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어느새 눈에 띄도록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경계와 그 안쪽으로 조금씩 느껴지는 살기들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보이는 몬스터들이 없는데도 살기가 여기까지 밀려왔다면 방금 싸웠던 개미들과 비할 바 안 되게 많다는 뜻일 테다. 만약 이대로 알파 구역으로 넘어가게 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태운은 힘이 오락가락하면서 생겨나는 고통 때문인지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또한 생각지 못한 것이라 시현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점차 초조해졌다.
완전히 힘이 사라지기 전까지 생기는 이상 현상은 내공을 쥐었다 폈다 하는 감각을 동반하긴 했지만 크게 고통스럽다거나 한 건 아니라고 했었다.
그랬기에 어느 정도 도망갈 시간 정도는 벌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저 증상도 더 악화될 수 있다는 걸 간과하고 말았다.
자신이나 태운이나 평범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로 인해 제가 이 경계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그걸 봤다면 저쪽에서도 나와 태운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으리란 생각을 바로 하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고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현은 결국 제가 구하려던 사람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갈등 따윈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몸이 제멋대로 튀어 나간 것에 더 가까웠으니까.
그저 앞에 있는 개미들의 사체를 밟고 또 밟았다. 순간적으로 주변의 시간이 길게 늘어나는 듯했다. 제 능력이라면 빠르게 태운을 낚아채 피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느리게 돌아가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았다.
“태운아, 일단 뛰어!”
시현은 크게 외치곤 바로 앞에 보이는 개미 사체를 다시 한번 밟으며 크게 도약했다.
‘태운아?’
그러나 시현은 허공으로 떠오르며 보이는 태운의 시선에 얼어붙은 듯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태운의 시선은 자신이 아닌 경계에 못 박힌 듯 꽂혀 있었다. 몇 번 정도는 더 발걸음을 옮겨야 했지만, 시현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멈춰 서서는 멍하니 시선을 고정했다.
즈즈즉.
태운의 손이 경계에 닿았다. 팽창하는 경계의 속도로 인한 것이 아니라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민 태운 때문이었다.
유리막처럼 반들반들해 보이던 막은 태운의 하얀 손끝과 닿자 작게 무언가를 픽픽 뿜어내더니 그 국소 부위를 중심으로 작게 울렁울렁하기 시작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태운은 꽤 당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 몸 상태에 대해 생각지 못한 채로 위기를 맞이한 상태였단 말이다. 하나 대체 그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갑자기 이러는지 시현은 이 모든 상황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젠 게이트가 태운을, 조금 더 있다면 시현을 삼켜 버릴 것이다. 그만큼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땅바닥에 붙어 버린 발이 선뜻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도망친다는 생각도 절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붙어 있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저 막에 닿고, 그 안에 삼켜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같이 있는 게 도움을 주기 편할 거다. 지금 태운의 상태는 언제 끝날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언제 제 상태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상태. 시현은 다시 발을 뗐다.
세상이 다시 한번 천천히 움직였다.
태운의 손, 팔, 그리고 반쯤 경계에 먹혀들어 가 한쪽 다리와 팔만 남았을 때. 시현의 손이 그 남은 손에 닿았다. 그 찰나에 많은 것이 느껴졌다. 미친 듯이 울렁이는 태운의 내기와 바짝 서 있는 핏줄들. 그런데도 따듯한 온기. 시현은 눈을 꾹 감았다.
다시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현마저 알파 구역 안으로 먹혀들어 가기 시작했다.
***
“스승님 눈떠 보세요.”
“어엉?”
다정하고 나지막한 태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저도 몰래 꾹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상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느껴졌던 살기와 위험함은 분명 진짜였다. 하나 태운도, 또한 자신도 멀쩡하고 주변도 텅 빈 채 개미 사체들만 널브러져 있으니 시현은 그제야 조금 창피해졌다.
시현은 잠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곧 현실감이 몰려들며 수없이 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몸은? 아니, 그 전에 너 왜 그런 거야?”
“아.”
그리고 그중 가장 최우선으로 떠오른 물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왜 태운은 도망치려고도 하지 않았나. 태운이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리려고 일부러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태운이 그럴 리가 없었다.
“스승님, 제게 뭔가 다른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때 태운의 입에서 답이 아닌 물음이 흘러나왔다. 시현은 뜬금없는 태운의 물음에 잠시 미간을 좁히고 몸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그제야 소름 돋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느껴져.’
이상 현상에 의해 내공이 굳는다거나 문제가 생겨서 시현이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태운의 경지가 자신보다 높았기에 그의 내력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태운이 제게 경계를 세우지 않았기에 그동안은 틈틈이 태운을 살피며 상태를 파악해 왔던 것이었다.
그랬던 시현이기에 내공도, 태운의 상태도 파악할 수 없게 된 지금, 등 뒤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느껴지시나 보군요.”
너무나도 은밀한 변화였기에 시현은 한 번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약 다시 손이 닿아 제가 알아보려고 했다거나 태운이 말해 주지 않았다면 계속 오랫동안 모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아무래도, 이 공간이 저한테만큼은 좋은 것 같습니다.”
“뭐?”
“그러니까, 제 능력이 온전히 다 돌아왔단 뜻입니다.”
말은 짧았지만 많은 걸 알려 주고 있었다.
태운은 이곳에 왔을 때부터 힘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제약이 사라진 지금의 경지가 진짜 태운이 도달한 경지였고 이 경지는 그렇게 노력해 왔던 시현조차 파악할 수조차 없는 경지라는 것.
시현은 결국 이마를 붙잡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 손을 들어 태운을 멈춘 채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그럼 그 이상 현상은 이곳에선 안 나타날 거라는 거야?”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야, 아니면 확실한 거야.”
“확실합니다. 이 공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알고 있던 모든 정보를 토대로 이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태운은 일단 이곳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레이첼도 태운이 이곳에서 제대로 지낼 수 없다고 말한 것일 텐데. 그건 다른 외부의 거대 존재인 세네아즈들로 인해 증명되었으니 팩트였다.
그 사실로 인해 나타난 부작용은 힘이 자꾸 사라졌다가 굳었다가 하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태운이 자꾸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멀쩡하다.’
한마디로 이곳이 외부의 존재들이 움직이기 쉬울 정도로 다른 환경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니 저들의 목표는 이 지구 전반에 마력 농도를 맞추고 그자들이 이곳에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이 장소는 그 덕에 태운의 운신만 가능해지고 저들이 직접 움직이려면 시간이 아직은 필요한 그 중간 지점쯤이라는 뜻이었다.
‘의외로 좋은 상황이 아닌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걸 잘만 사용하면 제대로 뒤통수를 때려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태운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차라리 파고들어서 저들이 가진 허점을 찾아내고 제대로 헤집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태운도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 이상 현상이 나타날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자신 또한 예전만큼은 아니나 그래도 얼추 비슷할 정도의 경지는 회복한 참이었다.
“가실까요?”
그때 태운 또한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듯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며 한쪽을 슬쩍 가리키곤 미소 지었다.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은 가장 큰 살기와 존재감이 느껴지는 곳 두 군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시현은 그런 태운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 중의 하나에서는 그래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아무래도 신의 광산 입구인 것 같은데 말이야. 저 하나는 뭘까? 그때도 저런 게 근처에 있었나?”
지독할 정도로 불길함을 줄줄 뽑아내는 그 위험한 지점은 아무리 예전의 실력이 온전치 못했던 시현이라 할지라도 한 번이라도 겪었다면 절대 알아보지 못할 기운이 아니었다.
“생겨난 것이겠죠. 그자들은 정말 생각하지 못한 이상한 술법들을 종종 써 대니 말입니다.”
“일단 익숙한 곳부터 확인하는 게 낫겠지.”
역시나 태운의 생각 또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무리 자신과 태운이 강하다곤 하나 아직은 조심해야만 했다. 어디를 가든 처음 발을 딛는 곳은 생각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시현은 그래도 아까의 걱정과는 달리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게 된 것에 누군지 모를 이들에게 감사함을 던지며 태운의 손을 꾹 잡았다. 이 와중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인물의 내기 정도만이 느껴졌지만 이젠 불안하지 않았다. 시현은 곧 제 허리에 달린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는 앞을 향해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앞으로 또 둘만 움직여야 하기에 고생스럽겠지만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면서.
그러나 잠시 후, 시현은 검을 든 채 멍하니 서서 제 앞에서 펼쳐진 장면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