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가장 처음 기억나는 사건은 제일 최근에 있었던 S급 게이트에 관한 것이었다. 생명력을 갈취하기 위해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고 응집석을 만들기 위해 헌터들 수십을 제물처럼 모아 두었던 곳. 어찌 됐든 제 손에 의해 망가지게 됐지만, 갑자기 응집석이 폭발하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분명 손을 썼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인권이라곤 없었으니까.
그 이후로 기억은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누워 있을 규민의 형, 그리고 안면은 없지만 분명 그들이 말한 사료처럼 취급되어졌을 수많은 게이트 속 사람들. 그 기억의 행렬의 끝엔 깊게 묻어 두어서 잘 꺼내 보지도 않았던 제 박살 난 집과 사진이 떠올랐다.
“진짜 열받는단 말이지. 이런 새끼들은 자신이 엄청 대단한 일을 하는 줄 알아. 역겹게.”
시현은 비소를 흘리며 말을 짓씹듯 내뱉었다. 그러나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억울한 마음이 컸던 건지 연구원은 금빛 보호막 안쪽에 꼿꼿하게 서서 시현의 말에 반박했다.
“…우리가 하는 건 세상을 바꾸는 일이야. 어쩔 수 없는 희생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말은 번지르르했다. 그리고 이 사이비에 단단히 홀린 몇몇 사람들은 정말 희생을 원했고. 하지만 그런 자들이 아니라 여태까지 희생당한 이들도 원하던 것이었냐는 거다.
분명 제발 살려 달라 수도 없이 외쳤을 거다.
시현은 두어 번 정도 ‘보호’를 외치는 연구원의 발버둥을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너도 그럼 지금 그 희생이란 걸 하면 되잖아?”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아하, 그러셔.”
어김없이 돌아오는 자기중심적인 대답에 당장이라도 윽박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아 낸 시현은 한번 눈을 깜빡였다. 어차피 지금 말해 봤자 들리지도 않을 테니.
“더 강한 보호… 큭!”
그 와중에도 더 버텨 보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는 연구원에 시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제 눈에는 저 금빛 방어막의 결이 보였다. 이 경지는 예전 무림에 있을 때 그것도 끝물에 겨우 닿았던 경지였다.
지금 이 공간이 제게도 무언가 영향을 미세하게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런 영향이라면 나쁘지 않았다. 결이 보인다는 건 저 형태의 약점이 보인다는 거고 제 능력이라면 저 아주 흐릿하고 미세한 결을 충분히 갈라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망설임 없이 움직인 손이 검집에서 흰색 검을 빠르게 뽑아냈다.
검은 그새 붉은 강기를 덧입고 유려하게 움직였다. 검집에서 빠져나오면서 횡을 그리고 위로 뽑혀 나갔던 검이 다시 대각선으로 그어져 내렸다가 다시 몇 번을 빠르게 움직였다.
“크흑!”
결과는 제 예상과 한 치의 오류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방어막의 장력에 파워는 줄겠지만 검 끝은 충분히 저자에게 닿아 피를 볼 것이다. 그리고 연구원은 세 갈래로 갈라진 가슴팍을 움켜쥐며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당신의 희생으로 너희들이 한 짓은 다 무위로 돌아갈 거야. 그렇게 알고 지옥에서 평생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
믿을 수 없다는 듯 동그랗게 떠진 두 눈 가득 죽기 싫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 차올랐다.
“살… 살려,”
그리고 어김없이 돌아 나오는 살려 달라는 애원. 시현은 그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발을 옮겼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뿌려진 서류를 천천히 줍고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마련되어 있는 임시 공간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태운은 그런 시현의 등을 바라보다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자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아무 감정 없는 인형 같은 얼굴이, 눈이 저를 향하자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연구원은 몸을 더욱 벌벌 떨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너무 많아.”
태운의 손이 조금 움직였다. 제 스승님은 사실 마음이 약했다. 무림에서도 내내 그래 왔었다 나중에는 잘 티 내지 않았지만 그걸 눈치채지 못할 자신이 아니었다.
시현은 분명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지만 그들을 베어 넘기고서는 그날 밤에는 늘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그럴 때면 저도 문밖에 서서 덩달아 마음이 안 좋아지곤 했었다.
수심에 찬 스승님의 얼굴이 안타까웠고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고작 그런 버러지들 따위 때문에.
푸북-
아주 미세한 강기 조각들이 암기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마치 석면 가루처럼 호흡기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급격하게 쏟아 낸 피로 기진맥진 죽어 가던 연구원이 눈을 찢어지도록 뜨고 입을 크게 벌렸다.
손으로 마구 제 몸을 긁고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벌어진 입에서 새빨간 핏물이 줄줄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그 입에서 비명이라고 할 만한 소리는 절대 흘러나오지 못했다.
제 처지를 인정하고 체념 어린 눈빛을 하며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받아들이던 자가 다시 고통에 몸부림치자 태운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제야 만족스러웠다.
이미 내장이 미세하게 조각나고 찢어지는 중일 테다. 당장 지금 누가 오든 그 좆같은 응집석을 쓰든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태운은 저자의 주머니를 뒤져 남은 응집석의 개수를 셌다. 시현은 사람들을 갈아 넣어 만든 이것을 쓰고 싶어 하지 않을 테지만 언제 또 필요하게 될지 모르니까.
“스승님, 같이 가요.”
“빨리 와.”
태운은 그렇게 제 할 일을 마치고선 훌쩍 뛰어올라 순식간에 시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마치 아까 바로 따라붙었다는 듯 말이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제 스승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
경계 밖.
현재 이곳엔 살아남은 헌터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힘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누군가 몬스터들의 공격에서 도움을 주었으며 경계가 팽창하기 시작하자 도망치라고 지시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헌터들을 이고 지고 옮겼다. 그들은 그것을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애초에 이 전방에 배치된 사람들이라면 백도 돈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능력이 좋아도 길드 특성상 늘 하대받거나 무시당해야 했던 이들만 모인 곳이었단 말이다. 그렇기에 맨 처음 이곳에 배치될 때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여기서 전투하다가, 어쩌면 그렇게 죽겠구나.
모두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해도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실적 타령을 하던 놈들이 단 하나도 코빼기를 비치지 않을 리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자신들을 다 챙겨 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도 결국 저 말도 안 되게 위험해 보이는 것에 먹혀들어 갔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어 하며 뒤로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분위기의 가장 중심인 저 둘, 아무래도 친분이 있어 보였는데 너무나 망연자실한 얼굴로 있어 말을 걸기도 힘들어 보였다.
“… 마지막에 전음으로 한 말 들었지?”
“네… 그들이 믿어 줄까요?”
“믿어야지 어쩌겠어. 우리가 형님이랑 같은 길드인 것도 알 텐데.”
“하긴, 안 그랬으면 시현이 형이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나 다른 이들의 생각보다 규민과 유준은 막 침울해져 있거나 하지 않았다. 마지막쯤에 급히 들려온 시현의 전음 때문이었다.
[셰어 길드로 가, 레이첼을 찾아]
단지 두 문장뿐이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단호하고 망설임이 없었다. 레이첼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셰어 길드라면 자신도 잘 아는, 아니 헌터라면 모를 수가 없는 길드였다. 시현이 남긴 말이라면 그동안 셰어 길드와 무언가 있었을 거다. 우리는 그저 하라는 대로 하면 될 거란 생각과 믿음이 차올랐다.
그때 무겁게 축 처져 있던 분위기가 빠르게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경계 가장 가까이에 서서 정신없이 당장 움직여야 할지 혹시 모를 상황에 한 명은 여기서 대기를 해야 할지 의견을 나누던 둘은 뒤늦게서야 변화된 분위기에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어어… 신류하?”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신류하 맞습니다.”
바닥을 나뒹구는 개미들의 사체와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이 장소엔 이질적일 정도로 평소와 같은 얼굴을 한 신류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당신이 왜 여길….”
“우리도 조금 급해서요.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죠?”
조금 당황스러웠다. 다 알고서 왔다는 듯한 말투에 규민은 조금 머뭇거렸다. 시현이 남긴 말은 셰어 길드의 레이첼을 찾으라고 한 것이었다. 신류하가 아니라. 하지만 셰어 길드는 신류하의 것이 아닌가. 그럼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규민이 정말로 무언가 있다는 듯 머뭇거리자 신류하는 꼿꼿하게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조금 풀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동안 시현 님과 몇 가지 계획을 짜 놓은 게 있습니다. 조금의 차질이 생겼기에 시현 님이 남긴 말이 필요하니 부탁드리지요.”
규민은 마치 속이라도 읽힌 듯 눈을 홉떴다가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레이첼이 누군지 알려 주세요. 저는 그 사람한테만 말할 거예요.”
“…후우, 따라오시죠.”
사실 뭐 대단한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시현이 남긴 말도 안전을 위해 위탁하는 말이었지 정보랄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 외에 하나 제가 가지고 있는 게 있었다.
시현이 가지고 있는 라이프워치와 그것을 등록해 놓은 탐지기였다. 평소라면 될 리가 없는 그게 지금 작동했다면 그때의 현상과 비슷할 것이다. 규민은 입을 꾹 다물고는 제게 등을 보이며 길 안내를 하고 있는 신류하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