하다고 했습니까…? 그러면 대체 왜,”
“나…. 밖에서 태운이가, 기다려… 꼭 가야, 해…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크윽, 약속했어.”
“….”
절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제 목을 조르고 있던 힘이 아주 미세하게 풀려 가기 시작했다.
“…저는요?”
그리고 그런 시현을 마주하고 있던 태운의 눈에서도 눈물이 다시금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요? 스승님, 가지 마세요.”
아, 이 애는 내가 자신이 알던 시현이 아니란 걸 깨달았구나. 그럼에도 매달리는 거구나.
시현은 메어 오는 목을 애써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른 세상에 있어, 그러니까 찾아. 나는 어쩌면 그때부터 너를 좋아했어. 나니까 알아. 분명 후회하고 있을 거야. 그러니까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네가 먼저 찾아 줘.”
이제는 목을 압박하던 힘이 완전히 거두어지더니 허옇게 질린 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고 있었다.
“태운아, 사람은 모두 처음이라 실수라는 걸 해. 그러니까 네가 조금만 봐줘. 착하지?”
시현은 내려앉는 손과 반대로 손을 들어 올려 산발인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저보다 위에 있어 조금은 힘들었지만 늘 해 왔던 일인지 조금의 어색함도 없었다.
비록 거칠어지고 굳어 버린 핏물에 엉망이었지만 시현은 쓰다듬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태운 또한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본디 착한 아이다, 지금은 잠시 힘들어서 이랬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사정을 설명하니까 잘 알아듣지 않나. 시현은 여전히 착한 태운을 보며 조금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지났을까 얌전히 쓰다듬을 받던 태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가세요.”
“뭐?”
시현은 순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지만 별다른 대답 없이 몸을 돌리는 태운에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