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슈아아악-
거칠게 바람이 부는 와중 그 공기의 흐름을 가르고 무언가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신의 광산이 나타날 위치는 이쪽에서 동남쪽.’
시현은 다시 한번 머릿속에 잘 채워 놨던 기억을 끄집어 확인하고 남은 거리를 가늠했다. 대략 10분 정도. 이 정도 속도라면 금방 신의 광산이 이동해 오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스걱-
시현은 눈앞에 보이는 조류형 몬스터의 날개 한쪽을 재빨리 베어 내며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저 멀리 대략적인 목적지가 보였다. 시현은 그곳을 시선에 한번 담았다가 다시 몸을 돌려 낙하하는 동시에 날개 한쪽이 떨어져 추락하고 있는 몬스터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캬아아악!
몬스터는 단말마를 남긴 채 바닥으로 처박혔다. 하나 시현은 그것을 확인할 새도 없이 다시 허공을 밟고 뛰어올라 아직 수십 마리나 남은 몬스터들의 무리 속으로 몸을 던졌다.
전투는 단순했다. 딱히 대단한 기술을 쓸 필요도 없었기에 태운과 시현은 큰 딜레이 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수가 있었다. 가는 길목마다 점점 몬스터들의 운집이 빽빽해지고 있었지만 그 또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까 한 마리라도 남겨서 도망치게 두면 안 돼.’
그런데도 시현은 꽤 조심하는 중이었다. 서류상 기록으로는 이 알파 구역 안에 생각보다 더 많은 이들이 상주해 있었다. 신의 광산을 옮겨 오는 것을 위해 상주해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전투 인원들, 보조 인원들 등등 신원도 다양했다.
물론 그들이 저와 태운보다 강하다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할 인원이 많아진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다. 언제 어디서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건 자신과 태운이 수적으로 열세라는 것이다.
시현은 하얀 검신을 타고 흐르는 흥건한 핏물을 검을 허공에 한번 휘둘러 내는 거로 털어 냈다. 그리고 바닥을 뒹굴고 있는 수십 마리의 집채만 한 조류들을 뛰어넘어 태운과 합류했다.
“몸은 여전히 괜찮고?”
시현은 순식간에 제 앞에 있는 몬스터 십여 마리를 동강 내고 내기를 쏘아내 순식간에 남은 개체의 절반을 처리한 뒤 땅 위에 꼿꼿하게 서 있던 태운의 몸을 확인하며 물음을 던졌다.
아무리 자기가 괜찮다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
이 공간이 정확히 어떤 작용을 하는지 속속들이 알지도 못했고 지금이야 괜찮다지만 언제 또 이상 현상을 일으킬지 모르니 틈틈이 확인해야만 했다.
“어느 때보다도 좋습니다.”
태운은 그런 시현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능청스럽게 어깨를 휘휘 돌려 보였다. 시현은 작게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씨가 된 것일까. 갑자기 하늘 위로 빛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우르릉거리는 불길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얼핏 들으면 천둥과 번개라도 몰려오는 것 같은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점점 짙어지는 이 꺼림칙한 기운은 이것이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는 걸 알리고 있었다.
시현은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강렬한 빛이었다. 하지만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할 정돈 아니었다. 물론, 이미 내기를 조절하는 게 습관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시야의 범위가 말도 안 되게 넓어졌다지만 그것을 배제한다고 해도 눈이 부실 것 같진 않았다. 무척이나 신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신기함도 잠시 그 빛 구름을 뚫고 무언가 지면을 향해 쏘아져 내리자 그 꺼림칙하고 불길한 기운이 더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알파 구역을 만들고 있는 경계면이 일렁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얼마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가까이에서 말이다.
“…아무래도 신의 광산인 거 같지?”
자신과 태운이 이 안으로 먹혀들어 올 때, 이 경계는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공간을 넓히듯 팽창했었다. 비록 천둥 치는 소리와 빛무리를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 이유가 신의 광산의 이동으로 인해 그랬다는 걸 대강 알 수 있었다.
“예. 그런데 예상보다 시기가 빠르군요.”
그때 태운이 한 템포를 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랬다. 그것이 지금 자신과 태운이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이유였다.
그 연구원이 죽으며 무슨 신호가 간 걸까? 조금의 오차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반나절이 넘어갈 정도의 기간이 앞당겨진 것이다. 위치는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순서는 서류에 담긴 그대로일 테고 시간만 변동된 거라면 계획을 앞당겼다는 것.
시현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원래의 목적지였던 빛 구름 아래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산과 나무들로 아직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구역이었다.
계획은 신의 광산에서 옮겨 오는 것들과 응집석, 그리고 모든 걸 통솔하는 이들을 다 처리하는 것. 지금 당장 신의 광산을 파괴할 수도 없고 미친놈처럼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 처단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도 없는 상황. 량차오샤가 오기 전까지, 레이첼이 이곳을 열 수 있을 때까지 마냥 놀 수만은 없으니 최소한의 조처를 해 놓으려고 했건만 아주 미세하게 계획에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주 익숙한 기시감과 불길함이 그 미세한 틈을 파고들었다.
“스승님. 가실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 길바닥에 멍하니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사실 그 연구원들이 뭘 조절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들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는 거니까. 그들을 처리하면 당연히 저들의 계획도 지체될 것이다. 지금은 그것만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당장 움직여. 준비가 조금 미흡해도 상관없다. 일단 한곳에 모으는 게 우선이야.”
“예!”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방 안, 분명 누가 봐도 비싼 물건들로 도배된 곳이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위화감과 천박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량차오샤는 제게 보고를 한 뒤 급히 발을 놀려 사라지는 자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 제 손안에 들어 있는 네모난 모양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5개의 점은 멀쩡히 제 생존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존재가 점점 빛을 잃더니 종국에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 화면에는 아무리 눈을 깜빡여 봐도 4개의 점뿐이었다. 량차오샤는 분노에 찬 얼굴로 어금니를 아득 깨물었다.
“제기랄.”
최후의 제물 중 하나가 사라졌다. 신호기를 몸에 박아 뒀기 때문에 고장 낸다거나 분실한다든가 하는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한마디로 확실하게 죽었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아주 초반부터 애지중지해 온 것이었다. 돈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인정, 그리고 제 스킬 등 모든 걸 동원해서 알맞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건만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던 알파 구역에서 행방이 묘연해지자 갑작스럽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신의 광산을 한곳으로 모으는 건 아주, 무척이나 힘들고 지루한 일이었지만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물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그것이 이행되어야 그 대업도 이루어질 수 있었기에 당연히 달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이후엔 그동안 모아 온 생명력을 죄다 들이붓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다 희생시켜만 했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쉬웠다. 그렇기에 신의 광산 이동에 아주 정교한 계산과 노동이 필요했다. 자신은 폐허가 된 이곳을 손에 넣고 싶은 게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계산에 필수였던 한 개의 거대한 기둥이 빠져나가자 다음으로 향하는 길이 흐릿해졌다.
“지금 갈 순 없어.”
량차오샤의 시선이 잠시 제 한쪽 손을 보다가 콱 주먹을 쥐고는 한자리에서 발을 놀리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뭐 하나 제대로 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중요한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들이 많이 빠져 있었으니까 말이다.
“대체 뭐냐.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
물론 중간에 틀어지긴 했지만 어느 정도의 변수는 예상했던 부분이었고 계산은 완벽했다. 그리고 알파 구역마저 아주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기에 한시름 걱정을 내려 둔 것도 고작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설마 그 여자가?”
레이첼. 그 여자야말로 정말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저를 성가시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자신이 세운 재단을 공격하고 스킬로 포섭해 놓은 이들을 찾아내 축출시키고, 또한 세계 각지로 뻗어 놓은 유통망을 파괴하며 자금의 수급마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 정말 이가 갈리도록 지겹게 맞붙었던 이들이었다. 하나 그것도 알파 구역의 형성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기에 제쳐 두었건만.
설마 그 여자에게 마지막 한 방이 더 있었던 건가.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분노가 잘 갈무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손에 쥔 탐지기가 바직대며 비명을 지르자 멈췄다. 하나가 사라졌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방법은 자신의 큰 희생이 필요할 것이다.
량차오샤의 손이 제 복부 위를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그 순간 입 밖으로 절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씨발. 레오!”
“부르셨습니까.”
그때 아무도 없다고 느꼈던 공간에 한 사내가 홀로그램처럼 스르륵 나타나 량차오샤 뒤에 시립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지하로 간다.”
“…지하 말씀이십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뒤에 서 있던 사내는 의외라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고풍스럽게 생긴 열쇠였다. 열쇠는 구리로 만들어진 듯 갈색빛을 띠고 있었는데 너무나 평범해 바닥에 떨어져 있어도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그런 형태였다. 하지만 그 열쇠에 마력이 주입되자 작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 열쇠를 가지고 보고를 하러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던 문에 다가가 열쇠 구멍에 끼워 넣었다.
“가시죠.”
그리고 열쇠가 딸각 하며 한 바퀴 돌아가자 열린 문 뒤는 늘 보이던 유리온실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계단만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