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어두운 것 같으면서도 시야에는 지장을 받지 않는 공간이었다. 량차오샤는 그 공간에 유일한 통로인 끝이 잘 보이지도 않는 계단을 거침없이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남은 걸 내 몸에 이식하는 동안 너는 쓰레기들을 다 치우도록 해.”
“예.”
얼굴을 딱딱하게 굳혀 조금은 화까지 나 보이는 얼굴을 한 량차오샤는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며 천천히 양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동안 많은 방해가 있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다. 그만큼 여러 가지 방법들을 준비해 왔고. 사실 이것만큼은 꽤나 고통스러워 사용하기 싫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계속 미뤄 둘 순 없었다.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곧 문도 없이 성인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덩그러니 구멍이 뚫려 있는 벽이 나타났다. 보통은 성인 남성보다 조금 더 컸던 량차오샤는 몸을 조금 구겨 그 구멍을 통과했다.
그러자 밖에선 보이지 않았던 노란빛이 뿜어져 나와 눈을 어지럽혔다. 량차오샤는 익숙하다는 듯 재빨리 손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가 빛이 잦아들자 다시 손을 내리고 눈을 떴다.
무척이나 넓은 동공이었다. 마치 레이저로 도려낸 듯 이음새도 없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벽이 무섭도록 칼같이 맞춰져 네모난 공간을 구성하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이상하다고 여길 만한 비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광경에도 불구하고 가운데 있는 구조물은 그런 공간을 인식하기도 전에 모두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알 수 없는 액체로 가득 찬 챔버 안, 그 안에는 사람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하나 몸이 삼 분의 일 정도 녹아 흐무러져 챔버 안의 액체와 섞여 들고 있었고 그러지 않은 남은 몸 위에는 마치 곰팡이처럼 노란색 알갱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달칵.
량차오샤는 그런 역겨운 광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몇 가지 버튼을 누르며 작은 화면 안을 들여다봤다.
[준비 중-10%]
[준비 중-14%]
잡다한 안내 없이 준비 중이라는 글자만 떠 있을 뿐인 화면에는 무엇을 위한 건지 모를 로딩 창이 천천히 채워지고 있었다.
“후우….”
제가 아무리 여태까지 별짓을 다 해 왔다지만 이번만은 긴장이 돼 손아귀 안으로 식은땀이 들어찼다.
자칫하면 자신도 이 배양기 안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걸 제때 풀어내기만 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남은 기일은 일주일도 되지 않는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끝날 테니 오래 품고 있었다는 이유로 이 기운이 폭주하진 않을 것이다.
로딩 창이 대량 절반을 채워 가자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곳을 이루는 공간의 한구석이 풀썩하고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 안에서 하얀 뼈가 조금 쏟아져 내렸다.
“공간 해제.”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레오가 그 근처로 가 손을 내밀었다. 동시에 하얀빛이 쏟아져 나오고 그 하얀빛의 영향을 받은 구석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까와 똑같이 변해 있었다. 그러나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한눈에 알아차릴 정도로 사라진 부분만큼 공간이 좁아져 있었다.
레오의 능력은 공간과 공간을 링크시키는 것. 하나 지금 량차오샤가 하려는 일을 하고 나면 제힘을 넘어서는 파장으로 링크가 풀어질 거고 원래의 모습이 자꾸만 나타날 것이다. 제 역할은 그렇게 되기 전에 링크가 파괴되는 걸 막는 것이었다.
레오는 벌써 꽤 흔들림을 보이는 공간에 한숨을 작게 쉬고 다시 손을 올렸다. 어차피 자신은 은혜를 받은 만큼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될 뿐이었으니 말이다.
슈우우우
“끄으으으….”
곧 넓디넓은 공간이 옅은 수증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작게 앓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레오는 그곳을, 량차오샤가 있는 중앙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라지만 그 역겨운 모습을 또 보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
채앵!
동공 없이 온통 흰자위로만 된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검이 휘둘러졌다. 거의 사람만 한 크기인데도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시현은 가볍게 그 검을 막고 쳐올리며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행하고 상대의 검이 튕겨 올라가자 망설임 없이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스걱. 단단해 보이는 갑주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걸림 없이 잘리고 허리가 단번에 두 동강이 되었다. 그러나 튀어나오는 피는 없었다. 아니 피가 아니라 검은색의 연기 같은 것이 울컥 새어 나와 하늘로 치솟았다.
“후우….”
시현으로선 처음 보는 인간형 몬스터였다. 물론 인간형이라는 말을 붙여 주기엔 겉 형태 말고는 너무나 기괴한 특징투성이었지만 어쨌든 성안에 비치는 이름에 인간형이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인비듀어렉스(인간형)- 반물질로 이루어진 신체.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와 충돌에 취약하다. 연쇄 폭발 위험 있음.]
시현은 제 눈에 떠올라 있는 안내창을 힐끗 바라보고는 검 위에 씌워져 있는 검강을 더욱더 날카롭게 다듬었다. 충격에 취약하고 폭발할 수 있다는 말은 한마디로 타격하면 터진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니 저것들이 다른 짓을 못 하도록 단번에 썰어 목숨을 끊는 게 올바른 해결 방법이 될 것이다.
지금 눈앞에만 거의 백여 개의 개체가 바글대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태운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물론 저 알아서 잘하겠지만 시현은 그런 태운에게 이 몬스터의 특징을 전음으로 날렸다. 그러자 태운의 시선이 여유롭게 돌아와 시현에게 꽂혔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따로 말을 듣지 않아도 저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또 뭐 역시 스승님이네. 대단하네 그런 거겠지.’
괜히 목덜미가 화끈거리고 민망해졌다. 당장 눈앞에 전투를 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빠지고 있었다.
콰앙!
그러나 그 꼴이 아니꼽다는 듯 몬스터들을 한 치의 자비도 없이 검을 날리고 마나을 쏘아 보냈다.
시현은 고개를 홱 돌리고 검을 튕겨 냈다. 하지만 정신 놓고 있던 대가인지 머리끝이 아주 조금 그슬려 꼬부라들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급 열이 받기 시작했다. 저들 관점에서야 억울할 수도 있었지만 알 바인가. 시현은 내공을 확 풀어내 작은 강기 조각을 암기처럼 앞으로 쏘아 냈다. 물론 단순히 암기처럼 박히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속을 다 녹이고 갈아 버릴 테지만 말이다.
뭐 겉에 충격만 주지 않으면 된다지 않나.
시현은 제가 쏘아 낸 강기 조각들을 피해 앞으로 짓쳐들어오는 몬스터들에게 검을 휘둘러 두 동강을 내 주고 번쩍 튀어 올라서 다시 강기 조각을 흩뿌렸다.
빛에 반사되는 강기들이 마치 꽃잎 같아 보였다. 그러나 허공을 가로지르던 그 이파리들이 속도가 붙고 몬스터들한테 틀어박히자 그 아래는 마치 지옥도마냥 아수라장이 되어 갔다.
피는 나오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피어올라 오는 검은 연기에 주변이 온통 캄캄해지고 있었다. 시현은 그마저도 손을 휘둘러 날려 버리고 몇 번을 번쩍번쩍 튀어 올랐다. 그때마다 학살이 반복됐고 그것이 세 번 정도 이루어졌을 땐 지면에 발을 대고 있는 몬스터들이 없었다.
전멸이었다.
“이번엔 좀 빡센데.”
누가 들어도 안 그래 보이는 말투였지만 시현은 나름 심각한 얼굴로 목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물론 진짜로 힘에 부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찾아가는 신의 광산의 위치가 이 알파 구역의 중앙 쪽에 가까웠고 그쪽으로 가면 갈수록 몬스터들의 수준도 높아져 가고 있었기에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앙으로 갈수록 몬스터들의 수준이 높아진다면 이렇게 하나하나 만나는 무리마다 처리하고 다니긴 불가능할 테다. 사실 처음엔 어차피 있는 몬스터들 다 처리해야 할 거 만날 때마다 조금씩 손보잔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 이상하게 몬스터가 너무 많았다.
이 알파 공간이 넓긴 넓었다. 그러나 그래 봤자 강원도를 아직 다 감싸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대규모 무리의 몬스터가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그래, 지금 없앤 무리가 마지막 무리였다면 가능해. 하지만 아직 원래 광산에 앞에 죽치고 있던 무리도 처리하지 못했잖아.’
생각할수록 점점 더 이상했다. 그리고 시현의 표정 또한 함께 더욱더 굳어 가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만약에 어디선가 자꾸 나오고 있는 거라면?’
순간 팔뚝을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그렇다면 지금 신의 광산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태운과 우리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예?”
“이상하지 않아? 아무리 이 공간이 넓다지만, 몬스터가 너무 많아.”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과 태운이 처리한 것들만 해도 수천이 넘어갈 거다. 처음 신의 광산을 보고 두 번째 신의 광산을 향하면서, 그리고 지금 세 번째 신의 광산으로 향하는 길까지 끊임없이 몬스터들을 썰어 대고 있었으니까.
약한 개체고 강한 개체고 이젠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계속 몬스터의 수급이 가능하다면 결국 아군은 지칠 거고 적군은 지치지 않은 공격수단을 가진 것일 테니까.
그렇다면 레이첼과 헌터들이 도와주러 온다고 해도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 웨이브에 강한 화력을 가진 헌터는 무조건 필요했고 아마도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이는 자신과 태운 레이첼 외에 두어 명 정도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제 자신은 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걸 알면서 두고 움직일 순 없었다.
‘하아….’
옛날 같았으면 내 사람이 뭐야 죽든 말든 일의 처리가 우선이었을 텐데.
시현은 아직도 지금의 제가 조금 낯설었다. 순간 어깨 위로 태운의 손이 닿았다.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어쩐지 복잡한 머리를 맑게 만들어 주는 눈빛이었다.
‘그래. 일단은 아까 옮겨 온 신의 광산의 조사와 사이비들의 처리부터. 그곳에는 또 다른 정보가 또 있을지도 모르지.’
예를 들면 몬스터들의 수급에 관한 것들 말이다. 시현은 결국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땅을 박차고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