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응집석입니다.”
긴말은 필요 없었다. 시현은 거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작은 주머니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콱하고 주먹을 쥐었다.
돌멩이 또는 보석 같은 모양을 한 응집석은 그렇게 손아귀 안에서 부딪히며 작게 소리를 냈다. 고작 이 작은 돌 하나로 여태까지의 모든 것들을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믿어지든 않든 다른 길은 없었다. 이제 하나밖에 없는 길을 달려가는 수밖에.
“이제 이것만 하면, 그러면 이 모든 게 끝이 난다는 거죠.”
“…거의.”
이 와중에도 완전히 이 상황이 끝날 거라고 해 주지 않는 신류하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사실 시현 또한 그런 속 편한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기에 금세 납득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일 수 있었다.
“주머니를 둘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태운 씨께서 가지고 돌아가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저한테 다 주세요.”
“예?”
“방금 신의 광산을 박살 낼 다른 방법을 찾았거든요. 그건 저만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게 더 빠를 겁니다.”
시현은 처음에 세웠던 계획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조금 당황한 듯한 신류하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 그대로 처음에 세웠던 가정과 현 상황이 많이 비틀려져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당연히 그때 맞춰 세웠던 계획도 변경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의 광산들이 죄다 옮겨져 오고 나서 무작정 무언가 일어날 것이라 여겼지만 생각보다 꽤나 복잡한 처리를 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제게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효과적인 힘이 있었다.
새삼 그때 자신에게만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던 게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 찢어진 공간의 틈에 닿은 건 우연이었지만 그 틈새에서 죽지 않고 이상한 현상과 함께 다시 튕겨 나온 건 분명 자신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자꾸만 정해진 대로 한곳으로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시현은 쓸쓸하게 웃으며 천천히 건네지는 작은 주머니를 하나 더 받아서 들었다. 이것은 태운의 몫이었다.
시현은 태운과 헤어지고 그가 향했을 목적지를 떠올렸다.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곳과는 제일 정반대에 있던 장소였다. 량차오샤가 대체 어떻게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온 건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만약 뒤늦게 그걸 눈치채고 몸을 돌렸다면 이곳까지 오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란 뜻이었다.
얼굴은 역시 못 보고 가겠네.
“이제 가야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고작 이런 응원의 말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군요.”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그때쯤 저 멀리에서부터 커다란 기운들이 미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 중에는 이미 많이 익숙해진 친근한 기운들도 여럿 포진해 있었다.
시현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곤 아직도 분지 안을 메우며 이곳을 향해 달려들려고 발버둥 치는 몬스터들의 수를 가늠했다.
이제 소환도 거의 멎어 가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과 신류하의 공격으로 몬스터들의 대열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고 어느 정도는 이미 초토화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인원이 적더라도 이렇게 패닉에 빠져 망가진 대열로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들이라면 이길 수 있을 거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레이첼과 신류하, 그리고 그들이 믿는 사람들과 그동안 꽤나 강해진 것처럼 보였던 유준, 생존에는 가히 초절정에 버금가는 규민까지. 미안했지만 시현은 이제 동료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을 믿어 보려 하고 있었다.
동료라. 꽤 어색한 단어였다.
시현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빨리 해결하고 나오겠습니다, 그러니… 태운이를 부탁해요. 분명 여기로 올 겁니다. 그러니 제 말을 전해 주세요. 이번엔 절대 안 두고 갈 테니 네 할 일을 하라고요.”
끝까지, 어떻게든 살아남아 돌아올 테니 너도 그리하란 말이었다. 분명 제 말을 태운은 알아들을 거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쉬겠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현은 그런 태운을 잠시 떠올렸다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지면을 향해 몸을 던졌다.
목적지는 이 절벽 아래에 있는 저 문이었다.
***
순식간에 시야가 가려지고 주변이 온통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보이는 것은 고작 한 발짝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이었다. 물론 그 안에도 별다른 건 없었지만 말이다. 자신은 그때 신의 광산에 들어갈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그대로 문을 통과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벌써부터 그때와 다른 현상으로 보이는 공간에 작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는 뜻.
시현은 제 손에 들린 주머니를 다시금 확인했다.
[&*%^$로 만들어진 주머니(-)-측정할 수 없음]
이제 이것을 꺼내 들면 무엇이든 일어날 것이다. 시현은 손을 움직여 주머니의 입구를 벌렸다. 아니, 벌리려고 했다.
순간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드는 살기가 전방에서 뿜어져 나왔다. 시현은 순식간에 주머니를 품 안으로 숨기고 크게 뒤로 물러섰다.
화아아악.
그와 동시에 세상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게임의 배경이 급작스럽게 바뀌듯 온통 까맣기만 하던 세상이 형태를 드러내고 색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나무와 흙 돌, 그리고 하늘이 나타났다. 그다음은 건물이었다. 6층 정도는 돼 보이는 듯한 건물이 우르르 나타나 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어느 한 마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마치 수채화 물감이 번져 가는 듯한 현상에 바쁘게 시선을 옮기던 와중 시현은 점점 눈에 익어 가는 풍경을 마주하곤 욕지거리를 짓씹듯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이었다. 조금은 눈에 익은 장소기도 했다.
“진짜… 시발 참 좆같은 취향이야.”
또 제 기억을 헤집는 건가.
자주 들른 것은 아니었지만 이 근처 객잔에서 팔던 만두가 맛있어서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면 또 먹으러 오자고 했던 추억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 공간은 지금 실수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제 능력이 모자랐던 건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건지 모르지만 나름 제정신이 지배당해 그 상황들을 진짜처럼 받아들였고 자칫하면 당할 뻔했던 건 맞았다. 그렇지만 이 공간은 그때에 미치지조차 못하는 수준이었다.
이미 여기가 현실이 아니란 걸 아는데 똑같이 기억을 헤집어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현은 한번 겪어 봤다고 익숙한 패턴을 보이려는 공간에 비웃음을 날리고 다시금 품 안에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때 아무것도 없던 거리에 사람의 형태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이들이 두 개 혹은 서너 개로 나뉘어 바닥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그때 시현의 흰 운동화 끝에 손끝이 닿았다. 이미 온전한 형태를 잃은 채로 쌓여 있던 몸뚱이들 사이에 어찌어찌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던 사람인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삶을 향한 발버둥도 금방 사그라들었다.
“사, 살려 주… 커억”
검붉은 빛의 검강이었다. 검강은 목숨을 구걸하는 자의 등 뒤로 잔인하게 박혀 들어갔다. 단순히 박혀 들기만 한 것은 아닐 테다. 저건 분명 체내에서 내기를 폭발시켜 온 내장을 뭉개 놓는 잔인한 기술이었으니까. 순간 시현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왜 여기…
그러나 순식간에 펼쳐지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도 하지 못한 채 시현은 급히 바닥을 박차고 올라 옆에 보이는 전각 위로 뛰어올라야 했다.
퍼억.
시현이 조금이라도 망설였다면 최소한 다리 한 짝쯤은 잘렸을 것 같은 공격이 비어 있는 공간 안으로 들이닥쳤다.
“태운아….”
기어들어 가듯 작게 새어 나온 목소리는 볼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저 멀리 홀로 우뚝하니 서 있는 인영을 멍하니 바라봤다.
늘 가지런히 빗겨 주고 묶어 주었던 머리는 이리저리 풀려 서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붉은 눈동자는 빛을 잃은 채 그저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얀 얼굴 위론 튀어 버린 핏방울이 이미 굳어 검붉은 딱지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고 열심히 립밤을 발라 주던 입술은 다 메말라 터져 있었다.
“스승님이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나다니 믿을 수가 없지 않은가. 하하.”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행색이다. 그런 태운을 바라보던 시현은 마찬가지로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투와 차가운 목소리에 움찔하고 몸을 떨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수많은 전투와 추격전에도 불구하고 태운이 저렇게까지 처참한 행색을 한 적은 없었다. 자신이 그걸 두고 보지 않았고 태운도 깔끔한 행색을 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저게 뭐야…?
시현은 지금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때 S급 게이트에서도 결국에 제 기억에 있던 모습을 조합해서 만들어 낸 것들이었다. 그때야 몰랐지만, 이후에는 왜 알지 못했나 싶게 어색한 부분도 많고 허접했단 말이다. 그러니 기억에 제한을 걸었던 거였겠지.
하나 지금은 달랐다. 이 모든 건 제 기억에 조금도 없었다. 저런 표정, 저런 말투, 저런 모습 아무것도.
분명 이건 환상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 자연지기도, 내기도 이 모든 게 다 느껴지는 거지?
시현은 아주아주 선명하게 느껴지는 그때의 자연지기들에 순간 숨을 멈췄다. 솜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저릿저릿한 살기, 그리고 선명한 피 내음, 그 와중에도 주변을 무심하게 머물다 사라지는 살랑이는 바람들까지.
“이게 대체….”
“스승님.”
그때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시금 튀어나왔다. 자세히 들어야 할 정도로 작았지만 시현에겐 아프도록 선명하게 틀어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