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그 확실한 방법이 대체 뭔데.
입 안 가득 몇 개의 단어가 이리저리 맴돌며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내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하나 이 말을 결국에는 꺼내선 안 된다는 사실도 시현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려 달라고 빌 것도 아니고 반문해 봤자 이쪽의 속내만 내비치는 병신같은 짓일 뿐이었다. 그리고 알려 달라고 해서 돌아올 답이 진실이란걸 확신할 수도 없지 않나. 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절대 다 믿을 수 없을 거다.
시현은 자연스럽게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한번 꾹 쥐며 속을 다스리곤 천천히 반문했다.
“안 궁금해. 어차피 이것들이 다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풀어질 테니. 넌 그냥 죽어.”
“…푸흡. 아, 미안하군요, 뭐 레이첼이 그렇게 말했나?”
순간 시현이 손을 다시금 꾹 움켜쥐었다. 자연스럽게 나온 반말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뭐 맞는 말이야. 뭐가 됐든 결론이야 날 테니. 그런데 그거 아나? 외부의 존재들은 태초부터 그들이 속한 세상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 우리가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듯 말이야. 그리고 저 위의 존재들처럼 웬만한 초월자가 아닌 이상 그것들이 없으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시현은 입을 꾹 다물고 답변을 하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처참한 시산혈해를 앞에 두고도 빙글빙글 처웃어 대는 꼴을 보고 있자면 자꾸만 분노가 솟아 이런 말장난 따위는 당장이라도 제쳐두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나 마음속 깊이, 잘 깨닫기도 힘든 작은 감정이 피어오르고 저자가 하는 말의 저의를 깨달았기에 속으로 마구 욕설을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저자가 저 독을 머금은 입으로 혀를 놀려 이렇게까지 사태를 키웠다는 걸 알면서도 저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는 저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진짜로 이 모든 일이 끝나고 모든 사람이 평화로워졌을 때, 태운만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조금도 맞지 않은 이 세상에 버티지 못한다면?
그래, 살아남긴 남을 거다. 그리고 제 곁에 남아 있겠지. 하나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가야 한다면 그 또한 잘못된 것이 아닌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에 영향을 받듯 시현의 침묵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아직 기회는 열려 있지. 그러니 잘 생각해 보라고.”
시현은 이어지는 량의 말에 결국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그러고는 밀려오는 초조함을 떨치겠다는 듯 재빨리 검을 뽑아 둘 수밖에 없었다.
스릉거리는 금속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짧게 나는 듯하더니 금세 한 손에 단단히 움켜쥐어져 있었다. 량은 그 와중에도 잔뜩 휘어진 미소를 지우지 않고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점점 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현은 곧바로 량차오샤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와 자신 사이에 있는 피의 호수, 그곳에서 피어나던 노란 빛이 점점 강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운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신 혼자 두지 않겠다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게 서로에게 죽음과 고통뿐이라면, 그럼에도 제가 계속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라면.
시현은 지금의 제 선택들에 본질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모든 게 정말 그 애를 위해서 하는 게 맞나 하는 것들 말이다.
세상을 구하고 뭐하고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자신은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정의로운 히어로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이기적이고 이기적인 그냥 다른 이들과 똑같은 한 사람일 뿐이기에 지금 모든 상황이 가혹하고 어려웠다.
‘대체 내가 어떻게… 어느 사람이라도 좀 확실한 대답을.’
머릿속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시현은 늘 하듯 뽑아 든 우윳빛 검을 아래로 편안히 늘어트렸다가 숨을 훅 들이마시고 천천히 검을 다시 들어 올려 기수식을 펼쳤다. 습관과도 같은 그 행위는 경건해 보일 정도로 느릿하고 여유로웠다. 물론 그와 상반되게 눈빛은 뜨겁게 들끓고 있었지만 말이다.
얼굴을 가로질러 멈춰 선 검이 빛을 반사하며 번쩍였다. 눈빛과 어울려 거대한 위압감이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쿠웅, 쿠웅!
그와 동시에 이제는 연기처럼 보일 정도로 뭉게뭉게 피어난 노란 기운 사이로 조금씩 비명과 닮은 포효, 거대한 것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일단 량부터 잡는다.
그래, 혼자 고민해 봤자다. 혼자 상상하며 괴로워할 바엔 저자를 쥐어 잡고 정보를 털어 내면 된다. 제게는 정보를 털어 내게 할 만한 기술이 수십 개나 있었으니까. 뭐 그것도 불가능하다면 머리를 열어서라도 정보를 뽑아내면 된다.
시현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이제는 점점 걷혀가는 노란빛을 바라보다가 작게 땅을 탁 치고 분지 안으로 몸을 띄웠다.
전투의 시작이었다.
***
온몸에 검붉은 내기를 두른 시현이 폭탄처럼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
땅거죽이 이리저리 뒤집히고 당연히 그 위에 발을 딛고 있던 몬스터들이 뿜어져 나온 내기에 짓눌려 와르르 터져 나갔다.
시현은 일일이 몬스터들의 정보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또 죽이고 죽이며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나무라곤 하나 없이 밀어놓은 평야에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하나 소름 돋게도 저들끼리는 공격성을 내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수백 수천의 사람을 한 줌 핏물로 만들어 소환해 낸 그 수법에 무언가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시현은 그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길게 검강이 뽑혀 부르르 떨고 있는 검을 앞을 향해 내리찍었다.
마치 허공이 갈라지는 형상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허공을 채우고 있던 기류가 순식간에 두 갈래로 나뉘면 그 아래에 존재하던 몬스터들이 단번에 조각이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방으로 푸르고 붉고 투명한 핏물이 높이 튀어 올랐다. 시현의 옷도 멀쩡하게 남아 있을 순 없었다.
사방이 온통 포효와 고통에 찬 신음으로 가득했다.
그때 머리 위로 거대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거대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친 속도를 겸비하고 말이다.
쿠아아아앙!
이미 죽어 가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시현이 몸을 내뺀 그 자리에 남아 있던 몬스터들이 거대한 몽둥이에 짓눌려 곤죽이 되어 있었다. 시현은 그것을 무감하게 바라보다가 제가 가야 할 길 바로 앞을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몸뚱이를 올려다봤다.
“이거 진짜 씨발. 정체가 감도 안 오네.”
팔다리가 있는 걸 보니 전체적인 건 인간형 같았는데 형태 말고는 전혀 인간이란 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뒤섞여 있는 존재였다. 하다못해 어느 부분은 액체처럼 아슬아슬하게 뭉쳐서 출렁거리는데 그 안에 장기 같은 것들이 섞여 있어 정말로 구역질 나게 역겹기도 했다.
시현은 흘깃 신의 광산 입구가 있는 곳을 보며 한숨을 삼키고 다시금 하늘 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눈으로 더욱더 내기를 집중하며 어디가 뭔지 알 수도 없는 존재를 아주 빠르게 탐색했다.
[누더기(-) - 여러 가지 존재를 억지로 엮어 만든 최악의 생명체]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스쳐 지나갔다.
‘이름도 더럽게 무성의하군.’
시현의 검이 공기를 가르며 거침없이 휘둘러졌다. 그리고 그 끝에 있던 누더기는 음성마저도 기괴한 소음을 내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하나 시현은 조금 놀랐다는 듯 눈을 치떴다가 미간을 조금 좁힐 수밖에 없었다.
이 검로가 필사의 의지를 담고 휘둘러진 건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대충 보고 휘두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작 저 징그러운 몸뚱이 일부를 떼어 내지도 못하다니.
생각보다 더 강한 방어력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나면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저 거지 같은 게 하나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지금이야 고작 자신 하나를 위해 앞뒤 없이 몰려들기에 공격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서 다 같이 덤비지 못할 뿐이지 저것들을 계속 연달아 상대해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절로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여기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을 순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게이트들과 함께 이동해 온 연구원들을 죄다 처리하고 틈틈이 레이첼 쪽과 정보를 공유하며 해결 방책을 짜내곤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일이 비틀어진 걸 깨달았을 텐데도 여유로운 얼굴을 하던 량이 무척이나 수상했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제 일에 관해 물어보기도 해야 했지만, 자꾸만 예상치도 못한 짓을 일삼던 놈이기에 시야에 없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안해졌다.
키야야악!!
시현은 쉬지 않고 옆에서 밀려 들어오는 곤충형 인간의 머리로 강기를 날렸다. 강기 조각은 정확한 궤도로 날아가 이마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갔다. 그러고도 힘을 잃지 않고 그 뒤로 줄지어 있던 몇 개의 머리를 더 뚫고 사라졌다.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는 아주 깔끔하고 완벽한 움직임이었다. 시현은 마치 어린아이가 칭얼거리듯 무식한 몽둥이를 들고 쿵쿵대며 괴성을 질러 대는 누더기를 보며 다시금 하늘을 향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간간이 있는 비행형 몬스터를 밟고 다시 튀어 올랐다.
누더기보다 한참을 더 위로 올라간 시현은 검, 그리고 제 몸까지 뒤덮이도록 내기를 발산하며 작게 읊조렸다.
“이만 꺼지라고 이 징그러운 놈아.”
지금이야 별문제가 아니라곤 해도 이렇게 힘을 써 대면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을 이 몬스터 장벽을 빨리 뛰어넘어 그 개새끼를 잡는 게 우선이었다.
시현은 점점 내기를 더욱더 강하게 뽑아내며 아래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